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청산은 역사가들이 해야 옳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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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서울대 교수
이영훈 교수(53·서울대 경제학)가 요즘 부쩍 언론을 자주 탄다. 방송 토론에 나와 ‘조선총독부는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발언으로 설화를 당했던 그가, 이번에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쌀을 수탈했다는 국사 교과서 서술은 잘못이다’라고 주장해 또다시 파문을 일으켰다. 11월19일 서울에서 ‘한·일 새로운 미래 구상을 위하여’란 제목으로 열린 ‘한·일, 연대21’ 발족 심포지엄 자리에 참석한 그는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모임에는 최원식·김 철·이영훈 교수와 고모리 요이치(小林陽一) 도쿄 대학 교수 등 한·일 양국의 탈민족주의·민족주의 좌파 성향 학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수구 꼴통이다’ ‘일본의 극우파나 하는 주장이다’. 그의 발언을 접한 일부의 반응을 종합하면 그렇다. 하지만 그는 수구나 극우와 거리가 멀다. 그는 이른바 ‘안병직 사단’의 적자로서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안병직 사단은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를 필두로 1980년대 진보 학계의 한 축을 형성했던 경제사학자들을 일컫는 용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국내의 소장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등 일본의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들과 함께 구한말부터 최근까지의 한국 경제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여 년 동안 ‘답사와 연구’에만 진력하던 중견 학자가 갑자기 다분히 의도와 확신을 가지고 사회적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시사저널>은 인터뷰를 통해 파편적으로만 전해진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차분히 들어보았다. 11월25일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한 방에서 그를 만났다.

 
국사 교과서 59종을 검토한 논문에 ‘집단 기억에 의한 민족 설화’라는 표현까지 썼는데, 국사 교과서의 내용이 그토록 심각한가?


한 민족의 집단 기억이라는 것 중에는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생겨난 것이 많다. 그것도 몇몇 역사가들의 임의적인 역사 쓰기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일본의 검인정 교과서가 개정될 때마다 사실 왜곡에 대해 항의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우리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엄격한 시각과 이해가 필요하다.

교과서에서 토지 수탈 사례로 드는 토지조사사업은 어떤 것이었나?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첫 사업으로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당시 총독부 2년 재정에 해당하는 비용을 특별 회계로 잡아놓고 1918년까지 진행했다.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소유권자를 조사했다.

국사 교과서에는 ‘당시 농민들이 행정 절차에 미숙하고 소유권 의식이 없어서 절반 가량의 토지를 신고하지 않았고, 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를 국유지로 빼앗아 일본인에게 헐값에 불하해서 우리 나라 농지의 40%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우리 조상을 소유권 개념도 모르는 문맹자로 기술하는 것이야말로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는 짓이다. 당시 우리 농민의 소유권 의식은 매우 높았다. 신고율이 99.5%였다. 교과서의 서술은 실증 근거가 없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안 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취득한 토지는 얼마나 되나?

토지조사사업 결과 전국에서 4백80만 정보의 논밭이 집계되었는데, 국유지는 그 중 12만 정보(2.5%) 정도다. 그 국유지도 사업이 끝나고 1924년까지 연고 소작인, 즉 조선인에게 법정 가격으로 불하되었다. 당초 총독부는 일본인의 대량 이주를 계획했지만, 1910년대 일본의 대호황으로 일본에서도 노동력이 부족해 조선으로 이민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고, 국유지를 일본인에게 불하하려는 계획도 흐지부지되었다. 대신 1940년까지 낙동강 하구나 전북 일대 평야에 진출한 일본인 대지주들이 있다. 이들이 차지한 논밭이 전국토의 10%쯤 되는데, 하구나 연안에 분포한 저습지를 헐값에 매집하거나 개간한 땅이다. 엄밀하게 수탈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국사학자들은 사업 이후 다수의 토지 분쟁 소송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일제는 땅이나 빼앗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한반도 전체를 일본 영토로 영구 병합하기 위한 백년대계를 가지고 일본과 동일한 근대적 소유 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벌인 것이다. 또 분쟁을 일으킨 사람 대부분은 농촌 지주나 실력가, 일찍 진출한 일본인 지주들이었다. 강화도 교동땅 분쟁자 명단에는 이완용의 이름도 있다.

일제의 수탈을 논할 때 흔히 거론하는 것이 토지와 함께 식량 수탈이다. ‘일제는 공업화 추진에 따라 부족한 식량을 우리 나라에서 수탈했고, 쌀 생산량의 40%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우리 농촌 경제가 파탄에 빠졌다’는 게 교과서 내용이다.

수탈의 사전적 의미는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식량 수탈은 없었다. 식량 수탈이라는 것 또한 일제의 통치 메커니즘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일제는 조선에 근대적 소유 제도를 만든 뒤 1920년대부터 일본과 조선의 시장을 통합했다. 요새 말로 하면 관세가 철폐된 완벽한 자유무역시장이 탄생한 셈이었다. 이렇게 되자 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 수입으로 장악한 한반도의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이 쌀값이 30% 정도 비싸면서 쌀 부족 현상을 겪던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었다는 말인가?

