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얼 서린 안동 도산서원·하회 마을
  • 金 薰 기자 ()
  • 승인 1997.05.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곳에 가면 입맞춘 땅과 물, 퇴계의 마음 빛이 있다
퇴계(退溪) 이 황(李 滉·1501~70)의 존영과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지금 천원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퇴계의 삶이나 체취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을 유통하고 있다. 경북 안동(安東)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퇴계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편린이나마 더듬어 내는 일이라야 옳을 터이다. 그 오래되고 자존에 가득찬 유림(儒林)의 고장은 두텁고도 다양한 문화의 층위를 축적해 왔는데,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유(儒)와 무(巫), 강(江)과 산(山), 학문과 생업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낸 하회(河回) 마을과 또 안동 김(金), 안동 권(權), 진성(眞城) 이(李), 의성(義城) 김, 풍산(豊山) 류(柳), 예천(醴泉) 권, 풍양(豊壤) 조(趙), 그리고 그밖의 여러 유림 영남학파 명문의 오랜 세거지(世居地)들이 위엄과 자존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퇴계는 그 절정이다.

도산서원의 심층 구조를 들여다보는 즐거움

해마다 관광객 40만~50만명이 하회 마을에 몰리고 있고, 하회를 한 바퀴 돌아본 이들의 발길은 어김없이 인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屛山書院)으로 이어진다. 퇴계와 도산서원은 그 관광객들에게 도대체 어떤 내용의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일까.
도산서원의 핵심부는 퇴계 재세시(在世時)에 건립된 도산서당과 그 옆의 농운정사이다. 경내의 다른 건물들은 퇴계 몰후(沒後)에 그의 덕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건립했다. 도산서당은 퇴계 자신의 공부와 강학의 공간이었고, 농운정사는 그 가르침을 받드는 후학들의 기숙사였다.

도산서당의 건축 구조적 특징은 그 염결한 단순성에 있다. 그 단순성의 심층 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은 안동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며 공부일 것이다.

도산서당은 맛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이다. 그 서당은 한옥이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그 맛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浮華)를 용납치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그 서당 안에서 퇴계의 공부방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 주고 있다. 아마도 도산서당의 구도의 단순성은 퇴계 자신의 마음의 빛깔과 그것을 실천하는 삶의 태도를 물리적 공간에 응축해 놓은 구도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절제의 극에 닿은 그 구도 안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작은 공부방과 마루는 서원의 언덕 아래를 커다랗게 구비치는 낙동강과 그 언저리 인간의 마을을 향해 열려 있다. 도산서당의 위치는 인간세와 차단된 격절의 공간도 아니고 인간세에 매몰된 오탁의 공간도 아니다. 그 자리는 인간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한 구비를 돌아서 있는 위치이며, 인간의 세상과 아름다운 거리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인간의 세상과 쉴새없이 통로를 개설하는 위치이다.

도산서원의 입구 매표소에서부터 강을 끼고 걸어 올라가서 도산서당에 닿는 길은 책 읽기와 세상 읽기, 혼자 살기와 더불어 살기, 세상 속에서 살기와 세상 밖에서 살기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인간의 물리적 공간 속에서 어떻게 설정하고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폐쇄된 자아의 밀실이 아니다. 그 서당의 물리적 위치는 인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거기에 함몰하지 않는 위치이다. 그렇게 해서 책과 세상은,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역동적인 메시지를 상호 교환할 수 있었다. 도산서당의 심층 구조는 그 건물의 물리적 얼개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퇴계의 마음의 빛깔에 있을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이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고, 날마다 <小學>의 글대로 살았다. 온종일 고요히 앉아서 피곤하더라도 몸을 기대는 일이 없었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 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으며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손님을 모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에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물가 배움터는 퇴계가 쉰세 번 사직서 쓴 곳

나라의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집에 쌓아 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방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제사 때는 상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신위(神位)를 향해 정좌해 있었고, 제삿날에는 술이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퇴계는 70세에 이르러 병이 깊어지자 머무르던 제자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였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가족에게 명하여 염습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 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퇴계의 삶의 구체적 모습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제자들이 함께 편찬한 언행록과 연보에서 옮겨 온 것이다).

