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데이’ 맞은 유럽, 기대 반 불안 반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9.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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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통화 ‘유로’ 탄생으로 경제 지형도 큰 변화…세계 경제 위기 맞물려 성공 여부 불투명
유럽 단일 통화 유로(Euro)의 탄생일인 99년 1월1일을 영국 언론들은 ‘E-데이’라고 이름 붙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유럽 대륙 상륙 개시일인 1944년 6월6일이 D-데이로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Euro’의 머리 글자를 따서 이름 붙인 새해 첫날이 바로 E-데이다. 이 날부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의 상점에는 유로화 통용 표지판이 나붙는다.

물론 유로화라는 실제 화폐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99년 1월1일부터 정부·금융기관 간의 결제 수단으로만 쓰인다. 결제 수단으로서의 유로화는 오는 2001년 말까지 각국의 기존 통화와 병행해서 통용되다가, 2002년 1∼6월 실제 유로화가 동전이나 지폐 형태로 출현한다. 이어서 7월1일부터 각국 통화가 완전히 사라지고 명실 공히 유로화가 유럽연합의 유일한 법정 통화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영국 언론들은, 영국이 이 경제 화폐 통합에 참가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있지만, 유럽연합 회원국 15개국 가운데 11개국이 참가한 유럽통화동맹(EMU)의 출범은 하나의 유럽을 향한 정치적 통합에 앞서 경제적 통합을 완성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이 ‘빅 어드벤처’가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맞먹을 정도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류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영국은 국민의 반대 여론과 국내 정치 일정 때문에 아직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E-데이를 앞두고 다른 가입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분주한 모습이다. 런던의 금융가인 ‘시티’에서는 유로 도입에 따른 유로화 환산 작업과 각종 전산 장치 전환 같은 움직임이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다. 런던 금융가는 유로화와 유로 참가국 11개 나라 통화간 교환 비율이 발표된 12월31일(목) 자정을 기점으로 세계 금융 및 증권 시장이 모두 첫 개장하는 99년 1월4일(월)까지 나흘 동안을 특이한 주말 ‘Le Weekend’로 정했다. 이미 1∼2년 전부터 이 날을 대비해 유로 도입 대처 훈련을 실시한 바 있으나, ‘시티’내에서 일하는 금융업계 종사자 3만여 명은 휴가도 없이 비상 작전을 펼친다. 이들에게 1월 1일 E-데이는 D-데이 당시 선두 상륙 부대처럼 긴장과 전율에 빠져드는 하루이다.

