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진 감독의〈킬러들의 수다〉
  • ()
  • 승인 2001.10.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독/장 진

주연/신현준·신하균·정재영·원 빈

제작/시네마서비스


서울 한복판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고와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007 영화를 방불케 하는 사건 현장에서 유유히 걸어나오는 남자 넷. 그들은 첩보 영화의 주인공처럼 경찰을 비웃으며 포위망을 빠져 나간다.


상연(신현준)·정우(신하균)·재영(정재영), 하연(원 빈). 이 4명은 전문 킬러다. 냉철한 성격으로 팀의 리더인 상연, 폭약 전문가인 정우, 사격에는 달인인 재영, 컴퓨터에 능통한 막내 하연. 최고 킬러인 그들은 경찰이나 법보다 때로는 자신들이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의뢰인들은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킬러들을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한 여인, 등창이 썩어가는 영감을 보다 못한 할머니, 자기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사람까지. 킬러들은 의뢰인이 원하는 날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처리한다. 계약서도 쓰고 학생은 할인도 해준다.


100% 성공률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어느 날 킬러로서의 존재를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사건 의뢰가 들어온다. 이들이 좋아하는 아나운서 오영란(고은미)이 살인을 의뢰해온 것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이들은 긴급 작전을 펼친다. 예리하고 명석한 조검사(정진영)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자 쫓고 쫓기는 숨가쁜 추격전이 벌어진다.



김영진★ 5개 중 3개

장진의 유머 물이 올랐네




장 진의 세 번째 영화 〈킬러들의 수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아니,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해도 좋다.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그리고 단편인 〈극단적 하루〉에 이르기까지 장 진은 간첩이나 킬러 같은 전문가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임무 수행에 쩔쩔 매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끌어냈다. 〈킬러들의 수다〉도 웃음을 주는 방식은 비슷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문득 드러내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빈틈에서 유머를 보게 하는 것이다.


상연·재영·정우·하연은 의뢰받은 살인 청부를 빈틈없이 처리하는 살인청부업자이다. 하지만 이들이 죽여야 할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등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 꼬리를 물면서 상황이 꼬여 간다.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에서 한 박자 늦게 웃기는 장 진의 타이밍 감각은 유별났다. 연극 연출자 출신인 그가 영화 매체에 적응하지 못한 탓으로 보였던 그 타이밍 감각이 이 영화에서는 개성이 된다. 이제 우리가 그의 타이밍 감각에 익숙해진 것이다. 웃겨주기를 기대한 순간에는 시치미를 떼고 '이게 뭐야' 할 때쯤 웃기는 상황을 펼쳐 놓는다.


범죄자를 취조하던 검찰이 유력한 증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카메라가 천천히 범죄자의 얼굴로 이동하면 그는 짐짓 슬픈 얼굴로 자기 감정을 과장하고 있다. 이윽고 검찰이 나가면 계속 울고 있던 범죄자는 눈물을 딱 그치고 평상시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때 화면은 가차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풀어주었다 놓아주는 이 코미디 감각은 조금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관객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리듬에 적응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역과 단역 인물들에게도 인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은 〈킬러들의 수다〉가 지닌 큰 장점이다. 그러나 앞선 두 영화와 달리 꽤 대중적 호흡에 신경을 쓴 이 영화는 사회 주변부 인물들에게 영웅주의의 외피를 입히는 클라이맥스에서 시시해진다.


오페라가 열리는 극장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의 대단원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그늘 속의 전문가들과 아웃사이더들에게서 빈틈을 잡아내 공감을 주는 장 진의 코미디와 어울리지 않는다. 익숙한 상황을 보여주고 좀 엉성하게 폼을 잡으며 반찬의 가짓수를 늘렸지만 내실이 없다. 〈기막힌 사내들〉과 〈간첩 리철진〉의 황당하지만 씁쓸한 결말과 달리 말랑말랑하고 맹숭맹숭한 여운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 실망하기는 이르다. 장 진식 유머의 타이밍 감각만큼은 이제 본궤도에 오른 느낌이 든다.



심영섭★ 5개 중 3개

킬러들의 '구라' 웃기지 않는다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장 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신나게 웃어 본 적이 없다. 대개는 옆 사람들이 킬킬거리는 것을 보고 웃어야 하나 보다 하고 두리번거리거나, 신나게 웃다가 '지금 내가 왜 웃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장 진 감독의 코미디는 처음부터 장 진식 웃음의 레일에 올라탄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청량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레일에서 언제 열차가 오나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생뚱맞음을 안겨주는 웃음의 바코드를 들이민다.


〈킬러들의 수다〉는 여전히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으로서 주류 감독의 면모를 보이려는 그의 야망과 돌발적인 에피소드로 승부하는 그의 구습이 함께 동거하는 어정쩡한 모습을 띠고 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플라잉 카메라를 써서 유려한 카메라 워크로 한강변을 넘나들더니 클라이맥스에서는 〈언터처블〉처럼 오페라 무대를 이용해 반전과 극적 긴장을 더하려 든다. 이렇게 전격적인 영화 연출을 실험하는 가운데 〈I never miss you〉를 두고 '나는 절대 미스유가 아니다' 하는 유머를 구사하니 갓 쓰고 양복 입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상황에서도 일발 장전해 한 방을 쏘는 장 진식 유머는 허를 찌르는 재기 발랄함이 있다. 특히 막내 하연이 킬러 형님들 앞에서 사랑에 관해 일장 설교를 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느릿느릿 웃음을 유도하는 타이밍 감각과 의뭉스러운 태도로 절묘한 폭소탄을 터뜨린다.


막내 하연의 대사 중에 "우리는 킬러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 하는지 난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우릴 찾는 걸 보면 지금 사람들에게 우리가 간절히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라는 말이 있다. 장 진은 늘 이런 식이다. 기민함과 냉정함이라는 직업적 수행 조건과는 도저히 화해하지 못하는 순박하고 어리숙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에 대한 증오심과 사악함에 차 있는 우리 사회의 면모를 폭로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장감독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만큼이나 순박하고 순진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부분이 아닐까?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이러한 시도는 코미디 본래의 전복적 기능을 잃고 자칫하면 시트콤류의 웃음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게 독종이던 검사가 착한 킬러들의 심성에 감화해 제발로 걸어 들어온 킬러를 순순히 내보내 준다는 설정에는 캐릭터의 일관성이 없다.


뼈 있는 웃음을 주기에는 너무 순진무구하고, 생략과 압축의 이미지로 이야기를 이끌고 가기에는 너무 연극적인 〈킬러들의 수다〉. 살벌한 살인 게임의 규칙을 '구라로 풉시다'라는 순진한 처방전 수준에서 봉합하는 〈킬러들의 수다〉는 장 진 감독의 한계와 장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