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마니아들이 본 시드니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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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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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서 '애호가'되어야
"한국 축구를 지탱해 왔던 투지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한국 축구는 머리가 없다. 아시아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세계 무대에서는 통하기 힘들 것이다.” 지난해 초 한국 올림픽 대표가 일본과 가진 평가전에서 2연패하고 난 후에 NHK 해설자가 한 말이다. 칠레와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 또 한번의 좌절을 ‘선수들이 투혼을 불살랐다’는 말로 덮어보려는 우리 해설자의 평가보다 귀담아 들을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역대 최강 멤버, 강력한 미드필더, 믿음직한 와일드카드, 28차례의 풍부한 평가전. 8강은 물론이고 4강까지도 가능하다던 한국 축구는 다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마가 단단히 낀 것일까. 서울올림픽 이래로 한국 축구의 8강 도전사는 아쉬움만 남겼다. 그리고 이번에도 2승1패를 기록했지만 골 득실차에 밀려 다시 탈락했다.

한국 축구는 왜 이토록 고비를 넘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기는 것일까. 실력은 충분히 8강감인데, 이번에도 운이 따르지 않은 것일까. 물론 이번 대회에 악재가 겹쳤던 것은 사실이다.믿었던 맏형 홍명보가 다쳐 중앙 수비 라인에 구멍이 뚫렸고,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뛰던 설기현도 부상으로 팀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박진섭 역시 부상에 시달리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대진운이 8강에 올라간 일본보다 결코 좋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늘 후일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베스트 멤버로 붙었으면 스페인도 꺾을 수 있다는 객기가 위안이 될 법도 하다.

그러나 8강 탈락의 불운 뒤에 숨겨진 필연을 차분히 따져보면 그것이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먼저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도 늘 그랬지만 지겹도록 들었던 ‘종이 한 장 차이’ 실력은 선수들에게 투지를 강요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말 그대로 실력 차이를 의미한다.

요컨대 중국이 그 엄청난 ‘인해전술’을 앞세워 한국을 한 번 정도는 이길 법한데, 아직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은 그 한 단계 실력을 높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도 프랑스 월드컵에 첫발을 딛기까지, 그리고 나이지리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준우승하고 이번 올림픽에서 32년 만에 8강에 올라가기까지, 20년을 투자했다.

실력 차이가 현저하게 구분되는 세계 A매치 대회에서 정신력과 투지는 격려와 위로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승리의 교두보일 수는 없다. 마지막 칠레와의 경기도 한국 축구의 저력을 보여준 게임이 아니라 ‘최종심급’에서는 늘 투지와 정신력에 호소하는 한국 축구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게임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직적 플레이 미숙, 수비 라인의 응용력 부재, 공간 침투·적절한 패스·세트플레이 부족 등이 승패를 떠나 이번 올림픽 조 예선 전체 경기 중에서 한국 경기가 가장 재미없는 게임이 되어버린 이유이다. 이는 장기적인 투자와 체계적인 지원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한국 축구의 맹점을 그대로 지적해 준다. 형식적인 평가전을 아무리 많이 해야 부상 선수만 나올 뿐 이득이 없다.

또한 불필요한 정기전·평가전을 정치적 교환 가치로 환원해 버리는 축구 행정 권력가들의 불순함이 사라져야 한다. 문제는 세계적인 선수들과 우리 선수들이 실전을 많이 치를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하고, 선수 관리와 경기 전술을 연구하는 ‘사심 없음’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8강에 들지 못하자 허정무 감독은 퇴진 의사를 밝혔다. 감독 교체로 비난을 면하려 한다면 축구협회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할 자격이 없다. 한 번 더 인내하고 문제점들을 분석하는 자세가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래서 제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마지막 경기 결과를 지루하고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서도 속시원하게 숙원을 풀었으면 한다. 한국 축구 파이팅!
강초현의 해맑은 미소를 고이 지켜주자
강석진 (서울대 교수·수학)


마지막 한 발 남았다. 강초현 487.8점, 낸시 존슨(미국) 487.8점. 이제 단 한 발이 금과 은을 가른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성호를 그어 본다(하나님이 이런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란 것은 나도 안다).

