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유럽 인쇄공은 대식가이자 술꾼이었다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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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시타 시로 지음 <책의 도시 리옹>
 
르네상스를 전후한 시기의 유럽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몇몇 매혹적인 도시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지역의 피렌체·베네치아·제네바, 프랑스의 파리 등이 대표적으로, 이 도시들은 그 지명만으로도 현대의 독자를 설레게 할 만큼 풍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한 도시를 더 들 수 있다면 아마도 리옹이 되지 않을까.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처지는 편이지만, 리옹은 15~16세기 유럽의 ‘네거리’로서 파리와 자웅을 견줄 만큼 번성한 상업 도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옹은 출판 문화를 꽃피운 책의 도시이기도 했다. 15세기 후반 파리에 이어 활자본을 찍기 시작하며 리옹은 파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지식 산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파리의 책 문화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학술서와 전문서를 주로 펴낸 데 반해, 리옹의 출판 문화는 소란스런 ‘장사꾼 거리’ 한복판에서 탄생해 세속적 관심을 반영한 책들을 주로 생산해냈다. 왕권의 통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도시 분위기에 힘입어 종교전쟁 때는 각종 이단 서적과 금서의 생산기지가 되기도 했다.

르네상스 연구자 미야시타 시로(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교수)의 <책의 도시 리옹>(오정환 옮김, 한길사 펴냄)은 15~16세기의 리옹을 주무대로 삼아 출판을 둘러싼 세계의 갖가지 양상을 보여주는 책이다. 출판의 역사를 씨줄로, 당시의 사회 경제적 전후 관계를 날줄로 함으로써 한 도시의 문화사까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리옹에서 책의 문화가 꽃핀 것은 은행업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매년 가을 성대한 도서전을 여는 프랑크푸르트도 금융업의 도시다). 비용이 많이 들고 자금 회수가 느려 출판업이 대금업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5세기 후반에 리옹은 종래까지 유럽의 상권을 틀어쥐고 있던 제네바로부터 ‘큰 장’(일종의 국제견본시)을 개설하는 권리를 넘겨받으면서부터 성세를 누리게 되는데, 지역 자본가나 상인 들은 이 큰 장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출판에 투자했다.
책이라는 신제품은 큰 장의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는, 전형적이며 ‘전도 유망한’ 상품이었다. 자본가와 상인 들은 선술집이 즐비한 시장 거리 곳곳에 인쇄공방을 차렸고, ‘컴퍼니’라는 회사 제도를 출판계에도 도입하여 대형 기획을 추진했다. 그들은 지식의 도구라는 라틴어조차도 두툼한 법령집 같은 국제적 상품으로 변신시켰다. 라블레의 대작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리엘>,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도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업은 견직물업과 더불어 ‘리옹 큰 장이 낳은 두 효자’였다.

페스트·종교전쟁·대기근을 겪고 난 16세기 후반부터 리옹의 출판업은 갑작스레 피폐해졌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유럽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를 벗어나면서 리옹도 같이 쇠퇴한 탓이었다. 인쇄공방들은 활기를 잃어갔고 서적상들은 제네바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들은 종교전쟁 와중에 벌어졌던 학살을 피해 제네바로 망명한 리옹 출신 인쇄공을 고용해 책을 만들어서는 표지 등을 위조해 리옹의 책이라며 팔아먹었다. 백수십 년 전 제네바로부터 큰 장 개설권을 탈취했던 리옹이 이번에는 출판업을 제네바에 빼앗긴 것이다.

리옹에서 꽃이 피고 진 책의 문화사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책의 역사가 아니라, 책의 역사에 꿰인 이야기들에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로 가득찼던 리옹에서는 때로 소란이 지나쳐 폭동으로 비화했고, 카톨릭파와 신교파의 종교전쟁(인근의 제네바가 칼뱅의 근거지였다)은 끔찍한 학살을 낳았으며, 페스트와 매독이 만연해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되기도 했다.

노동자이자 지식인이기도 했던 인쇄공들은 직업적 자긍심이 높아 단체를 결성하고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대식단(大食團;고된 일에 시달렸던 인쇄공들 대부분이 대식가이자 호주가였다)’에 소속된 인쇄공들과, 싼 임금으로도 일한다고 해서 ‘배신파’라고 불렸던 인쇄공들은 서로 테러를 당하지 않기 위해 떼로 몰려다녔다.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책의 문화사와 도시의 풍속사로 솜씨 좋게 엮어놓고 있다. 마치 4백여년 전의 리옹을 거닐듯, 독자를 이 고도의 거리 곳곳으로 안내하며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들려준다. 책 군데군데 수록된 리옹의 지도와 조감도를 훑으며 저자의 안내를 따라 가다 보면, 중세의 상업 도시 한복판에서 태어나 영광과 쇠망의 계절을 겪은 ‘잃어버린 책의 거리’가 드라마처럼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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