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다녀온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 “북측, 우리쪽 통일 방안 궁금해 한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0.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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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쪽에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저 분들의 자존심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돕겠다고 하는 게 모양이 훨씬 좋습니다."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50)은 남북 관계를 다루는 언론에서 한동안 ‘기업인 ㅂ 씨’로 등장하곤 하던 사람이다. 올해 초부터 남북 간에 어떤 교신이 있다고 소문이 돌 때마다 재계 소식통들은 그의 역할을 주목했다. 그는 정상회담 합의 사실이 발표된 다음 날 베이징을 거쳐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또다시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물론 이번 방문 목적은 사업이었지만, 정상회담 발표 직후 평양의 표정을 육성으로 전할 인물이 된 셈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 프레스센터 11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지난 4월18일 그가 서울에 들어온 이래 내방객이 끊이지 않았다. 금강산국제그룹과 더불어 통일교가 추진하는 대북 사업의 양대 축이라 할 평화자동차의 총책임자로서 그는 최근까지 34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김용순 비서 등 북한 고위층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확대 해석은 말기를 거듭 당부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정상회담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가 많았습니다. 언제부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보십니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대그룹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주영 명예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두 번이나 면담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김위원장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성 얘기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사람 만나기를 꺼린다는 둥 말을 더듬는다는 둥 온갖 소문이 난무했는데, 이런 소문들을 일거에 잠재운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저 자신도 서른 번이 넘게 북한을 다녀왔지만 그동안은 은근히 걱정해온 게 사실인데, 김위원장이 정명예회장을 만나는 것을 보고 정상회담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재계에서는 박보희 회장이나 박사장이 2월3일 신남포에서 있었던 평화자동차 착공식에 참석한 직후 김용순 비서와 만났고 또 그 결과를 우리 쪽에도 전한 것 같다는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정부의 부탁을 받고 얘기를 전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북쪽을 다니면서 들은 얘기나 느낀 점을 전한 적은 있습니다. 특히 2월 초에 다녀와서 정상회담에 대해 적극 얘기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제가 북쪽에서 만난 분들과 얘기하다 보니까 김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을 넘어가면 북쪽에서도 더 이상 정상회담에 흥미를 안 갖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클린턴 대통령이 레임 덕에 빠지고 난 뒤부터 북쪽에서 적극성이 많이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대통령 임기가 절반을 넘어서는 올해 6월 이전, 아니면 올해 안이라도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상실할지 모른다고 절박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정부쪽 반응은 어땠습니까?

당시 정부 내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또는 면회소 설치나 인프라 지원 등을 단계적으로 해야 되지 않는가라는 의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상회담만 성사되면 그런 문제는 한꺼번에 풀릴 수 있다고 강조했지요. 김일성 주석이라면 몰라도 김정일 위원장이 과연 응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때 제가 말씀드린 게 바로 현대의 사례입니다. 정주영 명예회장도 만났는데 대통령께서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말했지요.

김용순 비서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비서와도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김비서를 만날 때마다 두 분이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김비서나 또는 다른 분들의 반응 역시 항상 같았습니다. 남쪽이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면 행동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2월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은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라는 얘기가 주조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2월에 가서 만났을 때 반응이 달랐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옛날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올해부터 정부가 햇볕정책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그동안 정부쪽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제발 용어를 바꿔달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여하튼 우리 쪽의 이런 변화가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박재규 통일부장관께서 장관 되기 전에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분을 접대했던 사람들이 이번에 정상회담 성사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박장관 부인도 지난해 북한을 방문했는데, 북쪽에 아주 좋은 인상을 남기신 것 같습니다. 이런 신뢰감들이 쌓여서 이번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정상회담 발표 직후 북한을 다녀오셨는데, 그쪽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4월11일 평양에 들어갔는데 그 날짜 <로동신문> 1면에 정상회담 합의문이 실렸습니다. 즉, 북한 주민들도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평양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때마침 김일성 주석 생일을 앞두고 평양은 잔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는데, 정상회담 합의 사실까지 알려져서인지 시민들이 더욱 즐거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송호경 부위원장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제가 정말 축하드린다고 하니까 송부위원장께서 어서 통일이 되야지요라고 했습니다. 송부위원장은 또 ‘(정상 간에) 좋은 만남이 이루어져 우리가 자주 오고가고 하는 좋은 일이 있어야 될 텐데’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지금 말씀대로 정상회담이 잘되도록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우리 국민이나 야당이나 대통령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신껏 하실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합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쪽에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저분들의 자존심이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비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인데 그런 얘기도 안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쪽에서 어떤 요구가 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돕겠다고 하는 게 훨씬 모양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회담 의제와 관련해 이산가족이나 경협 문제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런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런 문제는 실무회담에서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상 간의 만남에서는 오히려 통일 방안같이 크고 원칙적인 문제가 짚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통일 방안은 오히려 이견이 첨예할 수밖에 없는 민감한 문제가 아닐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북쪽을 다니면서 남쪽에는 통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확정된 게 없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대답이 궁색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만약에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연방제로 통일합시다라고 하면 대통령께서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정상회담 전에 정부와 야당과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방안을 꼭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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