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독재’ 마감... 유로가 떴다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9.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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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출범 이후 세계 경제, 어떻게 달라지나
올해로 8년째 호황을 누리고 있는 미국 경제의 길잡이인 로렌스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은 얼마 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유럽통화동맹(EMU)이 유럽에 좋다면, 미국에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이자 국제 금융 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이 두 가지 점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즉 이 체제가 15개 유럽 국가로 이루어진 유럽연합(EU)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또 기존 국제 금융 체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지켜 보겠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첫 번째 사항에 대한 해답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유럽연합 회원국 사이에 들쭉날쭉한 실업률, 노동 시장 불안정, 재정 적자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항에 대한 해답은 한결 명확하다. 즉 유럽통화동맹의 상징인 유럽 단일 화폐 유로가 99년 1월1일 출범함으로써 머지않아 국제 금융 질서에 대변혁을 가져와 기존의 ‘달러 1극 시대’가 마감되리라는 사실이다. 워싱턴에 있는 국제경제연구소(IIE)의 프레드 버그스텐 박사는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스털링 파운드를 미국의 달러화가 대체했듯이, 유로가 뜨면서 달러의 전성 시대도 끝날 수밖에 없다. 예정대로 2002년 6월 말 유로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면, 최소 1조 달러의 국제 자본이 달러에서 유로로 바뀔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물론 유로가 몰고올 충격은 이처럼 경제적인 효과에 머무르지 않는다. 70년대 초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기는 했어도, 지금까지 국제 금융 질서를 주도한 것은 달러화였고, 그에 따라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 정치·경제에서 기득권을 누려 왔다. 그러나 독일·영국·프랑스를 비롯해 15개 유럽국이 모인 유럽연합이 한 덩어리(유로랜드)로 뭉칠 날이 성큼 다가선 만큼, 미국은 지금까지 누려 온 기득권을 유럽연합과 나누어 가져야 할 판이다.

‘2강1약’ 체제의 새 금융 질서 예고

말하자면 전후 50년 이상 국제 금융 질서를 지배해 온 달러 중심의 1극 체제가 가고, 달러와 유로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일본의 엔화가 뒤따르는 ‘2강 1약’ 통화 체제의 새 금융 질서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21세기에는 달러와 유로가 시장의 40%씩을 장악하고, 엔화를 중심으로 스위스 프랑 등 기타 주요 통화가 나머지 20%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달러 중심의 1극 체제에서 ‘달러-유로’ 양극 체제로 바뀌면 세계 경제에 어떤 파장이 올 것인가.

미국의 힘은 곧 달러의 힘이다. 현재 전세계의 외환 보유고는 모두 1조4천억 달러로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개발 도상국의 경우 외환 보유고의 60%를 달러로, 나머지 20%는 유럽 통화(주로 마르크화)로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외환 보유고 2천억 달러 전량을 달러로 보관하고 있다. 또 세계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환 가운데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60%에 이른다. 이에 비해 유럽 최강의 경제국인 독일 마르크화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달러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르크화를 포함한 유럽연합 15개 회원국 모두의 통화가 유로에 흡수되는 2002년 6월 말께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쯤이면 유로랜드의 경제력 규모가 미국의 3분의 2 수준에 이른다. 유럽연합은 2010년까지 동유럽 국가들까지 모두 새 회원국으로 가입시킬 예정이어서 미국을 압도하고 세계 제1의 경제국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처럼 국제 경제 질서의 지각 변동에는 무엇보다 국제 자본의 이동과 그에 따른 강대국 간의 위상 변화가 뒤따를 것이 확실하다. 우선 달러 표시 금융 상품에 몰려 있던 국제 자본이 유로 쪽으로 이동할 것이 뻔하다.

달러에서 유로로 돈이 빠져나감에 따라 특히 눈여겨 볼 것이 두 화폐 간의 교환 비율인 환율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볼 때 달러-유로 환율 변동 폭이 상당할 것으로 본다. 달러 대 유로의 환율은 이미 지난 98년 5월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 회담에서 1 대 1.1로 정해진 상태다. 즉 달러 가치가 약간 높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지금보다 유로 가치를 일부러 내려(평가 절하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고 할 경우, 곧바로 미국과 유럽 간에 무역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자칫 세계적인 무역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은 유로가 출범하더라도 2002년 6월까지는 과도기인 만큼 벌써부터 달러에 대한 유로의 충격을 과대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과도기만 거치면 유로와 달러 간의 본격적인 대결이 불가피해 보인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경제재정총국의 패트릭 차일드 대변인은 최근 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몇 정부가 유로를 기축 통화로 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로가 조만간 달러와 견줄 수 있는 기축 통화로 자리잡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달러·유로의 첫 결전장은 아시아”