낸시 존슨이 먼저 격발을 끝냈다. 9.9점. 미국 응원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 정도면 되었다. 긴장한 것일까? 강초현은 처음 조준에서 격발을 하지 못한다. 불안하다. 자세를 고쳐 잡고 격발. 몇 점일까? 잠시후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인다. 낸시 존슨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9.7점.

강초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허공을 쳐다보다 고개를 젓는다. 안타깝다. 낸시 존슨 금메달, 강초현 은메달. 0.2점 차이다. 강초현이 끝내 뜨거운 눈물을 떨군다. 커피빛 진한 아쉬움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속의 어떤 장면도 이렇게 가슴 아프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정말 멋진 승부였다. 강초현은 본선 성적 397점을 기록해 1위로 결선에 올랐다. 2위 그룹은 나란히 395점을 기록한 최대영(한국), 소냐 파일쉬프터(독일), 리우보프 갈키나(러시아), 낸시 존슨 (미국). 최대영은 국내 선발전에서 1위를 기록한 금메달 기대주이고, 파일쉬프터와 갈키나는 세계적인 강자이다. 0.1점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결선 라운드에서 2점이라면 상당히 커다란 차이다.

물론 결과론이지만 이럴수록 적극적으로 승부에 임해야 했는데 강초현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파일쉬프터와 갈키나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그 둘은 뒤로 처지고 어느 새 존슨이 턱밑까지 쫓아왔다. 8차 사격이 끝난 뒤 강초현이 0.2점 리드. 9차 사격 강초현 10.5점. 이젠 되었다. 그런데 존슨은 10.7점. 드디어 동점 허용. 그리고 마지막 한 발…. 강초현이 아쉽게 물러나기는 했지만 정말 멋진 승부였다.

시상식에 나타난 강초현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흔든다.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저절로 맑아진다(만일 여기서 엉엉 울었다면 완벽한 ‘신파’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잖아요. 저라도 활기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어요.” “은메달 따는 꿈을 꿨는데 꿈대로 됐네요. 은메달에도 충분히 만족해요. 하지만 다음에는 금메달 따는 꿈을 꿀래요.”

해맑은 눈물, 해맑은 미소 그리고 당당한 인터뷰에 우리는 모두 강초현에게 반하고 말았다. 진한 아쉬움도, 뜨거운 눈물도 멋진 승부의 일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러나 강초현에게는 지금부터가 불행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할 스타들이 너무나 함부로 다루어지며 혹사당하는 것을 지겹도록 많이 보아 왔다. 허 재가 그랬고, 황영조가 그랬으며, 박세리가 그랬다.

강초현에게도 벌써부터 약삭빠른 상혼이 그럴듯한 명목으로 오염 물질을 살포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강초현은 이제 우리 모두의 스타가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돈을 많이 벌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강초현의 그 해맑은 눈물, 해맑은 미소만큼은 제발 그대로 보존하자. 강초현을 팔아먹을 궁리만 하지 말고, 강초현이 강초현일 수 있게 그냥 좀 내버려 두자. 강초현이 지금의 순수함과 당당함을 지켜갈 때 우리는 그녀로부터 더욱 더 깊고 풍부한 인생의 감동을 선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선 성적 2위로 결선에 올랐지만 천운이 따르지 못해 7위에 그친 최대영의 분전과 지난해 국가대표로 뽑혀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다가 혜성처럼 나타난 강초현에게 밀려 시드니에 올 수 없었던 이선민의 아픔도 함께 기억하자. 이들의 아쉬움과 아픔 또한 강초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아름다운 감동의 일부이니까.
“우리 선수들은 축구를 즐기는데, 한국 선수들은 싸우는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정기전이 끝나고 일본팀 감독이 한 말이다. 올림픽 메달 수로 보면 한국은 스포츠 강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관중석에서 보자면 스포츠 선진국이 아니다. 관중석과 경기장 사이에 ‘장애물’이 너무나 많다. 새 천년 첫 올림픽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축구나 야구 종목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부터,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다가 ‘때만 되면’ 호들갑을 떠는 비인기 종목에 대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다. 경기를 ‘국가간 전쟁’으로, 금메달 수를 ‘국민 소득’과 동일시하려는 중계 방송이나 뉴스의 고질적 병폐도 변하지 않았다.

