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태극기 위에서 고종수가 뛰네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5.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상과 현실 혼합한 '증강 현실' 기법 각광…
TV·영화·게임·의료 등 활용 분야 무한대


서울 시내 덕수궁을 탐방해 보자. 대한문을 거쳐 궁 안으로 들어서면 중화전·함녕전·덕홍전·석조전 등 여러 건축물을 만난다. 저마다 쓰임새와 건축 양식과 얽힌 역사가 다르건만 사전 지식이 없는 탐방객 눈에는 '그 놈이 그 놈'인 옛 건축물일 뿐이다. 물론 건축물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한 안내판이 있지만, 그야말로 '최소한의 정보'일 뿐이다.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AR) 기법을 이용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안내서를 뒤지며 덕수궁에 대해 미리 공부하거나 안내판을 찾을 필요가 없다. 증강 현실 헤드 셋을 착용한 탐방객이 중화전을 바라보면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서 단아한 멋이 특징이다. 중화전 내부의 일월오악병풍은 1897년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따위 설명이 눈앞에 펼쳐지거나, 귀에 들린다.


증강 현실이란 가상 현실과 현실의 경계로, 실제 눈에 보이는 영상에 가상 데이터를 인위적으로 덧붙여 표시하는 기술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김주완 선임연구원(증강현실연구팀)은 "컴퓨터 그래픽에 의존한 가상 현실 기술만으로 진짜 같은 현장감을 조성하기가 어려워지자, 그 대안으로 가상과 현실을 혼합한 증강 현실 기법이 등장했다"라고 설명했다. 증강 현실은 가상 현실이 적용되는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할 수 있는 데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기술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다. 1994년 SF 소설가 윌리엄 깁슨이 사이버펑크 소설 〈버추얼 라이트〉에서 증강 현실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교한 수술과 복잡한 제조 작업에 큰 도움


증강 현실이라는 단어는 낯설지만, 이 기술은 이미 현실에 들어와 있다.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경우가 영화. 폭풍과 싸우는 어부 이야기를 다룬 〈퍼펙트 스톰〉에는 배우가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리는 장면이 나온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파도(가상 영상) 위에 배우(실제)를 결합해 주인공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증강 현실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서울시 남산 타워에서도 증강 현실 기술을 만날 수 있다. 남산 타워에는 관악산이라고 쓰인 창문이 있다. 이 창문 밖으로는 관악산이 보인다. 창문 위에 새긴 글자와 실제 관악산이 겹쳐 마치 관악산 봉우리에 산 이름을 적어 놓은 듯하다.


종종 안방에도 증강 현실 기법이 들어온다. 〈역사 스페셜〉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래픽으로 만든 가상 공간에 현실 세계의 아나운서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에는 이보다 좀더 정교하게 발전된 증강 현실이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추세이다. 지난 시드니올림픽 야구 중계 방송을 떠올려 보자. 한국과 일본의 3, 4위전 경기 도중에 운동장 위로 한국과 일본의 국기가 나타나면서 양측 점수가 표시되었다. 운동장에 국기를 그려놓은 것이 아닌데도, 선수들은 국기가 그려진 운동장 위를 뛰는 것처럼 보였다. 최근에는 축구 경기 중계에서도 이 기법을 많이 이용한다. 한국에서 이 기법을 처음 시도한 에이알비전(주) 이영민 사장은 "중계 카메라에 데이터를 삽입해 선수의 움직임을 훼손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증강 현실의 장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 기법을 이용한 가상광고 시스템이 각광받고 있다. 스포츠 경기 중간중간에 광고 그래픽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운동장에 광고 메시지가 새겨진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 것이다.