그 첫 결전장은 유럽도 미국도 아닌 아시아가 되리라는 전망이다. 현재 일본·중국·대만·홍콩 등 아시아 주요 국가의 외환 보유액은 약 5천억 달러에 이른다. 이 천문학적인 자금의 대부분이 현재는 달러이지만, 머지 않아 상당액이 유로로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그 신호는 벌써부터 감지되고 있다. 유로가 공식 출범하기 훨씬 전부터 유럽 각국 정부와 기업이 매달 1백66억 달러 규모의 유로화 채권을 발행하고 있는데, 이 중 상당액을 일본이 구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외환 2천억 달러 가운데 최소 5백억 달러를 유로로 바꿀 계획이다. 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최근호에 따르면, 세계 제3위 외환 보유국인 중국이 내년에 외환 보유액 1천4백억 달러 가운데 상당액을 유로로 전환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로는 달러에 얼마나 위협적인가. 일반적으로 국제경제학자들은 한 나라의 통화가 달러처럼 세계적인 기축 통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요인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첫째, 경제력과 교역 규모다. 둘째, 그 나라 경제가 외부적 충격 요인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느냐 여부다. 셋째, 정부의 환율 규제가 없어야 한다. 넷째, 자본 시장의 너비와 깊이, 나아가 자본의 유동성이 얼마나 큰가 하는 점이다. 다섯째, 그 나라 경제의 안정성이다. 이 다섯 가지 기준을 놓고 볼 때 유로는 ‘세계 기축 통화’로서 흠잡을 데가 없다. 믿기지 않겠지만, 단일 시장 통합을 넘어서 경제 및 통화 통합까지 이룬 까닭에 유럽연합은 15국이 모였어도 재정 및 통화 정책은 마치 한 나라에 의해 시행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고 효율적이다.

현재 유럽연합이 비유럽 국가들과 맺은 역외 교역 규모는 96년 말 현재 1조9천억 달러. 이는 1조7천억 달러인 미국을 2천억 달러나 앞선 것이다. 또 국내 총생산 규모도 유럽연합이 96년 말 현재 8조4천억 달러로 7조2천억 달러인 미국을 훨씬 앞질렀다. 이처럼 유럽연합의 세력이 막강해지자 미국도 95년 12월 부랴부랴 유럽연합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정상 회담을 갖고 이른바 ‘범대서양 경제 파트너십‘(NTA) 협정을 체결하고 ‘건설적인 협력·경쟁’을 약속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은 상품과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서는 관세 장벽을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위한 ‘범대서양 시장’ 협정에 조인하기도 했다. 그 핵심은 늦어도 2010년까지 두 진영 간의 관세를 완전히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진영 간의 관세 장벽은 애초부터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수출품의 평균 관세율이 6.36%인 데 반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수입품의 관세율은 절반 수준인 3.19%이다. 특히 가장 민감한 분야인 농산물의 경우 미국이 유럽산 농산물에 대해 30% 정도의 수입 관세를 물리는 데 반해 유럽연합은 무려 75%를 물리고 있다.

두 진영의 무역 분쟁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최근 바나나 수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바나나 전쟁’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정부는 유럽연합이 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등 71개 국가의 바나나 수입에 대해서 관세 특혜를 인정하면서도 정작 미국산 바나나에 대해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자, 마침내 98년 12월21일 일부 유럽산 상품에 대해 100% 보복 관세를 물리기로 선언한 것이다.

또 99년 2월 말까지 이 문제에 대해 유럽연합이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2단계로 일부 유럽산 사치품에 대해서도 보복 관세를 물리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품목은 루이 뷔통 등 고급 가방, 이탈리아의 치즈 페로리노, 독일산 커피 메이커, 유럽산 면 침대보와 양초, 몽블랑 필기구, 캐시미어 스웨터와 셔츠 등이다.
엔화, 양극 체제 조정자 역할에 머무를 듯

물론 유럽연합도 미국에 대해 불만이 대단하다. 특히 미국이 자국의 국가 안보를 이유로 특정 국가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이들 나라와 거래하는 다른 나라 기업들에게까지 제재하도록 한 경제제재법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이란과 50억 달러짜리 가스관 공사를 맺으려 한 프랑스의 한 기업체에 대해 미국이 보복 조처를 취하겠다고 위협한 것이 단적인 예다. 물론 이 사건은 프랑스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유야무야되었지만 미국의 경제제재법은 유럽연합과 최대 무역 마찰 요소 중 하나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연합이 맺은 ‘범대서양 경제 파트너십’은 실질적인 경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실무 협정이라기보다는 협력의 대강만을 밝힌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제경제연구원 엘런 프로스트 박사의 견해다.

