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소설가 박원서·최일남/"품위 있게 늙기를 바란다"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0.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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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최일남 두 원로 소설가가 늙음, 문학, 세상을 향해 던지는 '쓴소리'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두 이야기꾼이 만났다. 최근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을 펴낸 작가 박완서씨(70)와 소설집 <아주 느린 시간>을 내놓은 최일남씨(69). 두 원로가 모처럼 만난 것은 소설 제목의 유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작가는 평생 신인이어야 한다’는 작가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문단의 어른일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 문학과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노인 문제’를 소설 속으로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 11월16일 오후 3시,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두 작가는, 이 시대에 늙는다는 것의 의미와 글쓰기의 지난함, 그리고 유난히 추울 것이라는 ‘올 겨울’에 대해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일남:<시사저널>이 늙은 사람 처지에서 젊은이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달라고 하는데, 뭐, 젊은이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요(웃음). 우선 소설 이야기로 풀어가지요.

박완서:저도 재작년에 노인 이야기 (<너무도 쓸쓸한 당신>)를 썼잖아요. 저는 제 주변 이야기밖에 못쓰는 편이어서, 여자 입장에서 노인 이야기를 썼는데, 선생님께서는 남자 입장이시더라고요(웃음). 남자 여자 편가르자는 것은 아니고, 뭐랄까, 저는 어떻게 하면 품위 있게 늙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어요. 어떻게 하면 젊은 감수성을 잃지 않을까 하고 애를 썼는데, 선생님 글을 읽으니까, 순리대로 늙어가는 것이 품위 있게 늙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최:박선생님의 소설을 보고 자극을 받기도 했고요. 또 제가 접근하기 쉬운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연속해서 쓴 것도 아니었어요. 소설집의 특색을 위해 그동안 쓴 것들 가운데 노인 이야기를 묶은 거지요. 무의도의 의도랄까요. 요즘 실버 문학이란 말이 나오는데, 너무 저널리즘적인 용어가 아닌가 싶어요.

박:실버 문학, 그런 소리 안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백화점 같은 데 가서 실버용품이라고 한 것들을 보면 싸구려로 보여요.

최:(웃음) 실버보다 더 좋은 말이 있어요. 어떤 신문에서 시리즈물을 하는데 그린 세대라고 하는 거에요. 노인을 보고 그린이라. 이건 미화가 너무 심해서 어색해 보입니다. 늙었으면 옐로 세대지. 사실 늙은 세대로서 중요한 것은 품위인데, 품위를 지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요.

박:이번 선생님 소설에서 혼자 외식할 때는 양식이 좋다는 대목이 기억나요. 저는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면 막걸리든 소주든 가리지 않는데, 집에서 가끔 혼자서 술을 마실 때는 좀 가려요. 아무도 보지 않는데, 혼자 잘 갖춰놓고 마셔요. 잔도 예쁜 크리스털 잔에다 마시죠.

최:남이 안 보는데 그러는 거, 그게 진짜 멋이죠.

박:혼자 멋부리고 마실 때는, 누가 갑자기 방문해도 괜찮다 싶고요. 하지만 밖에서는 젊은 사람들한테 신세 안 지려 하고, 집단에서 밀려날까 봐 초조한 나머지 항상 젊은 척하지요. 젊게 구는 것에 치중했는데, 이제는 나무도 가을이 되면 잎을 떨어뜨리듯이 그냥 순리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선생님 소설에서도 그렇고 제 소설에서도 있었지만, 우리 나이에서 느끼는 공포감은, 제가 소설을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치매에요. 예전에 시어머니를 모셔 봐서 아는데, 그때는 망령·노망이라고들 했잖아요. 노망이라고 하면 편안하게 들리는데, 요즘은 치매, 또는 알츠하이머라고 하잖아요. 어쨌든 유난스럽긴 하지만 치매가 노후의 가장 큰 위협이에요.

