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평-김영진 · 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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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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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맨
신나는 활극
지루한 드라마-심영섭




가면을 쓴 스파이더맨이 뉴욕 마천루 숲을 날아다니며 벌이는 활극이라면, 관객이 설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비슷한 모티브를 다룬, 가면을 쓰고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적이며 고독한 영웅 이야기 <배트맨>이 넘보기 힘든 활극의 재미일 것이다. 그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도시적 영웅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을 함께 묶기에는 후자 쪽이 훨씬 함량 미달이다.


<스파이더맨>은 아예 처음부터 차근차근 소재에 밸 수 있는 빛과 그림자의 농도를 지워 나간다. 주인공 파커는 천재 과학 소년이라지만 스파이더맨이 된 후 그에게서 그런 영민한 과학적 머리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학생의 사랑을 얻기 위해 레슬링 내기 시합에 출전하러 가는 날 삼촌의 진지한 충고에 코웃음을 친 그는 신나게 링 위에서 한판 활극을 즐긴다. 훗날 그에게 각성을 안겨주는 삼촌의 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충고를 되새긴 그는 도시 곳곳을 활보하며 도시의 악행을 감시하고 심판하지만, 어쨌든 마냥 즐거워 보인다. 그러나 가면을 쓴 영웅이 등장하는 이런 부류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매력이 없다. 하물며 그에게서 비극적 영웅의 필수 조건인 내파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애초부터 힘든 것이다.


파커를 연기하는 토비 맥과이어의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은, 상처받기 쉬울 듯하지만 그만큼 순백의 정서가 배어나는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 파커는 그렇게 복잡한 감정이 요구되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된 주인공의 캐릭터를 축으로 <스파이더맨>은 코미디로도, 비극으로도 나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직선적으로 쭉 뻗어 가는 액션 영화의 역할을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니 활극의 순수한 재미를 주는 도시 빌딩 사이의 곡예를 빼면 이 영화의 다른 부분이 지루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특히 일란성 쌍둥이처럼 모든 것이 <배트맨>과 비슷하게 진행되는 플롯, 맞수 악당과 수 차례 대결하고, 자기 정체를 모르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단락에 이르면 그만 뻔히 알고 있는 기승전결에 맥이 빠진다.


아예 위험 강도를 점점 높이는 롤러코스터처럼, 스파이더맨의 액션 강도를 더 높이지 않는 한, <스파이더맨>의 다른 모든 요소들은 기존 영화에서 보아 온 것의 틀에 박힌 재탕일 뿐이다.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립 공식을 써먹으면서 <스파이더맨>은 그 모든 상투형을 천진하게 되풀이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담은 갱신과 반복의 사이클을 오락가락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반질반질한 영웅 이미지를 되풀이하며 테크놀로지만 혁신했다.






미국식 초인 영화의
사춘기 버전-심영섭



문학이나 영화에서 인간과 곤충이 한 몸이 된 기이한 생명체를 보는 경험은 낯선 일이 아니다. 일찍이 카프카는 거대한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를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관계 단절을 이야기했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바퀴벌레나 파리와 한 몸이 되어버린 주인공들이 헤어진 옛 애인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만들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반인반충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신성 불가침이던 인간의 몸이라는 관념에 일종의 신성 모독적인 대답을 보낸다.


그러나 본시 할리우드라는 곳은 슈퍼맨·X맨·배트맨·할로우맨·엘리펀트맨·레인맨 등 온갖 맨이 활개치는 곳. 그곳은 사춘기 소년이 거미에 물려 초능력이 생긴 것이 마냥 좋아 뉴욕의 빌딩 사이를 팔짝팔짝 뛰어 다니는 장소이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바로 배트맨과 X맨이 등장함으로써 점점 그늘을 드리우는 초인 영웅의 세계에서 막 양지로 나온 슈퍼맨의 사춘기 버전처럼 보인다.


문제는 샘 레이미라는 감독이 리처드 도너(<슈퍼맨> 감독)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 그는 <이블 데드>라는 영화로 전세계 호러 팬의 우상이 되었고, <크라임 웨이브> <다크맨> 등으로 컬트 감독의 만신전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다크맨>에서 그가 보여준 ‘오해받은 괴물’의 비극은 많은 관객들에게 타자로서의 자신을 대면하는 처절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다양한 시점 숏과 360° 회전 카메라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사진’인 영화가 주는 시각적 쾌락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어두운 유머와 비극을 대면하는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에 이르러서 샘 레이미는 자신의 역량과 초인 영화의 한계 모두를 기어오르려다 실패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스파이더맨은 블록버스터적인 시각의 쾌감만을 주는 끈끈이 괴물로 변모해 버린 느낌이다. 카리스마가 전혀 없는 토비 맥과이어의 연기도 맥 빠지지만, 윌리엄 대포가 연기한 그린 고블린은 캐릭터의 밋밋함 때문에 배트맨의 귀엽던 악당 조커와 펭귄맨이 새삼 그리워지게 만든다.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현란한 특수 효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은 뉴욕이라는 콘크리트 정글을 헤치고 다니는 거미 옷을 입은 타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3D 카메라의 마술은 벌써 디즈니가 해낸 일이다.


개봉하자마자 벌써 해리 포터의 흥행 신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스파이더맨>. 이 영화의 진정한 의의라면 ‘오직 강력한 힘만이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다’는 최면술로 테러 사건으로 심리적 상처를 입은 미국인들에게 톡톡한 치유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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