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송두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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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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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성 교수(53)는 송두율 교수(59)의 둘도 없는 지인이다. 그는 후배이자 동지,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25년 동안 송교수와 인연을 맺어왔다. 이번의 고국 방문 때도 그는 독일에서부터 동행했다. 그동안 송교수의 친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의 어느 연주회장에서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장중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화재가 발생해 청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지휘자가 홀연히 연주 곡목을 영국 국가로 바꾸어버렸다. 청중은 경건한 자세로 국가를 경청하며 그 곡이 끝날 때까지 동요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화재가 진압되고, 아무런 소동이나 손상 없이 연주회가 조용히 끝났다. 국가가 인명을 구제한 것이다.

나의 유학생 초년병 시절 언젠가, 베를린에서 동포들이 모여 소박하게 8·15 경축식을 거행하면서 모두 기립해 애국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우연히 나는 송교수의 옆에 서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동안 그는 손수건으로 끊임없이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악했다. 과격한 반체제 투사로 기려지기도 하고 또 동시에 기피되기도 하는 역전의 투사가 어찌 저렇게 나약하게 눈물을 보일 수 있는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애국가라든가 조국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송두율 교수를 나의 20대 후반이자 그의 30대 중반이었던 1977년 가을,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다.

‘빨갱이’와 ‘사쿠라’밖에 없었던 베를린 한인 사회

당시 베를린의 한인 사회에는 ‘빨갱이’와 ‘사쿠라’만이 공존하고 있었다. 고국을 조금만 비판해도 빨갱이로, 반대로 조금만 치켜세워도 사쿠라로 금세 낙인 찍히는 실정이었다. 한국 사회의 냉전적 대결 의식이 베를린에서는 이런 극한적 대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당연히 ‘빨갱이’의 수괴급이어서 기피의 1차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박사 논문 지도교수는 20세기 세계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하버마스였으니, 정치 사상을 전공하고자 했던 나에게, 그는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제 막 공부하겠노라 허겁지겁 날아온 나의 나이와 비슷한 28세쯤에 이미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버마스 같은 대 철학자 밑에서. 그래서 나는 호기심 반, 젊은 학도다운 모험심 반에 들떠, 내 발로 그를 직접 찾아가 만났다.
당시 그는 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학 부설 동아시아연구소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국학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학 도서관까지 갖추어져 있어 한국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곤 했다.

그 연구소에서 공부를 함께 하고 한국 문제에 관해 토론도 자주 벌이면서, 나는 그와 가까워졌다. 그런데다가 나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독신으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고학하던 노총각 신세여서, ‘형수님’(나는 송교수의 부인을 이렇게 불렀고, 송교수를 ‘송선배님’이라 칭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으로부터 밥도 자주 얻어 먹었고, 또 내 자신이 두주불사하던 형편이라 역시 그러하던 송교수와 무던히도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분 댁의 두 아들 녀석이 아직도 어려서, 그 놈들과 씨름도 해가며 마치 한가족처럼 어울려 지냈다. 그 녀석들은 ‘호성(虎聲)’이라는 나의 이름에 빗대어,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Tiger(호랑이) 아저씨’라 부르고 있다. 한마디로 나는 가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가 예컨대 민족사적 비극이었던 광주 사태를 이국 땅에서 함께 처절히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점에서는, 함께 싸우고 저항하기도 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뮌스터 대학에서 사회학 정교수 자격증을 얻었다. 외국인으로서는 대단히 힘든 학문적 업적까지 쟁취한 것이다. 게다가 생활 조건이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해외임에도, 조국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저항적 지식인으로 살고 있었으니, 송교수는 가히 모든 유학생들의 ‘우상’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골고루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나약한 성격 비판 받은 ‘타고난 선비’