그렇다면 달러와 유로라는 양극 통화 체제로 국제 금융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세계 제2의 경제 대국 일본의 엔화는 어떤 위상을 갖게 될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설령 국제 금융 질서가 양극 체제로 간다 해도 엔은 10~15%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가 내놓은 보고서 역시 엔화가 가까운 시일 안에 ‘진정한 국제 통화’로서의 제 역할을 찾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말하자면 달러와 유로의 뒤를 묵묵히 따르며 양극 체제의 조정 역에 머무르리라는 분석이다.

현재 일본의 경제력은 독일의 거의 2배이나 교역량은 약간 뒤진다. 그러나 일본 경제의 최대 강점은 지난 15년간 유지해 온 물가 안정. 90년대 들어 경제에서 거품이 빠지면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지만, 세계 제1의 외환 보유국(2천억 달러)에 최대 채권국인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무시못할 힘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국제 금융 질서가 달러와 유로를 중심으로 양극 체제로 재편될 때 어떤 문제가 예상될까. 대강 세 가지다. 우선은 무엇보다 유로와 달러, 유로와 엔의 환율이 큰 관심사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유럽연합이 회원국의 경제를 회복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부러 유로를 달러나 엔에 비해 적정 수준 이하로 평가 절하할 경우 심각한 무역 분쟁이 예상된다. 특히 2천억 달러가 넘는 무역 적자와 경상 수지 적자로 허덕이는 미국이 이를 용납할 것 같지 않다. 둘째로 환율 차익을 노려 달러에서 유로로 급속히 빠져나갈 국제 자본을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무엇보다 달러와 유로 간에 안정적인 환율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정치 경제적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해 있다. 미국은 과거 70년대의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와 87년 플라자 협정 체결, 그리고 95년 초 달러화 대하락을 거치면서 무엇보다 국제 통화 체제의 안정을 바라 왔다.

이에 반해 이미 15개 회원국끼리의 역내 무역만으로도 역외 무역과 맞먹는 수준인 유럽연합은 이제부터 달러보다는 유로의 가치 안정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유럽연합 이외의 국제 통화 정책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유럽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유로는 달러에 비해 환율 변동 폭이 클지 몰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쯤 되면 유로와 공존해야 할 미국 정부의 고민이 어떠할지 짐작할 만하다.

“양극 체제에서 통화 안정 이루어진 적 없다”

역사적으로 국제 경제 질서의 안정은 19세기의 영국, 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처럼 어느 한 나라가 압도적인 패권을 쥐었을 때 가능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달러 중심의 1극 체제가 사라짐으로써 기존 국제 금융 질서의 안정도 다소 깨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제경제연구원 프레드 버그스텐 박사가 “역사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나라의 통화를 중심으로 양극 체제가 도입되었을 때 통화 안정을 이룩한 예는 전무하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실제로 일부 전문가들은 유럽연합이 역외 나라들에 대해 높은 관세 장벽을 유지할 경우 세계 경제 전체로 보아서는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12월11일 유럽연합이 한국 등 아시아산 텔레비전 수상기에 대해 최고 44.6%의 반덤핑 관세를 2000년 4월까지 연장키로 발표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아무튼 유로의 출범으로 이제 달러에 의한 세계 금융 1극 체제는 사실상 끝났다. 문제는 앞으로 유럽연합의 태도다. 이 거대 경제 블록이 유로를 무기로 집단 이기주의에 빠질 때, 미국은 물론 또다른 축인 일본과 협력은커녕 마찰이 예상된다. 유럽연합과 미국 간의 교역은 전세계 상품 교역량의 37%, 서비스 교역량의 45%를 차지한다. 그만큼 세계 경제가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두 진영의 협조에 달려 있다.

역사적으로 기축 통화 체제의 변화에 따른 과도기 때 주요 통화 간에 극심한 변동이 뒤따랐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유럽연합·미국·일본 세계 3대 경제 대국 간의 협력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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