증강 현실 기술을 가장 활발하게 연구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다. 그들은 증강 현실 기법을 제조·의료·게임·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휴스 연구소는 증강 현실 안경을 처음 개발했다. 이 안경은 눈에 보이는 실제 환경에 가상 데이터를 덧붙여 표시한다. 컴퓨터에서 생성된 이미지와 텍스트 정보가 무선 통신으로 전달되어 안경 렌즈(모니터)에 표시된다. 가상 현실에서 사용하는 헤드 셋은 모니터 역할을 할 뿐이지만, 증강 현실에서 사용되는 헤드 셋은 실제 사물을 보는 안경과 가상 데이터를 보는 모니터 역할을 겸한다. 엑스랩이 최근 선보인 헤드 셋은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 확인 시스템(GPS) 칩을 장착해 사용자가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캄캄한 밤에 적진에 침투한 병사가 이 헤드 셋을 끼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물론 적의 위치까지 찾아낼 수 있다. 등산객이나 여행객을 위한 시스템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훼이너 교수도 여행객을 위한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우선 학교 캠퍼스를 안내해 주는 '투어링 머신'을 고안했다. 몸에 착용하는 투어링 머신은 GPS를 이용해 사용자 위치를 파악하고, 학교 안내 책자처럼 캠퍼스 곳곳의 정보를 현장에서 전달한다.


의료 분야 응용 시스템을 연구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차펠 힐 연구팀은 복강경 수술 등에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시험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MRI·CT·초음파 등의 센서를 통해 환자에 대한 3차원 데이터를 수집한 뒤, 수술할 때 그 정보를 환자의 환부에 중첩하여 표시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이 시스템을 사용하면 수술할 때 쓸데없이 많은 부위를 절개하지 않고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정교하게 수술할 수 있다.


미국 보잉 사는 항공기 제작 과정에 증강 현실 기술을 실험적으로 이용한다. 증강 현실 기술은 복잡한 기계를 조립하거나 전선을 정확하게 연결하는 데 효과적이다. 항공기의 혈관 역할을 하는 전선을 조립하려면 수많은 선의 쓰임새와 연결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숙련공조차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각 전선의 역할이나 연결 위치를 미리 입력한 정보가 헤드셋 모니터에 표시되면,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증강 현실 기법을 게임에 응용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한 기업은 게임 중에 상대방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마그네틱 센서와 CCD 카메라가 부착된 헤드 셋을 쓰고 자기 센서를 단 장갑을 끼면 상대방을 보면서 게임을 할 수 있다. 가상 현실 게임에서는 그래픽 처리한 아바타(분신)를 이용하지만, 증강 현실 게임에서는 게임 참여자가 직접 게임 속으로 뛰어든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3∼5년 안에 증강 현실 일상화 가능




미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은 증강 현실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증강 현실 벤처 기업인 에이알비전(주) 등 일부에서만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증강현실연구팀은 민·군 겸용 기술로 헬기용 증강 현실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는 실제 영상 위로 위치나 목표물 정보가 나타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또 자동차 앞유리창이 모니터 구실을 하게 만듦으로써 운전을 하면서 거리 정보를 알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할 계획이다. 낯선 거리를 운전하더라도 자동차 앞유리창을 통해 위치나 건물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 목표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에이알비전은 가상 광고 시스템을 이용해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 증강 현실 기법을 적극 도입할 계획이다.


가상 현실에 비해 증강 현실 구현이 쉽고 싸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현재 개발된 헤드 셋 제품은, 빛이 드는 곳에서 텔레비전 모니터가 선명하지 않은 것처럼 햇빛이 강할 때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또 모니터가 엄청난 양의 전력을 소모해 대중화하기에는 여전히 경제적이지 않다. 그러나 최근 관련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어, 이 분야 전문가들은 앞으로 3∼5년 안에 싸고 현장감 높은 증강 현실 제품이 쏟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김동현 교수(세종대·디지털 컨텐츠학과)는 "최근 실제 영상과 그래픽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상 합성 기술이 세련되고 있다. 머지 않아 증강 현실을 이용한 진짜 같은 환경을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