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 회생, ‘씀씀이’에 달렸다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9.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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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소비 진작→플러스 성장” 큰소리에 민간 연구소는 “후퇴” 한소리…엔 시세도 중요 변수
지난 11월 24조엔 규모의 긴급 경기 부양책을 발표한 일본 정부는 최근 세출액을 대폭 늘려 99년도 예산안을 확정했다. 이 예산안은 공공 사업비를 지난해에 비해 10% 정도나 늘린 것이 특징이다. 오부치 정권이 ‘플러스 성장’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같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또 최근 99년도 경제성장률을 플러스 0.5%로 확정했다. 이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이지만 공공 사업과 주택 건설이 증가하고 개인 소비가 서서히 회복하리라는 예측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일본 경제는 97년 이후 줄곧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 왔다. 일본 정부는 98년의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 1.8%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마이너스 2.2%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일본 정부의 예상대로 99년에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면 일본 경제는 불황의 긴 터널에서 탈출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이같은 대담한 플러스 성장 예측은 정치권 압력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오부치 총리는 99년 상반기에 기필코 경기가 회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경제 부처 관료들을 독려해 왔다.

그래서 주무 부처인 경제기획청의 사카이야 다이이치(堺屋太一) 장관이 총대를 메고 경기 회복론을 전파해 왔다. 그는 지난 11월 말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경기에 새로운 태동이 감지된다”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도 기업 경영자 과반수가 99년 초에 경제가 회복할 것을 믿고 있다며 사카이야 장관의 경기 태동론에 맞장구를 쳤다.

‘경기 태동론’ 대 ‘경기 동결론’ 맞서

이러한 낙관론이 우세해지자 일본 정부 내에서는 99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플러스 1 %로 잡자는 의견까지 대두했다. 그러나 모든 민간 연구소가 내년에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마당에 유독 정부만 플러스 성장을 낙관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반대론에 부딪혀 결국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플러스 0.5%로 조정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일본 정부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두뇌 집단들은 모두 99년도 일본 경제 전망을 흐리고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 비유하고 있다. 다이와(大和) 종합 연구소는 경제성장률을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마이너스 2.2%로 예측하고 있고, 노무라 종합 연구소는 마이너스 1.3%, 스미토모 생명 종합 연구소는 마이너스 0.8%, 후지 종합 연구소는 마이너스 0.4%를 예측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정부와 민간 연구소 간에 예측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것은 경기 회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개인 소비 동향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내년에는 개인 소비가 서서히 살아나리라고 예측한다. 그동안 여러 가지 감세 조처를 단행한 효과가 개인 소비 증가로 나타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민간 연구소들은 99년도 완전 실업률이 4.3%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개인 소비가 회복되기는커녕 올해보다 더 꽁꽁 얼어붙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내다본다. 또 소비세가 인하되지 않는 한 개인 소비가 대폭 증가할 요인이 별로 없다고 예상한다.

경기 회복의 햇살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일본 정부의 ‘경기 태동론’에 민간 연구소들은 정반대로 ‘경기 동결론’을 외치고 있는 형국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일본 정부의 경기 태동론에 매우 회의적이다.

국제통화기금은 최근 발표한 세계 경제 전망 임시 개정판에서 99년도 일본의 실질 국내 총생산(GDP) 증가율을 일본 정부 예측과는 정반대로 마이너스 0.5%로 예측했다. 국제통화기금이 지난 9월 일본의 99년 경제성장률을 플러스 0.5%로 예상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같은 수정 예측은 일본 경제의 전망이 오히려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IMF도 불황 장기화 예상

국제통화기금은 이 임시 개정판에서 ‘97년 후반 이후 일본 경제는 계속 경기 후퇴 국면을 맞고 있으며, 90년대를 통틀어서도 가장 취약한 상태이다’라고 진단하고, 일본의 불황이 장기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은 또 ‘현재의 경기 대책이 적절한 것인지 실행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다’라고 일본 정부의 정책 능력에 회의를 표시하면서, 금융·재정 정책과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이 이같이 99년의 일본 경제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민간 소비가 장기간 저조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엔고가 진행되어 이것이 경기 회복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부치 정권이 등장한 이후 달러당 엔 시세는 줄곧 140엔 대를 기록하다가 지난 10월 초 급격히 반전하여 지금은 110엔 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같은 엔고 현상이 정착하면 95년 4월부터 시작된 ‘엔저 현상’에 일단 마침표가 찍히는 셈이다.

현재 일본 기업들은 급격한 엔고 현상 때문에 이중으로 타격을 입고 있다. 내수가 극도로 부진한 데다 수출도 감소했다. 국제적인 우량 기업 소니가 올 하반기에 대폭 적자를 기록하게 된 것도 엔고가 주된 원인이다.

엔고 현상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일본의 경기 회복 속도는 더욱 더디어질 것이다. 후지 종합연구소의 추산에 따르면 엔 시세가 달러당 20엔 상승하면 수출 기업들의 경상 이익이 3.2% 포인트 정도 줄어든다. 이에 따라 국내 총생산도 0.2% 포인트 정도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보면 엔 시세의 향방도 99년도 일본 경제의 부침을 좌우할 중요한 변수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문가들은 99년의 엔 시세를 어떻게 예측할까.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99년의 엔 시세 예측은 크게 엇갈린다.

일찍이 엔고 흐름을 비교적 정확히 예측해 유명해진 미즈타니 겐지(水谷硏治) 도카이 종합 연구소 회장은 엔 시세가 99년 봄에는 130엔을 기록하다가 연말에는 90엔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막대한 무역 적자로 말미암아 달러에 대한 신인도가 급격히 하락하리라는 것이 그 근거이다. 때문에 일본 경제의 회복 여부에 관계없이 99년 말에는 엔 시세가 상대적으로 급등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달러 하락이 세계적인 불황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반면 일본 종합 연구소의 다카하시 스스무(高橋進) 조사부장은 미국의 ‘강한 달러’ 정책이 당분간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연말에는 또다시 엔저로 전환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내년의 엔 시세 변동 폭을 최고 110엔에서 최저 130엔 사이로 예상한다.

엔 시세의 향방과 함께 세계 경제 동향도 큰 변수이다. 미국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 회장은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에서 “세계 경제가 지난 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근접했다”라고 경고했다. 소로스는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추세를 그 이유로 꼽았다.

국제통화기금도 최근 세계 전체의 99년도 국내 총생산 증가율을 2.5%에서 2.2%로 하향 조정했다. 국제통화기금은 또 “신흥 시장에 대한 투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 세계 금융 시장 상황은 아직 불안정한 상태이다”라고 지적했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동아시아 경제가 서서히 회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무역진흥회 아시아경제연구소의 예측에 따르면 이 지역이 예전에 보였던 세계 성장 센터와 같은 위상을 상실하기는 했으나, 99년도 성장률은 평균 3.1% 대에 이를 전망이다. 아시아경제연구소는 한국도 0.3%의 실질 경제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 경제가 내년 들어 3년 만에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 정부는 경기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플러스 성장을 위해서 앞으로도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일본 경기가 되살아난다면 세계 경제가 동시에 대공황에 돌입하는 불행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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