<시사저널>은 스포츠 마니아들의 눈을 빌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시드니올림픽의 그늘을 주목하고자 한다. 21세기 한국 소설의 전위 가운데 한 사람이자 아마추어 마라토너인 소설가 김연수씨, 스포츠 칼럼을 자주 기고하는 문화 평론가 이동연씨, 아마추어 축구 선수인 서울대 강석진 교수가 각각 신세대들에게 올림픽은 무엇이며, 일찌감치 고배를 마신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한 진정한 대안은 어떤 것인지, 스포츠 스타 탄생을 어떻게 볼 것인지 신선한 관점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그것은 무조건 열광하는 ‘국민’이 아니라 스포츠를 아끼는 ‘애호가’로 돌아가자는 제언이다.

스포츠 앞에서 나는 ''국민''이 아니다
김연수(소설가)

작가 이 상의 수필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희들이 국경을 넘던 밤에 나는 주석(酒席)에서 올림픽 보도를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대로 썩어서는 안 된다. 당당히 이들과 열(列)하여 똑똑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정신 차려라!’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족 몰래 만주행 기차를 탄 여동생에게 보낸 공개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감도〉라는 기상천외한 시를 발표했던 이 상이 올림픽 보도를 들으며 세계 청년들은 저렇게 똑똑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도 정신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좀 난감하다. 하지만 그것이 올림픽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내가 경험한 바 올림픽의 가장 큰 충격을 이 상도 느꼈던 셈이다.

이 상에게 충격을 준 그 올림픽은 1936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으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바로 그 대회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뒤, 나는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있었다. 그 때까지 내가 경험한 모든 종류의 입장이란 바로 사열을 뜻했다. 본부석이 가까워지면 선두에서 ‘우로 봐!’라고 외친다. 그 때 우리 모두는 일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그렇게까지 딱딱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질서정연한 입장이 계속되고 있는데 미국 선수단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모멸감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미국 선수들은 줄도 맞추지 않고 제멋대로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미국 선수단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눈에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진에 앞줄 옆줄은 물론 좌우 대각선까지 맞춰서 행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우리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줄을 맞추지 않고도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일률적인 사회 속에 갇혀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1936년의 이 상에게든, 1988년의 나에게든 올림픽은 우리를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 밀어넣고 객관적인 처지에서 바라보게 했던 것이다.

올림픽은 확실히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1980년대 초반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가 ‘세울, 코리아’라고 발표하는 장면이 매일 밤 텔레비전에 되풀이 방영될 즈음 많은 사람이,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서울올림픽이 끝나면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날 때쯤 살펴보니 전국의 술집이나 여관 이름에 바덴바덴이나 올림픽이 들어가는 곳이 많아졌을 뿐,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올림픽은 군사 문화가 지배적이던 한국 사회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오랜 세월의 민주화운동도 이루어내지 못한 일을 보름 만에 해냈다. 선수들도 메달을 딴 뒤 더 이상 대통령 각하를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 촌스러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제 그로부터 12년이 지나 새로운 올림픽이 또다시 열렸다. 1988년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전병관과 김수녕을 얘기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모이면 주가 하락을 얘기하고 대우 사태를 얘기한다. 어떤 신문에서는 ‘야당 총재가 거리에 나서도 사람들은 별 무관심이고’ 어쩌고 하며 예전처럼 정치에 열을 올리지 않는 사람들을 질책했지만, 그것은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간혹 얘기가 나오더라도 이제 사람들은 1위보다 더 환하게 웃었던 강초현 선수를 얘기한다. 언론은 유도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못 땄다며 상비군을 말하지만, 그건 야당 총재 어쩌고 하던 사설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를 촌스러움 속으로 되밀어 넣으려는 심보다. 이 정도의 무관심은 사실 적당한 정도의 관심이다.

초현실주의자인 이 상마저도 그 보도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으니 올림픽이 지난 세기 한국인들에게 준 문화적 충격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는 누구도 술자리에서 메달리스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 올림픽 중계 방송을 보던 그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면 조금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지난 세기 올림픽은 우리에게 운동이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 몰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단히 가르쳐준 셈이다.

한국 축구, 감독 교체만이 능사인가
이동연 (문화 평론가·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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