최:저도 혼자 술을 먹어요. 글 쓰고 책 읽고, 가능하면 밖에 안 나가려 해요. 그래도 목은 축여야 하니까, 가끔 혼자 폭탄주도 한 잔 만들어 먹습니다. 잠드는 시간은 대중없어요. 선생님은 여자 동료들을 자주 만나실 테니까 어떤지 몰라도 저는 남자 친구가 많은데, 여러 가지 유형이에요. 나이 먹는 거 유세 부리는 사람도 있고. 요컨대 요새 노인네들 가장 큰 소망은 고통스럽지 않게 그저 잠자는 듯이 세상 떠나는 거에요. 요즘 남자 평균 수명인 일흔네 살은 다들 넘기고 싶어하죠.

박:노후가 너무 길죠. 지루한 느낌이 나지요.
최:본인에게나 보는 사람들에게나 후반전이 너무 길죠(웃음). 저는 혼자 과학책을 많이 보는데, 복제 소, 복제 인간을 만드는 과학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 수명을 1백50세까지도 늘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신문을 꼼꼼히 보는 편인데, 건강 지면이 너무 많아요. 제가 알기에 다른 나라 신문들은 우리처럼 건강 페이지가 많지 않아요. 건강이 물론 제일이지요. 그런데 너무 건강 제일주의로 가니까 별로 재미없어요.

박:아니 ‘머니’라는 노골적인 페이지도 있잖아요(웃음). 어디선가 들었는데, 앞으로 몇 년 안에 죽음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거에요. 더 살면 어떡해요. 섬뜩해요.

최:노인에 대한 사회적인 프로그램은 복지 사회의 필수 조건이지요. 일본이 장수 천국이지만 막상 그게 다 돈이에요. 국가 지원도 있지만, 개인들이 미리미리 준비하죠. 제2의 IMF다 뭐다 하는데, 우리는 당분간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죠.

박;우리 나이 또래만 해도 최소한의 품위만 유지된다면 양로원에 가는 거 마다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기업들이 무너지는데, 양로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보장되는 것도 아닐 테고. 일생 동안 모은 돈을 들고 양로원에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최:시설도 좋지만 그 많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중요해요. 우리는 하드 웨어에만 치중하지 소프트 웨어에는 아직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요. 시설을 만들어 놓고 수용하는 식이지요.

박:늙는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즐거움도 있고 생각도 변하고요.

최: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나이 먹는다는 거 괜찮은 관습 같아요. 제가 유일하게 새로운 경지에 갈 수 있는 것은 남과 더불어 나이 먹는 거에요. 제가 나이 칠십까지 간다면, 그 칠십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요. 간혹 젊은 사람들한테 할 이야기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나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젊은 사람들 일까지 챙기느냐 그래요(웃음). 농반진반이지만, 인터뷰하면, 기자들이 젊은 작가들한테 얘기 좀 해달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가 얘기한다고 해서 들을 것 같아요?(웃음) 저는 아직도 원고지에 쓰는데, 날이 갈수록 글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단어 하나를 써놓고도 생각이 아주 많아지는 거에요. 옛날에는 쉽게, 용감하게 나갔죠. 완벽주의자가 돼가는 거에요.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면 이런 정도가 아닌가 싶네요.

박:뭐든지 한 10년 정도 하면 쉬워지는데 이 글쓰기에는 그런 게 없어요. 가끔 잡문 청탁이 오는데, 못 쓰겠다고 하면, ‘10장짜린데 선생님 같은 분은 잠깐 앉으면 쓰시잖아요’ 그래요. 젊은 기자들이 ‘박완서씨’라면서 그러는 거에요. 말문이 막히지요. 보조 노릇 하다 보면 숙련공이 되는데 글쓰기는 그게 안돼요. 제 소설을 두고 물을 쏟아붓듯이 솰솰솰 읽힌다고 하는데, 그걸 솰솰 쉽게 쓰는 걸로 오해하는 것 같아요. 그런 소리 들으면 야속하죠. 제 경우는 어렵게 쓰기보다 쉽게 쓰기가 훨씬 어려워요. 소설이 너무 어려우면 그건 소설가의 도리가 아닌 거 같아요.