낙동강 상류의 물가에 배움의 공간을 건설하려는 퇴계의 노력은 40대 이후 계속되었다. 퇴계는 46세 때 이 물가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고, 50세 때 한서암(寒栖庵)을 지었으며,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가 흐르는 물가에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 나서 시를 한 수 지었다.

시냇가에 비로소 살 곳을 마련하니

흐르는 물가에서 날로 새롭게 반성함이 있으리.

이 물가의 배움터에서 그는 무려 쉰세 번이나 사직서를 써서 한양의 임금에게 보내야 했다. 그의 연보는 한 해에도 몇 번씩 거듭되는 임명과 불취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70세로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해까지도 벼슬을 거두어 주기를 요구하는 사직서를 임금에게 보냈다. 그의 사직은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임금의 명을 거듭 물리치기 민망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주막에서조차 그는 사직서를 써서 인편에 보냈다.
사직서만이 이미 인의(仁義)를 저버린 정치 현실의 공세로부터 자신의 초야(草野)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뜻은 자연에 있었으나 그는 자연의 맹목적인 아름다움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 농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도산서당의 그 염결하고도 단순한 구도는 퇴계의 삶의 모습과 삶의 태도를 집약하고 있고, 모든 아름다움을 인간과의 관계 위에서만 긍정한 그의 미의식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구조는 맛배지붕에 홑처마이다.

도산서원을 나선 발길은 하회 마을로 향하게 마련이다. 하회에 갈 때는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쓴 <민속마을 하회여행>(밀알출판사), 또는 <안동 하회마을>(대원사) 같은 책을 읽어야만 하회의 두터운 문화적 층위를 이해할 수 있다.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 구현하는 집들

임재해 교수는 하회의 아름다움이 ‘조화’에 있다고 말한다. 적대 관계나 갈등 관계에 놓일 수도 있는 수많은 대립 요소가 하회에서는 조화와 포용에 도달해 있다.

양반과 상민, 유교 문화와 무속, 자연과 인간, 기와집과 초가가 강물 구비치는 그곳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무대로 삼아 조화와 공존을 이루며 화해로운 삶의 질감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하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일 것이라고 임교수는 말했다. 도산서당을 보고 나서 하회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은 유가적인 삶의 풍요함과 너그러움에 아늑함을 느낄 것이다. 도산서당의 구조가 삼엄한 이념형이라면 하회 마을은 그 이념형이 삶의 현장에서 너그럽게 적용되면서 삶의 다양한 국면을 포용하고 쓰다듬는 생활의 조직 원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회 마을에 관한 임재해 교수의 글은, 마을의 골목과 길이 뻗어나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집들의 좌향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엄정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보인다.
‘마을 길이 아주 넓고 방사선형 체계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곧지는 않다. 골목길을 따라가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담장이 눈앞에 막아서거나, 담장 사이로 길이 휘어지면서 그 꼬리를 감추어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길과 집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길이 대문을 찾아 들어 가려면 구비를 틀 수밖에 없다. 마을의 골목은 그 자체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의 분포에 따라 집과 집을 이어주는 소통 체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길이 각 집의 방향에 따라 전면부의 출입구까지 이르려니 우회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다. 길의 전체적인 체계는 집의 분포가 결정하지만, 길이 흐르는 선은 집의 방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민속마을 하회여행> 119쪽에서)

하회의 집들은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지도 않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도 않다. 하회의 집들은 서로 어슷어슷하게 좌향을 양보하면서, 모두 자연 경관을 향하여 집의 전면을 활짝 개방하고 있다. 길은 그 집들 사이를 구비구비 흘러가 각 집의 대문에 닿는다.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구비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하회의 집들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집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이다. 길이 여러 집을 에돌아서 대문에 당도할 때, 그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익명성에 매몰되어 다만 기계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하회의 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웃에게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것이다.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는 체증에 막혀 있었고, 교통 방송의 내용은 ‘막힘’뿐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