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 정국 해법 찾기
  • <시사저널> 편집장 ()
  • 승인 1998.11.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고리 깃과 소매라는 뜻인 영수(領袖)라는 말은 봉건군주적 용어이지만, 여·야당 총재가 서로 저고리의 깃과 소매를 여며 최대한 예를 갖추는 태도로 만난다면, 거칠고 첨예한 문제들도 상당히 유연해질 것이다.
현정부 출범 이후 더 이미지가 나빠진 집단을 꼽으라면, 정치인이 첫 손가락을 차지할 것이다. 반세기 만에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존재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들은 으레 국민의 정부에서는 한 단계 성숙한 정치 문화를 향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여당과 야당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기는커녕 파당적 정쟁으로 눈꼴 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오죽하면 시중에 ‘국회의원 무용론’이 대두하고, 시민단체로부터 국회의원 전원이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당하는 졸경에 이르렀을까 싶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김종필 총리서리 인준 문제로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정치권은 의원 빼가기 공방과 표적 사정 시비 속에 난장으로 변해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과 판문점 총격 요청 의혹에 휘말리면서, 이러다가는 정치가 나라를 결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과연 우리나라 살림 형편이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을 감싸안고 견딜 만큼 견고한가.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라는 전대미문의 시련에 맞닥뜨려 하루하루 벼랑 위를 걷는 듯한 시국에 어떤 이유로든 국회와 국회의원이 국정을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여야간 물리적 충돌로 치닫는 것이 상찬받을 짓인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국 운영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집권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여야 관계를 정상 궤도에 진입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대야 관계를 얼마나 원만하게 풀어가느냐 하는 문제는 대통령의 정치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권위주의 체제는 채찍과 당근으로, 민주주의 체제는 대화와 타협으로 여야 관계의 기본틀을 형성한다. 독재 정치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협량의 정치라면, 민주 정치는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풀어가는 관용의 정치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경색 정국은 여야 정당 모두 ‘위상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된 데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만년 야당에서 집권당으로 변신한 국민회의는 국정의 주권을 확실하게 쥐고 책임 있게 밀고 가는 정치적 국량이 충분치 못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또 집권당에서 야당으로 물러선 한나라당은 국정 감시와 정책 대안으로 국민의 지지도를 끌어올려 차기 집권 가능성을 쌓아가는 재충전 노력이 아쉽다. 여는 여답게, 야는 야답게 제대로 변신하고, 서로의 위상과 역할에 대하여 존중하는 데서 대화 정치가 가능한 신뢰가 싹트는 것이다.
만남 자체가 여야 관계 복원 청신호

과거 정권에서도 정국이 앞뒤로 꽉 막혀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나 여야 간에 갈등이 첨예화할 때는 영수회담을 통해 해법을 찾은 적이 많다. 저고리의 깃과 소매라는 뜻인 영수(領袖)라는 말 자체는 봉건군주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지만, 정말 여·야당 총재가 서로 저고리의 깃과 소매를 여며 최대한 예를 갖추는 태도로 만난다면, 거칠고 첨예한 문제들도 상당히 유연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영수라는 호칭에는 당장의 이해타산에 연연하지 않고 넓은 시야와 깊은 도량으로 상대를 포용하는 통이 큰 지도자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여·야 총재가 상대를 영수로 인정하고 만나는 것만으로도 관계 복원의 청신호일 수 있다는 말이다. 청와대측은 세풍 사건에 대한 이회창 총재의 사과 등 몇 가지 조건이 선행되지 않으면 영수회담이 어렵다고 한다. 한나라당도 그런 조건을 들어주면서까지 영수회담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지나치게 만남의 조건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영수라는 이름에 걸맞는 정치력인가 묻고 싶다. 정파의 기세 싸움보다 실종된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발상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야라는 정치 세력의 두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 각종 개혁, 경제 회생, 대북 경협, 민생 안정 등 초미의 국가 현안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국민을 돌아보아야 한다. 여·야 총재의 영수다운 용단을 기대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