에피쿠로스를 두 번 죽이지 말라
  • 고미숙 (고전 평론가) ()
  • 승인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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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의 철학적 기반이 에피쿠로스라고 한다. 그러나 ‘보리빵 하나로 주피터의 열락에 도전하겠노라’고 공언했던 에피쿠로스의 무소유와 몸에 이로운 것은 다 해야 비로소 획득되는 웰빙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나는 자칭 ‘고전 평론가’다. 고전을 현대적 언어로 재구성해주는 걸 업(業)으로 삼는다. 직업(?)이 이렇다 보니, 정치적 정세는 말할 것도 없고, 유행 따위에도 둔감하기 이를 데 없다. 나의 레이더에 걸릴 즈음이면, 이미 한물 간 경우가 태반이다.

이렇게 원초적 ‘뒷북’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도 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말이 하나 있다. ‘웰빙’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그게 문화적 유행이라고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웰빙(wellbeing), ‘잘살기’라는 뜻 아닌가. 아니, 그거야 시대를 불문하고 누구나 원하는 바이고,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20세기 내내 오로지 그걸 목표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한 라디오 방송국에 갔을 때다. “최근 서점가에도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그 철학적 기반이 에피쿠로스라네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에피쿠로스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철학자다. 청년 마르크스가 20대에 쓴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인데, 이 논문의 주인공은 단연 에피쿠로스다.

청년 마르크스는 그의 ‘아타락시아’(평정) 개념에 담긴 자유와 해방의 열정, 그리고 계급적 장벽을 유쾌하게 넘나들었던 ‘우정의 향연’을 예찬해 마지 않았다. 그러니 웰빙과 에피쿠로스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이제야 우리도 ‘에피쿠로스적’인 삶의 방식을 적극 추구하게 되었나 보다, 오직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질주하다 이제야 비로소 ‘지금, 여기’를 적극 향유하게 되었나 보다,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런 설렘으로 한 대형 서점의 홈페이지에 뜬 ‘웰빙 페스티벌’이라는 이벤트를 클릭해 보았다. 거기에는 친절하게도 웰빙의 전략을 네 가지로 요약해놓았다. 1.마음의 평안. 2.돈을 쉽게 빨리 버는 법. 3.날씬하고 건강한 몸. 4.해외 여행.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웰빙이 아니라 웰빙에 대한 집착이다. 요가와 명상을 하고, 유기농 야채를 먹으며, 해외 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여기서 행복이란 삶의 능동적 활력을 끊임없이 외부와 교류한다는 뜻이다. 그저 자기 안에 머무르며 자족하는 건 내용이 무엇이건 집착이나 다름없다.

‘무엇을 먹을까’보다 ‘누구와 먹을까’가 더 중요하다

에피쿠로스 역시 건강한 신체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누구와 먹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정원에 고매한 철학자에서 창녀, 거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이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들끓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리빵 하나로 주피터의 열락에 도전하겠노라’고 공언했던 에피쿠로스의 무소유와 몸에 이로운 것은 다 해야 비로소 획득되는 ‘웰빙’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에피쿠로스에게 웰빙의 전략을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삶을 최대한 향유하라,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그 다음 벗들을 불러모아 우정의 연대를 실천하라, 그것이 소규모 ‘밴드’건, 더 큰 스케일의 ‘코뮌’이건 간에. 비움과 열림이 행복의 크기를 결정해줄 것이다, 라고.

에피쿠로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데모크리투스의 아류 혹은 천박한 쾌락주의자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청년 마르크스로 인해 에피쿠로스는 비로소 삶의 고정된 경계를 유쾌하게 가로지른 ‘우정의 철학자’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이제 다시, 소유의 증식을 통해 웰빙에 집착하는 이념에 에피쿠로스가 동원되는 건 정말이지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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