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 향기에 취하면 마음에도 꽃이 만발
  • 평창·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3.05.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원도 평창 가리왕산 ‘들꽃 보기 체험’ 동행 취재기
크고 작은 차량 20여 대가 흙탕물이 흐르는 임도(林道)를 따라 산 정상에 모여든다. 차들이 길가에 멈추자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든 사람 30여 명이 우르르 내린다.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흩뿌린다. 그러나 그들은 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표정이다. 오로지 한 곳만 바라본다. 오른쪽의 완만한 비탈에 펼쳐진 짙푸른 풀밭이다. 누군가 ‘하-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자세히 보니 안개가 유령처럼 뒤덮고 있는 풀밭은 보랏빛·노란빛 꽃 천지다. 뒤따라 터져 나오는 감탄사, 감탄사!

비 오는 4월29일 아침,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 정상(1561m)에서 열린 ‘들꽃 보기 체험’ 행사의 한 장면이다. 들꽃 보기 체험은 동부지방산림관리청이 1년에 딱 한 번 여는 행사로 올해가 두 번째다. 프로그램은 간단하다. 사계절 내내 출입을 통제했다가 들꽃이 한창일 때 선착순으로 2백명을 초청해 36만평에 달하는 들꽃 군락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참가 인원은 고작 30여명, 쉬지 않고 내리는 비 탓에 평창행을 포기한 사람이 많았다(지난해 첫 행사에는 2백여명이 참석했다).

들꽃 보기는 자연의 경이감에 사로잡히고 눈과 마음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다양한 들꽃을 한 곳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가리왕산 들꽃 보기 체험은 값진 것이다. 들꽃 전문가 김필봉씨는 들꽃의 매력이 “질긴 생명력과 싫증 나지 않는 아름다움에 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가리왕산을 찾은 탐방객들은 그 이상의 무엇을 발견한 듯한 모습이다.

처음에 탐방객들은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들꽃 군락지 주위를 맴돌았다. 들꽃 전문가 유선균씨가 나서면서 분위기가 잡혔다. 그가 “이곳은 현호색 군락지이다. 그러나 멸종 위기에 놓인 한계령풀꽃도 볼 수 있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노란 꽃에 가 닿았다. 종처럼 생긴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단 한계령풀꽃은 어찌나 샛노란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비 때문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쭉 펴지는 느낌. 꽃이 인간의 희망이자 기쁨이라는 말의 뜻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보랏빛 현호색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양이 유별나다. 기다란 나팔 같기도 하고, 불에 닿아 찌그러진 깔때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선균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피어 있는 현호색은 인간 나이로 치면 스물다섯 살쯤 된다. 꽃도 예순 살쯤 되면 늙어 죽는다.” 5만년 전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히아신스와 수레국화를 시신과 함께 묻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꽃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꽃들은 언제나 너무 일찍 시들고 너무 연약하다.

다시 찬찬히 현호색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죽음의 어두운 이미지는 발견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구절이 떠오른다. ‘… 꽃이 단명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온갖 향기와 색깔로 치장해야 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아리따운 자태로 몸을 흩날려야 한다. 생식의 재료와 도구도 연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한눈 팔 사이 없이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샤먼 앱트 러셀 <꽃의 유혹>에서).

현호색 군락지에는 그 외에도 소복을 연상시키는 홀아비바람꽃, 기묘한 모양의 흰괭이눈, 병든 소녀처럼 연약해 보이는 꿩의바람꽃 들이 온갖 향기와 색깔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 대면 부러질 것 같은 꽃대가 유난히 눈에 띈다. 여리디 여린 대궁에서 어떻게 이처럼 화려한 꽃이 피어나는 것일까. 비밀은 뿌리에 있었다. “연약해 보일지라도 현화(顯花)식물의 뿌리는 보통 30cm 이상 뻗어나간다”라고 유선균씨는 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화식물(꽃이 피어 씨로 번식하는 식물)의 모든 ‘긴 뿌리’는 토양 속의 영양분을 맛보고, 검사하고, 끌어모으는 데 이용된다. 그 과정에서 미네랄이나 염분이 풍부한 지점에 도달하면 뿌리는 신속하고 탐욕스럽게 경쟁자들의 물과 영양분까지 독차지한다. 따라서 어린 식물은 늘 배고플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꽃의 일생도 인간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꽃들의 세계에 투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보다 더 살갑게 공생 관계를 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레지와 독초로 분류되는 박새의 공생이 좋은 예이다. 얼레지 뿌리는 멧돼지가 좋아하는 ‘특식’. 멧돼지는 얼레지 군락지에 자주 나타나 코를 땅에 박고 그 뿌리를 찾아 먹는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레지 사이에 있는 쓰디쓴 박새 뿌리까지 씹어먹게 된다. 효과는 금세 나타난다. 퉤퉤 거리며 박새 뿌리를 뱉어낸 멧돼지가 그 자리를 뜨는 것이다. 얼레지는 멧돼지를 쫓아준 데 대한 고마움에 답례하듯 박새 주위를 에워싸 다른 식물의 출입을 ‘봉쇄’한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사람들 마음이 조급하다. 서둘러 얼레지 군락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곳 역시 꽃, 꽃, 꽃 천지다. 그 사이로 하늘말나리·풀솜대·피나물·모싯대·홀아비꽃대·앵초·투구꽃·앉은부채·박새 같은 현화식물이 뒤엉켜 있다. 이 식물들은 얼레지에 이어 봄부터 가을까지 줄기차게 꽃을 피워낼 것이다. 엷은 보랏빛 얼레지는 비에 젖어 수줍은 아이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다. 누군가 햇볕이 나면 아래로 늘어뜨린 꽃잎이 뒤로 말려 올라간다고 설명한다.

유선균씨가 또 한번 나섰다. “귀하게 흰색 얼레지도 핀다. 달 밝은 밤에 보면 사방이 캄캄해도 그 꽃만 보인다.” 사람들이 꽃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그러나 꽃들은 탐방객들을 불청객으로 생각했는지, 끝내 흰색 얼레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가리왕산의 들꽃은 벽돌이나 희지 않은 판자 벽에 잘 어울리게 개발된 현란한 꽃들과 사뭇 달랐다. 좀더 멋있어 보이기 위해, 좀더 크게 자라기 위해, 좀더 오래 꽃을 피우기 위해, 좀더 환한 척하기 위해 꾸미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서서 보는 사람에게 기쁨과 위로를 줄 뿐이었다. 그리고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가려진 고통 불행 투쟁 이기심 따위를 살그머니 내보이며 ‘삶은 이런 것이야!’하고 말하고 있었다.

들꽃들이 언제나 그럴듯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리 공부하고 준비한 뒤 들꽃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행복과 메시지를 반드시 전달받을 것이다. 물론 굳이 가리왕산같이 깊은 산으로 갈 필요는 없다. 서울 남산의 야외식물원이나 청량리의 홍릉수목원, 경기도 포천 광릉수목원과 용인 한택식물원에서도 쉽게 들꽃을 만날 수 있다(87쪽 표 참조). 그러나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국립공원의 들꽃·숲 기행에 참여하는 것이 더 좋다. 해설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