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투쟁 빛나는 조선족 ‘대모’
  • 중국 하얼빈·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72세인 이 민(李敏) 여사는 중국에 사는 2백만 조선족의 정신적 지주이다. 그에 대한 조선족의 신망에는 항일 무장 투쟁 시기의 전설적인 조선족 출신 여걸로서 중국 사회에 이름을 떨친 그의 과거 경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소수 민족인 조선족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문화적으로 우수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그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데 있다.

이여사는 항일 무장 투쟁 시기에 함께 전선을 누볐던 혁명동지 진뢰(陳雷·79)와 결혼했다. 한족인 진뢰는 중국 건국 후 흑룡강 성 성장을 지냈다. 이여사도 중국 인민정부 흑룡강성정치협상위원회 부주석 및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등을 지냈는데, 이는 혁명 1세대 조선족 가운데 가장 요직을 거친 경우이다. 그는 이 때 조선족을 위해 <흑룡강성 조선어 신문>과 출판사, 민족연구소, 민족간부학원 등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오빠 따라 유격대로 입산

최근 이 민 여사는 일부 한국 기업들로부터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그가 북한 지도층과 맺어온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항일 무장 투쟁 시기에 만주에서 김일성부대와 맺은 인연은 최근까지 북한 실력자들과의 두터운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대북 경제 협력에 효과적인 길을 뚫으려는 한국 기업의 관심이 그에게 몰리는 것이다.

<시사저널> 취재반은 국내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이 민 여사를 직접 만났다. 흑룡강 성 하얼빈 시 중심가에 자리한 그의 집은 고풍스런 러시아식 2층 건물이었다. 국가 원로에 대한 배려로 중국 정부의 군인들이 집 주변을 경호하고 있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이여사가 남편 진씨와 함께 나와 친절히 맞이했다. 1층 응접실에 들어선 뒤 그는 남편에게 인사말을 부탁했다. “한국 기자 여러분의 첫 방문이 중·한 양국이 우의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진씨의 인사말이 끝나자 이여사는 남북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먼저 표명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신문과 당 내부 문건을 통해 남북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어쨌거나 같은 민족이 다시는 전쟁을 치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노동당과 민자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한다. 최근 한국에서 북조선에 쌀을 지원했는데 이건 바람직한 일이다.”

이어서 화제는 그가 중국 땅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게 된 사연과, 여기에 참가했다 일제의 총칼에 쓰러져 간 조선족 젊은이들의 활동상으로 넘어갔다. 조선 왕조의 후예 가문인 이여사의 가정은 일제 초기에 황해도 해주에서 흑룡강 성 라북 현 오동하촌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는 1924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찍이 항일 투쟁에 나섰다가 일본군에 희생됐고 어머니마저 그가 여덟 살 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 때 그는 나라를 되찾아 부모와 조국의 원수를 갚겠다며 항일유격대에 들어간 오빠를 따라 입산했다.

“20년대 초에 조선족 최용건(전 북한 부주석, 76년 사망)이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당시 교장은 장개석이었고 주임은 주은래였다. 28년에 최용건 교관은 황포군관학교에서 분배를 받아 내가 살던 탕원 지구로 들어와서 학교를 꾸렸다. 이 때 오빠가 이 학교에 다녔고 나는 아동단에서 활동했다. 이 학교는 그 뒤 일본군의 습격으로 파산돼 학생 44명이 산골로 들어갔다. 동북 항일유격대의 시초가 된 셈인데, 44명 중 40명이 조선족이고 4명이 한족이었다.”

탕원유격대로 불리던 당시 학생들이 간부가 되어 30년대 중반 들어 군대로 발전했는데,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제11군까지가 이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이씨는 당시 북만주에 근거를 둔 제6군에 배속됐다. 그의 오빠 이운봉은 제6군 1사의 정치부주임이었다. 그러나 오빠를 포함해 당시 40여 명에 이르던 동북항일연군 조선족 간부들은 항일 전투에서 대부분 희생됐다. 그 중 현재까지 생존한 조선족은 단 한 사람, 경상도 출신 이재덕씨(여·78·중국전국인민대표대회 비서처국국감)가 그 주인공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결혼 도와줘