최:그러니까 소설가는 항상 신인이죠. 칠십 먹으나 팔십 먹으나.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이라는 게 남에게 전달되지 않는 그런 운명을 지닌 거 같아요. 선생님 이번 소설 후기에 고통을 견딜 만한 기운이 남아 있다고 쓰셨는데, 실감이 납니다. 글을 쓰다가 잘 안되면 폭폭하잖아요. 눈물도 아닌 게, 가슴 속으로 뭔가 흘러내려요. 그런데 이런 얘기도 10년 후에는 씨도 안 먹힐 것 같아요. 인터넷이다 전자 책이다 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요즘 문단을 보면 뭐랄까, 신인 인플레처럼 보여요. 문학이, 요샛말로 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요. 문학상 심사를 해보면 문장은 잘 쓰는데, 이 멋진 세상 사는 젊은이들도 상상력에선 별 수 없더라고요. 갑자기 교통 사고로 주인공이 죽는 식이에요(웃음).

박:전에는 신인 작품 중에서 운동권·분단 문제가 빠지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아예 사라졌어요. 고민할 게 없는 세대로 보여요. 예전 소설에서는 가족이 억압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 같은 인물들이 많아요.
최:대체적으로 응석이 심해요. 혼자 살아가는 한 마리 늑대로 자라나질 못해요. 어떻게 해서든 빨리 가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조직에서 수직적으로 억눌리며 돈을 버느니 자유를 먼저 택하려 들어요. 벤처 열풍에도 이같은 심리가 있지 않겠어요.

박: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들도 그래요. 저는 책읽기를 좋아해서 작가가 되었지요. 그런데 당연히 읽었겠거니 하는 작가들 작품도 안 읽은 작가가 많아요. 남이 읽어주길 바라며 데뷔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남의 작품을 읽지 않는 건 도둑놈 배짱 아닌가요.

최:우리나라에 문인이 만 명 가까이 된다잖아요. 문학상도 많지요. 문학이 이만큼 흥성한 것은 일단 기쁜 일이지요. 이 문학을 어떻게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느냐 하는 문제는 답하기가 막연하지만, 이런 건 있어요. 문학상 심사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있는데, 저는 우리 사회에서 문학상 심사처럼 공정하고 소신 있게 진행되는 제도는 없다고 봐요. 저는 자부할 수 있습니다. 오직 글 하나만 놓고 뽑는 것 아닙니까.

박:예, 맞습니다. <시사저널>이 자꾸 젊은 사람들 얘기를 하라니까(웃음), 전쟁 중에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외국인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는데 표정이 전부 다 아이들 같은 거에요. 우리나라 사람들 표정은 음흉해 보이기도 하고 복잡다단한데 외국인들은 밝은 게 꽃 같았어요. 그런데 어느 틈에 요새 젊은이들이 그때 서양 사람들 표정하고 같아졌어요. 키는 또 얼마나 커요. 우리보다 아는 것도 많고 능력도 있잖아요(웃음).

최:요즘 20대들 밝아서 좋아요. 우리 어렸을 때는 고생 많이 하고 찌들어서 표현이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도 했지요. 그걸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요. 그러지 않고는 살 수 없었으니까요. 요즘 또 제2의 IMF가 오는 게 아니냐 말들이 많은데,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나는 6·25 때도 살았는데 그보다 더하랴 하며 넘겨요.

박:넘치는 게 얼마나 많아요. 그냥 버리는 것들 보면 죄의식을 느끼곤 했죠. IMF 사태가 낭비벽 없애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는데. 그런데 우리 세대는 하도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불황이 온다 해도 겁은 안나요. 그리고 그 어려울 때도 다들 재미있게 살았어요. 전쟁 때 외국인에 비하면 찌들어 보였지만 유머도 있고 신명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힘이 있어요.

최:해낼 겁니다. 4전5기했던 권투 선수도 있었잖아요. 우리는 7전8기, 아니 8전9기도 해낼 거에요. 3년 전 IMF 때보다 조건이 훨씬 좋아요.

오후 3시에 시작된 대담은 5시30분쯤에도 끝날 줄을 몰랐다. 최일남씨는 “지난 6월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사진을 최근에 다시 보았는데, 그 때가 벌써 옛날처럼 보여서 깜짝 놀랐다”라며,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화끈 달아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기질’이 조금 누그러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완서씨는 “통일 분위기에 딴죽을 거는 세력도 있지만, 그런 견해를 모두 무시할 까닭은 없다. 무조건 반통일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걸 보면 옛날에 빨갱이라며 매장하던 때가 생각난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노인들이 품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두들 점잖은 국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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