국가별 물가 비교 가능해져 소비자에게는 이득

새해 첫날이면 으레 끊기던 런던 관문 워털루 역과 시티 역 간의 전철도 특별 운행되고, 시티 근처의 호텔 등 숙박 시설들은 완벽한 준비를 갖추었으며, 모든 주차장이 무료로 제공된다. 미국계 투자은행 JP 모건의 유럽통화동맹 프로젝트 담당 국장 수잔 키르츠호프 씨는 이 나흘 동안이 대부분의 시티 종사자들에게 피를 말리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1년 전부터 예비 훈련을 실시했지만 12월31일 자정부터 불어닥칠 유로화 출범 태풍을 맞아 군사 작전처럼 시시 각각으로 짜인 시간표에 따라 차질 없이 모든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뱅커스 트러스츠가 작성한 종합 기본 계획에는 시간대별 작전 지시가 담긴 3천7백99가지 세부 작전 계획이 담겨 있다. 이 회사 런던 본부에는 유로화 전환을 전담하는 인원만 9백여 명이 있다. 이들은 전세계 각 지점의 유로화 환산 팀 3천여 명과 시시각각으로 연결을 취한다.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가 회계 장부의 기준 통화를 유로로 전환하는 데만 약 1천4백억 달러가 소요되며, 유로 출범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등 각종 프로젝트 시행 비용으로 앞으로 1천5백억 달러가 더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유로화 지폐와 동전이 일상 생활의 상거래에서 유통되기 전까지는 금융 시장에서만 유로화가 통용됨에 따라 환산 작업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로화의 실질적 통용이 시작되는 2002년까지 3년 반 동안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유로화를 1극 체제의 배타적 지위를 누려온 미국 달러에 맞서는 기축 통화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단계에서 유럽 각국의 소비자들에게 유로화는 당장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각국의 통화로 매겨진 가격이 유로라는 단일 통화로 환산되기 때문에, 그동안 환율 차이로 생겼던 국가간 가격 차별이 없어진다. 또 9.9 파운드·19.95 프랑·29 마르크처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소매 가격을 매겨 왔던 판매 전략은 유로화 가격 표시제에서 무의미해진다. 즉 가격의 투명성이 확보되어 유럽 소비자들은 같은 물건의 가격을 국가 별로 비교할 수 있게 되어 상품을 더 싼 값에 살 기회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변호사 비용, 주택 구입비 및 임차비, 보험료도 각국 사이에 비교가 가능해져 결국 소비자들을 위한 가격의 집중 및 단일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예로 소비재 가격이 비교적 싼 스페인·포르투갈에서는 값이 오르고 오스트리아·독일에서는 값이 내려 결국 적정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런던의 국제 회계법인회사 KPMG의 레오 마틴 연구원은 “영국은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과 생계비가 유럽 다른 나라보다 비싸기 때문에 가격 인하 압력과 함께 대륙에서 불어오는 이른바 잠행성 유로(creeping Euro) 태풍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그는 “값 싼 상품들이 영국으로 들어올 것이며, 영국 기업 역시 더 수익성이 높은 해외 판매 시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 앞으로도 오랫 동안 유로 가입을 보류한다면 경쟁력 우위에서 오는 혜택을 더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유로화는 이밖에 유럽의 기업 환경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와 기업 투자 전략 재검토 및 합병·매수(M&A) 가속화를 부를 것이라고 경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특히 산업 별로는 자동차·화학 제품 등 유럽연합 회원국 간에 가격차가 심한 제품이 표준화되어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제조업은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 확실하다.
유로가 세계 공황 유발할까 우려도

금융산업의 구조 변화도 예상된다. 즉 △역내 각 회원국 국내 은행의 비교 우위 약화 및 경쟁 심화 △유럽 채권 시장 통합 △시장 점유율 확대를 겨냥한 보험 업계 등 금융기관간 합병·매수 가속화 △외환 수수료 수입 상실에 따른 투자 및 주식 시장 상장 가능성 조사 등 새로운 금융 서비스 상품 개발 등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유로화가 몰고 올 각종 긍정적인 변화와 혜택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유럽통합 회의론자나 보수 민족주의자들은 최근의 유럽연합내 세제 평준화 및 단일화를 둘러싼 영국과 독일 간의 의견 대립, 고용과 성장을 놓고 각 회원국 지도자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등을 지적하며 유로 출범 및 화폐 통합의 앞날에 우려와 경고를 계속 던진다.

유럽연합 회원국 15개국 가운데 13개국이 좌파 및 중도 좌파 사회 민주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 유럽 내에서는 일단 낙관론이 우세하다. 그럼에도 영국의 보수당 등 유럽 통합에 회의적인 정치 세력들은 유로화가 순수한 경제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에서 탄생했고, 각국에서 예상되는 실업률 증가와 경제 성장률 저하로 유럽 경제 화폐 통합의 앞날이 극히 불안하다고 본다.

이들은 또 유로의 탄생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적 위기와 대공황을 몰고 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경고한다. 달러화에 대항해 등장한 유로화가 자칫 달러화 평가 절하를 유발해 미국 경제를 불황으로 빠뜨릴 것이라는 진단에서 내려진 경고이다. 특히 아직은 아시아 금융 경제 위기의 한파에서 벗어나 있는 중국이 이미 외환 보유고의 70%을 차지하는 달러화의 일부를 매각해 유로화를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달러화 투매현상이 벌어질 경우 달러 가치의 급격한 하락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아시아에 경제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유럽 경제가 성장·고용·인플레에서 청신호를 켜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지도자들은 99년이 유로 탄생의 최적기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1년 사이에 모든 것이 급변했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경제 바이러스는 이제 E-데이를 선동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유럽 대륙까지 공격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경제 지도는 물론 세계 경제 지형에까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유로화 출범을 바라보는 영국 언론은 그래서 99년을 ‘유럽의 해’로 선포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예측 속에 역내 지도자들의 공동체 정신과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유럽의 경제 화폐 통합이 실패로 끝난다면 3억 인구를 가진 유럽연합 자체가 그 밑뿌리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이 유럽 대륙을 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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