“특히 우리 성에는 당시 경상도 사람이 많이 이주해와, 투쟁에 나선 조선족 젊은이 가운데도 경상도 출신이 많았다. 나는 한 몸 바쳐 끝까지 싸웠다 뿐이지 큰 업적은 없다. 그때 동북 땅에 들어와 반일 구국 전투에 참가했다 쓰러져 간 조선족 청년들의 정신만은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본다.” 이여사는 현재 동북항일열사전을 회고록 식으로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경상도 출신 항일 투사들이 많이 누락돼 있어 이를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지도부 중 이여사가 회고하는 조선족 출신은 다음과 같다. 제1군 초대 군장 주 진, 제2군 3사 사장 김일성, 제3군 4사 정치부 주임 김 책, 제4군 군장 리연록, 제6군 1사 사장 마덕산 및 정치부주임 서광해, 2사 정치부주임 장흥덕, 4사 정치부주임 오옥광, 제7군 군장 이보만 및 총참모장 최용건, 제3로군(6, 9, 11군) 총참모장 허형식, 제11군 정치부주임 김상교. 이들 중 특히 제3로군 허형식 총참모장은 을사조약 후 의병을 일으켜 서울 진공작전을 폈던 허 위 대장의 손자였다.

이 민 여사는 당시 동북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김일성 부대와의 관계도 남달랐던 것으로 회고한다. “그때는 각 군마다 한족이 많아 조선인만으로 부대를 편제하기는 곤란했는데 김일성 부대만 조선족으로 편제해 동만주에 거점을 두고 조선에도 왔다갔다 했다.” 그와 김일성과의 남다른 인연은 43년에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맺어졌다고 한다. 당시 진뢰와 이 민이 혼인을 하려고 했지만 조선족군 간부들의 반대가 심했다. 조선족 여성은 조선 청년과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때 이 민과 같은 부대인 중국 원동홍기군 특별부대 제88여단에서 제1영 영장을 맡고 있던 김일성은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혼인한다는데 출신이 무슨 중요한 문제인가’라며 반대하는 조선족 간부들을 설득해 혼인 성사를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각별한 사연 때문에 당시 어린 김정일은 이 민 여사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48년 중국 건국 후 진·이 부부는 항일 및 건국 투쟁 공로에 따라 흑룡강 성 공산당 간부로 활동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수난 등 우여곡절도 없지 않았지만 남편 진씨는 78년부터 10년간 흑룡강 성 성장을 지냈고, 이여사 역시 성 정치협상위원회 부주석 및 민족사무위 주임 등을 맡았다.

두 사람은 89년 흑룡강 성과 북한 함경남북도 사이의 자매결연을 위해 함경남북도를 방문했다. 이 사실을 안 김일성 북한 주석은 이들 부부를 평양으로 초빙했다. 항일 무장 투쟁 동지들이 모여 부둥켜안고 회포를 풀었다는 이들의 관계는, 이여사가 한 달간 평양에 체류하며 경제 관계로 발전했다. 당시 흑룡강 성의 젊은 조선족 사업가 최수진씨를 대동한 이여사는 김주석에게 최씨를 소개했다. 김주석은 김정일 조직비서(당시 직책)를 불러 북한의 주요 사업과 연결해 주었다. 오늘날 최수진씨가 북한 대외 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남북, 경제 통일부터 이뤄야”

북한과의 그런 특별한 관계 때문인지 이여사의 견해는 북한의 고충과 위기 의식을 퍽 많이 대변하고 있었다. “김주석 생전에 몇 차례 만났더니 김주석은 ‘지금 우리는 남조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미국을 두려워한다’고 말해 가슴 아팠다. 남조선에 주둔한 미군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방 건설에 주력해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그만 영토에서 민족끼리 또 전쟁을 벌인다면 그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때문에 나는 양쪽 영도자들이 과거 어떤 원수 감정이 있었건 간에 한 형제로서 냉정히 이 문제를 직시하고 서로 마주앉아 토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곁에서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 진씨가 의견을 보탠다. “우리 중국과 북조선은 과거부터 같이 피를 흘리며 싸워 온 역사로 보면 관계는 확실히 밀접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중·한 수교로 한국과의 우의도 많이 증진됐다. 김영삼 대통령도 현재는 중국의 간접적인 벗이 되었다. 내가 보건대 통일이 말은 쉬워도 한국은 부강하고 북조선은 빈곤한 게 문제다. 한국이 북조선을 경제상으로 도와서 먼저 경제 통일부터 이뤄야 한다.” 이런 인식 아래 진씨는 지난 93년 김대통령 취임 후 ‘和爲貴’라고 쓴 붓글씨를 청와대에 선물로 보냈다고 말한다.

한국 방문 의향을 묻자 이여사는 “개인적으로는 가보고 싶지만 공인 처지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비준이 필요하다”고 대답한다. 3시간에 걸친 대담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이여사가 책 한 권을 손에 쥐어주었다. <동북항일가곡선집>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지난 20여 년간 그가 심혈을 기울여 집대성한 무장 투쟁 시기의 항일 가요집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