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향해 폭설 뚫고 달리다
  • 금강산·이문재 기자 (moon@e-sisa.co.kr)
  • 승인 2001.03.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강산에서 남측 마라톤대회 처음 열려…
336명, 정전항∼온정리 질주


온통 눈이었다. 세뇌하려는 듯, 표백하려는 듯, 매립하려는 듯, 눈은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렸고, 쌓이고 쌓이고 또 쌓였다. 눈을 감아도 눈은 그 흰빛 잔영으로 쉬지 않고 내렸다. 금강산은 설국이었다. 폭설로 뒤덮인 개골산은 눈의 제국이었다. 습설을 뒤집어쓴 금강송들은 오직 수직하는 힘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적설량 70cm. 지난 2월23∼24일, 기록적인 춘설은 금강산 일대를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2월23일 아침 8시30분, 장전항에 상륙할 때는 비였다. 세관을 거치자 눈으로 바뀌었고, 온정각에 하차했을 때는 눈냄새가 짙었다. 장전항에서 온정리에 이르는 관광도로 양켠 풍경은 눈발 때문인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전 10시께 목란관 입구에서 구룡폭포 코스 산행에 들어갈 때, 관광객들은 아이젠을 착용해야 했다. 금강산은 눈 옷을 두텁게 껴입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눈은 단 한 차례도 끊이지 않았다.

24일 아침 9시, 3백명이 넘는 마라톤 마니아들은 장전항 수상 호텔인 해금강 로비에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연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출발선에 세워놓은 비닐 구조물이 쌓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여러 번 주저앉았다.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설 경보는 장전항을 메워버릴 듯한 기세였다. 출발은 한 시간 이상 늦추어졌다. 대회를 주최한 현대아산측이 밤새 중장비를 동원해 코스 위에 쌓이는 눈을 치웠지만, 폭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온마저 영하로 내려가 있었다. 전날 밤, 대회 조직위측은 "이 대회가 어떤 대회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회를 강행한다"라고 말했다. 분단 이래, 북한 땅에서 처음 열리는 단축 마라톤 대회.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달린다'는 각오였다.

금강산 마라톤대회는 정동창 사장(여행춘추)과 선주성 사장(런너스클럽닷컴)의 아이디어였다. 둘 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 차례 완주한 마니아이다. 정사장은 "북한 땅에서 마라톤 대회를 연다니까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이라며 손을 저었다. 이 고정 관념의 벽을 깨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특수 지역에서 어떻게 남한 민간인 수백 명이 달리기를 하느냐며 뒤로 물러섰다는 것이다.

선주성 사장에 따르면, 지난해 북측에 마라톤 대회를 열자고 제의했을 때 첫마디가 '두고 봅시다'였다. 완전한 거부는 아니었다. 이후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지난 1월 하순 확답을 얻었고, 그때부터 실무 회담에 들어갔다. 선사장은 특히 남측 언론의 취재 범위를 넓히기 위해 신경을 썼다. 금강산에 처음으로 남측 방송사의 ENG 카메라가 들어가 25km에 달하는 주로를 촬영하게 된 것이다(물론 군사 시설은 촬영할 수 없다는 단서가 있다. 마라톤 코스는 북측의 최전방 지역이다). 사진 기자들이 160mm 이상 망원 렌즈를 사용하게 된 것도 처음이고, 취재 차량 4대가 주로를 따라 이동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옷에 등산화, 아이젠 차고 질주



오전 11시23분, 마침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북한 땅에서 처음으로 달리기를 하는 출전자들은 국가대표 출신 방선희 선수(파주시청 소속)의 선창에 따라, 목청껏 외쳤다. "아홉, 여덟, 일곱…." 장전항 해금강 호텔 앞을 출발해 관광도로를 타고 닭알바위 아래 양짓말을 지나 4.8km 지점 삼거리에서 갈라져, 삼일포(25km) 코스는 왼쪽으로 달려 단풍관에서 되돌아나오고, 10km 코스는 직진해 온천장에 이르는 코스. 초반 4km 지점에 고개가 서너 개 있을 뿐, 전반적으로 평탄한 지역이다(왼쪽 약도 참조). 최고의 코스, 그러나 최악의 날씨.

걷기 대회를 하기에도 쉽지 않은 기상 상태였다. 대부분 비옷을 입었고, 모자에 비닐을 씌운 선수도 있었으며, 등산화에다 아이젠까지 찬 중년도 있었다. 선수들은 다양했다. 열두 살 초등학생에서부터 일흔한 살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뉴욕에서 날아온 재미 동포에서 탤런트, 마라톤 클럽 회원들. 국회의원 임채정·조성준·김성순·오세훈 씨도 배번을 달고 몸을 풀고 있었다. 대회를 협찬한 한국토지공사처럼 기업에서 단체로 참가하기도 했고, 가족들도 많았다. 출발 직전, 생일 케이크를 자른 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대기하고 있었다.

11시23분. "와아∼" 선수들이 폭설의 주렴을 뚫고, 쏟아지듯 터져나왔다. 미끄러운 주로는 곧바로 오르막길. 오른쪽으로는 눈 덮인 동해북부선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남쪽 양양역에서 북쪽 경원선 안변역을 오갔던 철길. 총연장 192.6km인 이 철길은 1932년 개통되어 이른바 금강산 시대를 열어젖뜨렸던 철길이다. 허리가 잘린 동해북부선이 다시 연결되면 북쪽 장전역에서 남쪽 간성역까지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경의선·경원선과 함께 이 철길도 복원될 예정이다).