당시 말로는 ‘이출’이라 했다. 그런 메커니즘을 수탈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경제학자니까 시장 거래로 나타난 현상을 수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는 그런 메커니즘을 전혀 서술하지 않고 ‘수탈·약탈’로만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학생뿐 아니라 이 플로어(경제학부 교수실이 자리한 서울대 사회과학관 6층)에 있는 교수들도 대부분 일제가 강제로 쌀을 빼앗아갔다고 알고 있다. 사실을 왜곡하는 거다. 만약 그랬으면 사람들이 굶어 죽어야 하는데 식민지 기간에 인구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수출 대금의 일부는 만주에서 대용 식품을 수입하는 데 쓰였고, 나머지는 자본으로 축적되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식민지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윤치호 일기>를 보면 일제의 경제 정책과 민족 차별 정책에 분개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윤치호 같은 친일 지식인이 보기에도 일제의 차별이 심했다는 말인데….

물론이다. 일제 시대는 기본적으로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식민지 체제였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일제 시대도 근대적인 시장 메커니즘과 법치나 관료제가 작용하던 사회였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는 차별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강력한 동화정책을 택했던 게 일본의 통치 방식이었다. 조선인 임금이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것이 수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차별이지 수탈이 아니다.

 
총체적인 시각에서 제국주의 수탈 체제였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가령 인도의 면화 100만 파운드가 영국으로 갔는데 영국이 이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런던 은행에 저축으로 쌓아놓았다가 전쟁 중에 떼어먹었다면 수탈이다. 타이완과 일본의 경우도 그렇다. 식민지 시기 타이완은 사탕 공업이 발달해서 타이완 총독부 재정이 흑자였다. 타이완 총독부는 재정 잉여분을 본국에 송금했고, 그 돈은 일본의 재정 수입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게 국제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탈이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은 반대였다. 조선이 일본에 100원어치 쌀을 수출했다면, 각종 기계를 비롯한 일본의 자본은 200원어치 정도 조선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한반도 내에서 일본의 소유권이 증대하면서 한반도의 경제 규모도 커졌다. 조선은 전형적인 식민지라기보다는, 일본이 한국을 영구 병합하기 위해 초기 투자를 하다가 패전하면서 중단되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이것을 역사 속에서 벌어진 신의 변덕이라고 부른다.

식민지를 너무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식민지를 미화하지도, 근대화가 되어 좋아졌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문명 사회의 충돌과 접합 과정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자국의 식민지 경험을 어떻게 서술하고 교육해야 하는가는 수탈 여부와 별개로 국사 서술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국사는 어떻게 쓰고 교육해야 한다고 보는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나는 경제사가이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그 문제는 경제사를 초월하는 종합적인 문제인데, 민족적인 집단 자존심의 상처가 크기 때문에, 더 세월이 지나야 할 것이다. 다만 식민지 역사를 민족 단위만이 아닌 문명사의 발전 과정으로 바라봐야만 한국인이 아픈 경험을 소화하고 살아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방송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동원되지 않았다’고 했다가 설화를 당했는데….

위안부와 정신대는 서로 다른 것이다. 정신대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여성 노동 동원 체제다. 일제는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을 발동하여 12~40세 미혼 여성을 산업 현장에 강제 동원했다. 반면 위안부는 그 전부터 일본군 주둔지에서 발생한 여성들의 성 착취 제도다. 대부분 민간업자에게 위탁 경영되었고, 일본군과 총독부가 알선과 도항증 발급 등으로 적극 협조했지만 위안부 모집은 위안소 경영주나 그 대리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국민의 머리 속에 ‘정신대=위안부’로 박혀 있다. 국사 교과서가 그렇게 교육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정신대라는 공적 권력을 행사해 여성을 동원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국민적 인식이 성립한 상태에서 내가 텔레비전에 나가 위안부와 정신대는 서로 다른데 상대방이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인데, 그만 국민적 분노가 일어났던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과거 청산 움직임을 어떻게 보나?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를 비난하고 있지만 독일인에게서 나치즘은 아직 진정으로 청산되지 않고 있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권을 프랑스인이 청산했다지만 결코 청산된 것이 아니다. 무리한 청산은 사회적 갈등을 가져온다. 청산의 주체는 역사가들이어야 한다.

경제학자이자 역사가로서 역사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역사는 과거다. 망자에 대한 기억으로 살아 있는 자를 지배하는 사회는 중세 사회다. 근대 역사는 망자의 영으로부터 인간들이 해방된 사회다. 설명되고 해명되지 않는 모든 것은 신화다. 그게 근대인의 기본 사고방식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느냐? 과거 사람들의 분쟁과 협동을 보면서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조성되어야 하는가를 성찰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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