칸트는 이런 말을 했다.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고,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 우리 동양 사회에서도 전통적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 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높이 기리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송교수는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순수하고 탁월한 학자다. 그러나 그는 결코 투사나 운동가는 못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무엇보다도 운동가로서 지녀야 할 대중성이나 저돌적인 담력 같은 것이 그에게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어려움을 모르고 고이고이 자라온 온실 속의 난초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모험을 저지를 수 없는, 곧고 부드럽고 착하기만 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런 탓에 그와는 이질적인 분위기에서 마구잡이로 성장해온 나로서는 독일에서도 자주 그가 참 답답하다고 느꼈으며, 이따금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항운동까지 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베를린에서 지켜보기에도, 그는 광부와 간호사 출신으로 구축된 그쪽 운동권 주류에서도 소외당하는 눈치였다. 때에 따라 그들은 강인하고 과격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송교수에게 나약하다든가 온건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곤 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정치 사상을 전공하는 나의 관점에서, 그의 이념적 위상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중도파 정도 수준이 아닌가 한다.
그의 한국어 감각은 대단히 어눌하다. 지친 몸으로, 수사관 앞에서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헤아리지도 못한 채 마구 내뱉은 말도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지금도 그가 타고난 선비라고 확신하고 있다. 성실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순수한 예지력을 갖춘 양심적인 학자로서, 더러운 곳에 기꺼이 더불어 몸을 던질 줄 모르는, 순수하기만 한 학 같은 인물이 바로 송두율 교수 같은 분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는 외국에서 남북한을 공정하게 함께 사랑하는 선비로 살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를 ‘한반도적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이번에 그는 입국하자마자 37년 간의 시차도 극복하지 못한 채-아마도 수사관 스스로도 엄청나게 놀랐을 정도로-국정원 조사에 ‘지나치게’ 솔직히 임했다. 뿐만 아니라 오랜 해외 생활로 말미암아 그의 한국어 감각은, 글이 아니라 말로서는, 대단히 어눌할 수밖에 없다. 그는 시차 극복도 하지 못한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가 엄청난 해석의 차이를 유발할 수 있는, 대단히 미묘하고 까다로운 대공 수사 용어에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분명히 지쳐 헉헉거렸을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헤아리지도 못한 채 마구 내뱉은 말도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가 노동당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을 나도 이번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며칠 전 그의 부인조차 그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고, 딱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일러주었다.
하기야 독일 대학에는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한 교수도 부지기수니, 입북할 때 일종의 ‘통과 의례’로 노동당에 형식적으로 가입한 적이 있다는 희미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왜 그 사실을 미리 밝히지 않았느냐고 마구 삿대질해대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온당한 처사일지 하는 것도 한번 곱씹어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강산이 네 번쯤 변한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고 서울 시내로 들어서면서, “예전에는 한강에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가 노동당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을 나도 이번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며칠 전 그의 부인조차 그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고, 딱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일러주었다.

물론 송교수는 현실적인 국내 상황에 대해서는 ‘우물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당 입당 사실이 남한 내에서 어떠한 막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 채 별 생각도 없이 그토록 엄청난 사실을 스스럼없이 자백했다면, 그것은 그의 학자적 양심이 불량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이브한 성품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이제 송교수가 창안한 ‘내재적 접근법’ 자체를 북한이 아닌, 송교수 개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단으로 원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송교수는 발광체가 되었다. ‘100년간의 고독’과 맞싸우면서, 그는 이제 스스로 빛을 만들고 쏘아댈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정신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송교수를 그의 망명지가 아닌 바로 이 땅에서 직접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행운이다. 그러나 이 행운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쟁취한’ 것이다. 따라서 이 행운 속에는 의당 그의 몫이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 행운을 향유하는 것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경계인’의 가장 커다란 고통일 것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레이스 짜는 여직공의 비애’라는 경구를 통해 초기 산업화 단계의 자본주의적 모순을 통렬히 풍자한 적이 있다. 가난과 피로에 찌든 여직공이 아름다운 레이스를 짜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이름 모를 귀부인의 치장과 허영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제 멋을 알 만한 여직공은 자신은 초라하기 그지없는데도 우아한 귀부인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혹사당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였다면 어김없이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노동자 소외’라고 규정했을 터이다.

‘추궁하는 사회’에서 ‘포용하는 사회’로

송교수는, 말하자면 그 자신 역시 힘을 합쳐 싸워 얻은 자유의 향유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 그는 함께 자유를 외치고 또 쟁취했으나 스스로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혹시 그 자유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에게까지 몫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 모두가 다 충분히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면서도 마치 그러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는 우리에게 다만 ‘자유의 레이스’만을 짜준 것은 아닌가? 요컨대 그의 존재는 하나의 거울이요, 물음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 살면서도 우리와 전혀 무관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치스러운 내부적 망명객이 적지 않다. 이들은 프란츠 파농이 동료 흑인들을 향해 쏘아붙인 말처럼, ‘백인보다 더 흰’ 한국인들이다. 이들은 정신적 배교자다. 그러나 이국 땅에 묶여 있으면서도 모국을 강렬히 지향하는 ‘민족 시민’으로 살아가는 외부의 망명객들, 이들은 육체적 배외자다. 이들의 정신은 육체와의 합일을 갈망하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은 한국의 부끄러운 상흔이다. 그리고 탈냉전 시대의 마지막 냉전적 볼모다. 그들은 망명지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반면에 흥건한 혜택까지 향유하였으면서도 자신이 익숙하게 몸 담고 있던 곳을 스스로 떠나버리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민족을 들먹거린다 해도, 민족적 배교자의 지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황장엽은 그 상징적 인물이다.
송교수는 자유의 레이스를 짜는 철학자다.
그러나 그는 단연코 ‘민족 시민’이다.

