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외길 ‘디자인 독립운동가’ 정연종씨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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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디자인’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무척 낯설다.‘산업 디자이너’가 없기 때문이다. 정연종씨(53)는 스스로를 한국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한국의 전통미를 세련되게 다듬고, 그것을 이용해 상품을 디자인했다는 의미에서‘최초’이다. 68년 홍익대 공예학부를 졸업한 후 그는 한국의 전통 문양과 무늬를 현대화·상품화하는 데 30년 가까운 세월을 투자했다.

이제 그 결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해, 정씨는 지난 4월1일 <정연종 가구 전시회>(국제전자센터빌딩 커피점 ‘가림토’·02-3465-0270)를 열었다. 전시장을 따로 마련할 돈이 없어 커피점에 가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전시 공간을 빌렸다. 커피점 입구에는‘정연종 가구 상설 전시장’이라는 간판이 작게 붙어 있다.

전시 공간에 나와 있는 작품들은 탁자 14종과 의자 2종이다. 탁자 상판에는 십장생 문양들이 은입사(銀入紗)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4㎜ 깊이로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단청과 토분을 합한 석채(石彩) 도장을 한 탁자들은 두 가지 고상한 멋을 동시에 풍긴다.‘한국적인 멋과 현대적인 멋의 조화’. 정씨가 보낸 지난 30년 세월은 바로 여기에 바쳐졌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유의 것 외면하던 세태에서 외로운 작업

정씨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적 소재를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으로 상품화하는 일은 내가 추구하는 일생의 과제이자 일관된 목표이다.” 그가 과제와 목표를 설정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어느 일본인 노벨 수상자의 말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디자인 개념이 어차피 수입된 것이라면, 우리 디자인을 해야 서구와 맞설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의 길을 결정했던 것이다.
한국적인 것은 촌스러운 것이라며 ‘우리 것 때려부수기 운동’까지 벌였던 지난 세월 속에서 정씨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만으로 밥벌이가 되지 않을 뿐더러, 국가와 기업은 물론 디자이너 가운데서도 누구 하나 동행해 주는 이가 없었다. 촌스럽게만 여겨지는 한국적인 것을 세련되게 다듬는 디자인 작업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무엇보다 당장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정씨는 다양한 상품 제작을 경험하려고 의도적으로 직장을 옮겨다녔다. 80년대 초에는 전국민에게 익숙한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는‘국풍 81’ 공식 포스터와 상징을 제작했으며, 바로 그 해 <한국의 미> 포스터전을 열어 62점을 발표하기도 했다.

저작권 소송 패소가 오히려 전기

그래픽 디자인만 해서는 굶어 죽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 목각 공예이다. 그가 제작한 포스터를 보고는‘하나 주시오’하던 사람들이 목각 인형을 보고는‘얼마요?’라고 물어 왔다.‘오줌싸개’‘산골 아이들’같은 제목을 붙인 작은 나무 인형이었지만, 세련되게 디자인해 만든 엄연한 전통 문화 상품이었다. 82년 제12회 전국민예품경진대회에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문화 상품은 양산 체제에 들어갔으나, 모방 제품이 나오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저작권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서울 지하철 서초·낙성대·압구정·잠원 역의 벽화를 제작하고, 서울올림픽 기념 민속공예품, 한국적 캐릭터로 유명한 금다래·신머루·떠버기 등을 만들면서 전통 문양 수집과 상품화에 박차를 가해오던 그는 88년 큰 암초에 부딪히고 말았다. 디자인계에‘너구리 전쟁’으로 널리 알려진 송사에 휘말려든 것이다. 롯데월드의 캐릭터‘로티’의 표절 여부를 두고 대기업과 벌인 치열한 법정 싸움에서 정씨는 승소와 패소를 주고 받았다. 4년 후 대법원은 롯데월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씨는 회사와 집을 모두 날려버리고 말았다.
정신적·물질적으로 그를 완전히 침몰케 했던 패소는 뜻밖에도 그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전셋집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 집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파트에 한국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한국형 아파트’라는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다. 최근 대대적인 광고를 내보내며 분양하기 시작한‘삼성 한국형 아파트’가 바로 정씨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정씨는 벽지·거실 바닥·화장실 타일·문 등에 십장생·단청·우물마루·사군자·고구려 문양 같은 우리 고유의 무늬를 새롭게 해석해 새겨 넣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전술 비연(戰術飛鳶)’ 모양이 거실의 등에 그대로 옮겨져 있다. 정씨가 수집·연구한 전통 문양·무늬 수만 개가 현대적 감각으로 다듬어져 일상 생활 공간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 문화의 잠재력 펼쳐 보일 터”

정씨의 최근 관심은 생활용품에 가 있다. 패션에서 시작된 외국의 유명 상표들이 모든 생활용품으로 그 활용 폭을 넓히면서 이른바‘명품’대접을 받는 데 비해, 정씨의 전략은 처음부터 아예 산업 디자인 전분야에 걸쳐 있다. 94년 전셋집에‘조이정 인터내셔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시작한 이 작업은, 지금‘안도정 인터내셔널’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진행 중이다. 신라금관·태극·장신구 등 온갖 신비스러운 모양들을 현대적인 안목으로 해석해 넥타이·스카프·손수건·우산 같은 생활용품에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정씨는 상품의 국제 경쟁에서 디자인이 마지막 보루라고 굳게 믿고 있다.‘디자인이 무기가 되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믿음이 지난 30년 동안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첨단 기술을 아무리 개발해도 개성 있는 디자인이라는 옷을 입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디자인 선진국들이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길을 뚜벅뚜벅 외롭게 걸어온 정씨는, 이 땅과 그 외로움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주제를 가지고 오늘까지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문화 유산의 거대한 잠재력 때문이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이 보물단지를 파헤치는 최초의 디자이너라는 강한 긍지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점 하나를 찍고도 한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디자인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디자인 독립운동가’라 부르는 이 사람, 미친 이가 역사를 바꾼다고 믿는 이 장인 덕분에 한국도 머지 않아 피에르 가르뎅 같은 유명한 한국 상표를 갖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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