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그 야만성에 대한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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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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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아직 안 갔다온 <시사저널>의 젊은 독자들에게 나는 오늘 한국 주간지 역사상 최대의 감사 보너스를 드리겠다(다만 군대 가고 싶어 죽을 지경인 말뚝 체질 친구들은 보너스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우선 신체 검사 70분 전 껌을 한 통 산다. 껌을 싼 은박지를 뜯는다. 그 은박지를 좁쌀 크기로 수십 개를 만들어 삼킨다.





검사장에서 엑스선 사진을 찍는다. 현상된 사진을 판독하는 군의관은 그때부터 초유의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학교에서 배운 바도 없거니와 임상에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한 징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식도나 위에서 이상한 작은 천공이 수십 개 보이기에 그렇다. 쉬운 말로 위나 식도에 수십 개의 작은 구멍들이 뻐끔뻐끔 뚫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뢴트겐선이 좁쌀 모양의 은박지를 통과하지 못했기에 네거티브 필름에는 그렇게 구멍 뚫린 위장이나 식도 모양으로 현상되는 것이다. 의사 생활 중 처음 보는 중증인 동시에 판정 불능. 재검사 명이 나오면 재검사 때도 물론 동일한 요령으로 반복하면 된다. 결과는 입대 불가. 검사장 대문을 나서기까지 적당한 수준의 우울한 표정을 지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이제 군대나 가서 부스러지는 그런 20대와도 안녕이다.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를 보면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자기의 어깨뼈를 각목으로 내려치는 친구가 나온다. 위에 제시한 보너스 항목은 세간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나의 절친한 친구가 감행한 20년 전의 비전(秘傳)이다. 그 친구가 과연 군대를 갔는지 안 갔는지 알고 싶으면 따로 연락 바란다. 하지만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이런 일은 <세 친구>나 ‘내 친구’에게만 있는 사연이 아니다. 모름지기 대한민국의 모든 군 입대 해당 연령자라면 대개가 절실하게 고민하는 문제이다. 한국의 젊은이는, 해서 일생 한 번씩은 파우스트 박사가 된다. 파우스트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에게 영혼의 거래를 흥정했듯, 일부 젊은이는 군대를 안 가기 위해서라면 오늘도 악마와의 흥정을 불사한다.


제대한 대한민국 성인들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이 있다. 분명히 제대를 했는데도, 아직 군대에서 ‘뺑뺑이’를 도는 꿈이다. 그런 꿈이나, 남자들이 모였다 하면 군대 이야기 혹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되돌이하는 것은 기실 그것이 한국 성인 남자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 곧 정신적 외상(外傷)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기디질긴 외상은 유독 한국 사내들이 공포심 많은 연약한 종자여서 생긴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군대에 가는 일은 당분간 인간의 신분을 차압당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2년 넘게 짐승으로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사태라는 것, 거기서 예의 외상이 발생한다. 국방부 관련자들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진실을 이야기하면 한국의 군대는 그렇게 야만적이다. 한국 사회의 분석을 희망하는 외국인일 경우 이 문제의 중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분석은 바닥 모르는 삽질에 그친다.


유승준은 ‘군대의 의미’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미국 시민 ‘유 스티브 승준’(가수 유승준)이 지난 2월2일 공항에서 입국 거부되어 미국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유승준에 대한 격렬한 비난의 근저에는 한국 사회 심부에 도사리고 있는 야만성과 이어지는 끈이 있다. 야만과 짐승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유독 유승준에게만 그런 사태가 면제된다는 것은 성한 눈으로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게 된다.

물론 그로서도 돈을 더 축적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미국 시민으로서 받을 수 있는 전지구적 혜택을 짐승의 시간과 교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앞뒤가 어찌되었건, 유승준은 군대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자리하고 있는 의미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유 스티브 승준’에 대한 숱한 비난과 분노는, 그러나 유승준에게 향한 것이 아니다. 그 비난은 유승준이 가지 않은 곳, 하지만 장삼이사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짐승의 눈동자를 향한 것이다. 나아가 지금도 여전한 군대의 야만적인 시스템과 그것을 허용하고 심지어 찬송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성에 겨누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 더, 유승준을 ‘칼받이’로 내세운 배후는 이야기하지 않고 시종 유승준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언론도 그 분노의 과녁에서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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