그는 항상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 현실과 끊임없이 부딪치는 자세로 학문 생활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반도의 절반이 사회주의 북한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현실과 한계 문제도 그의 이론적 관심사 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의 북한 방문 역시 이러한 학문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00년 10월 말로 기억되는데, 나는 제5차 남북 학자회의에 남한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중국 베이징을 다녀왔다. 그리고 거기서 해외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온 송교수를 반갑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남북 학자 다 합쳐서 대략 30명 되지 않았나 싶다. 남한쪽 실무진의 형편으로는 송교수가 절대적 존재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북한측이 절대적으로 신뢰를 보일 수 있던 사람도 그였고, 또 남측이 믿고 의지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인사도 그라는 인상을 받았다. 남한쪽 대표들은 대체로, 거의 유일한 남북 민간 교류의 성공 사례로 손꼽혀 5년째 만남을 거듭하고 있었던 이 남북한 학자회의가 송교수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했으리라는 데 견해를 같이하는 듯했다.

특히 북한측 대표들에게 송교수는 거의 외경의 대상인 듯했다. 이를테면 김일성 수령 동지와 한 시간을 독대한 분이라는 우상 같은 존재로 기림받는 눈치였다.
다른 한편 송교수는 <21세기와의 대화>라는 그의 저서에서 한반도적 현실이 던지는 모순은 바로 민족적 화해와 민족국가적 통일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의 소망은 지극히 간결하다. 요컨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할 수 있는 통일된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희망’이 전부다. 그리하여 그는 발상 전환을 위해 남북한 모두의 ‘진정한 구조 조정’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절반이 북한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현실과 한계 문제도
그의 이론적 관심사 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의 북한 방문 역시 이러한 학문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버트런트 러셀은 우리 모두가 경청할 만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교조는 지성의 무덤이다. 그러므로 좌파의 교조라 해서 우파의 그것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라고. 나는 송교수가 적어도 이러한 교조를 뛰어넘어 합리적 차원의 진보를 추구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지금 송교수 문제는 우리 사회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국민적 분열과 불신감이 엄청나게 확산되어 마치 ‘추궁하는 사회’ ‘심문하는 사회’로 전락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서로를 서로서로가 다 ‘혐의자’ ‘간첩’ ‘거동 수상자’ ‘수배자’ ‘잠재적 범법자’ 등으로 인식하는 눈치다. 불안하다. 이 모두가 다 냉전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는 우선 송교수를 민족과 조국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사회를 ‘추궁하는 사회’로부터 ‘포용하는 사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법률적 처분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을 통해 그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를 고대한다는 말이다. 그는 그의 가장 커다란 고통이 자신에게 제자가 없다는 사실이라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에게 제자를 얻을 수 있는 길을 터 줄 길은 없을까? 끝부분이 조금 상했다 하여 아름드리 재목을 다 버리지는 않지 않는가.

“제자가 없어 괴롭다” 털어놓아

다른 한편 대한민국은 스스로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 국제적 성격까지 띠는 송교수 문제를 관용의 정신으로 풀어감으로써,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자유민주주의적인가 하는 것을 세계 만방에 과시할 길을 열 수도 있다. 공자도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느니라” 하고 일렀다. 물론 이념의 차이에 따라 송교수를 증오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멸받을 그러한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인도 잠언 시집인 <수바시타>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나눌 줄 알아야 높아진다네. 물을 나누어주는 구름은 드높고, 물을 저 혼자 간직하는 바다가 낮은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 관용을 나누며 구름처럼 높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기회에 나는 송교수에게도 결단을 촉구하고 싶다.
‘경계인’이란 항상 외줄 타는 광대와 비슷한 위기 의식과 더불어 공존할 수밖에 없다. 물론 경계선 양쪽을 동시에 아우를 수도 있지만, 양쪽 모두로부터 동시에 배척 당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도 지닌 존재 역시 이 ‘경계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선천적으로 ‘익숙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속히 찾아내어, 그쪽으로 몸을 던지는 최후의 지혜가 필요한 삶의 시점에 송교수가 서 있다는 것을, 그의 삶과 학문 세계를 존중하는 오랜 지인으로서 감히 충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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