통일을 염원하는 마라톤을 처음으로 맞이한 것은 북측 주민이 아니라 훤칠한 금강송들이었다. 미인송·황장목·춘양목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소나무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북한문화답사기-금강예찬>에 따르면, 흰눈을 이고 '장하게' 서 있는 금강송이 바로 금강의 수문장이다. 폭설이 금강의 환영 행사였던 것일까. 선수들은 금강산 초입에 펼쳐지는 장대한 설경의 파노라마에 '눈 멀어' 있었다.


"아니, 왜 이밥 먹고 달리기 한대요?"



코스 양켠에 둘러쳐진 철조망이나, 중요 지점에 부동 자세로 서 있는 군인들, 먼 발치에서 제설 작업을 하는 주민들, 하교하는 어린이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날, 구룡폭포 산행 때 북측 환경관리인들이 보인 관심에 견주면 의외였다. 구룡폭포 오르는 길에 북측 관리인들과 '마라손' 대회를 화제로 삼았는데 '어떤 선수가 오느냐'며 매우 궁금해 했다. 일흔 넘은 할아버지도 뛴다니까 "그럴 리가?"라며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대회 조직위에 따르면, 북측과 대회 개최를 논의할 때, 북측이 "아니 이밥(쌀밥) 먹고 왜 달리기를 하겠다는 거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남한에서도 그랬다. 아이들이 뛰어놀라치면, 어른들이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귀한 쌀밥 먹고 왜 그리들 뛰느냐" "배 꺼질라. 살살 걸어라."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보기에, 고어 텍스 타이즈에 고글을 끼고, 나이키 러닝화를 신고 달리는 남한 사람들, 걷기도 버거운 눈길을 '죽어라고' 달리는 남한 사람들을 납득하기 어려웠으리라. 장전항 통행검사소 입국심사대에서도 그랬다. 마라톤을 취재하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온 한 남쪽 기자의 짐을 보며 "마라손 환자들이구만"이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폭설을 뚫고 금강산 자락을 달리는 일은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이면서도, 매우 착잡한 것이었다. 금강산이 아무리 눈의 장막을 쳐도, 분단 상황만큼은 가리지 못했다. 마라톤은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운동이지만, 금강산 자락을 달리는 몸과 마음은 수시로 분열되고 있었다.

마라토너들이 달린 금강산 지역은 6·25 말엽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다. 금강 예찬의 초입은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가 아니라, 반 세기 전 치열한 전투에 대한 묵념이어야 했다. 금강산은 탐승이나 답사, 혹은 유람할 대상이기 이전에 북측의 최전방 군사 지역이었다. 어떤 선수들에게는 시야를 막는 폭설보다, 미끄러운 노면 상태보다, 바로 이곳이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분단의 현장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금강산 마라톤대회가 갖는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국회 남북관계특위 임채정 위원장은 축사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녘 땅에서 이렇게 많은 남녘 사람이 함께 달릴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입니다"라며 참가 선수들을 '7천만 겨레의 통일 염원을 실어나르는 희망의 전령사'라고 불렀다. 대회 조직위는 "이번 대회는 기록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북한 땅에서 처음으로 달렸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10km 코스에 참가한 선수들 중에는 선수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강 달리기' 혹은 걷기 대회에 참가하는 심경이었다. 25km 코스를 달리는 마니아들도 기록보다는 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결승점은 온천장 정문. 온정각 휴게소 앞을 지나 휴양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리를 건넌 다음 다시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 길도 이번에 처음 열린 길이다. 출발한 지 2시간 가까이 되자, 삼일포를 돌아오는 25km 참가자들이 골인하기 시작했다.

금강산 도착 첫날 인터뷰를 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던, 전북 김제에서 올라온 정현모씨(69)는 2시간15분대에 골인했다. 정씨가 대회에 참가한 까닭은 세 가지. 평생 처음 금강산 구경에, 금강산에서 달리기도 하고, 6·25 때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행방 불명된 삼촌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정씨는 "삼촌은 1950년 7월2일 의용군으로 나갔는데, 그날이 바로 삼촌 생일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부모님 잘 돌봐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1988년 56세에 마라톤을 시작한 정씨는 골인하고 난 뒤에도 힘이 남아도는지 다시 한 바퀴 뛰고 싶다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7번 국도 타고 금강산까지 달리고 싶다"


25km를 완주한 의사 김상우씨(50·서울 예일산부인과 원장)는 "이런 마라톤은 처음이다. 무공해 눈송이가 눈 코 입으로 들어가 갈증도 없었다. 눈 때문에 금강산을 볼 수 없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멋진 마라톤이었다"라고 말했다. 출전자 3백36명 가운데 2백9명이 완주했다. 25km에서 우승한 진병환씨(44·서울시청)는 설경이 아름다웠다며 "민간 차원에서 성사된 이번 마라톤 대회가 통일의 한 시발점이 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대회 운영을 책임진 선주성 사장은 "북측 선수들을 초청해, 마라톤을 사랑하는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뛰기를 바랐는데, 이루지 못했다"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대회를 부상자 없이 끝마친 것만 해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자평이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한 참가자는 "앞으로는 남쪽 간성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쪽 금강산에 이르는 코스를 달려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마라토너들은 말한다.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바퀴가 가는 길은 길이 아니다, 오직 두 발로 달리는 길만이 길이다'라고. 그 길이 '사람의 길'이며 '자기 자신의 길'이라고. 폭설 경보가 내린 금강산에서 열린 '제1회' 단축 마라톤대회는 작지만 의미 있는 첫 발자국을 남겼다. 북녘 금강산 자락에 '남녘 사람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