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 게 섰거라”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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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TV의 약진이 눈부시다. 출범 10년 만에 총매출액과 시청률이 지상파 방송과 맞먹거나 이미 추월했을 정도다. 제5의 미디어로 떠오른 케이블TV의 좌표를 점검하고 전망한다.

 
10년 전, 국내에 케이블TV 서비스가 시작될 때의 열풍은 대단했다. 치열한 각축전 끝에 28개의 프로그램 공급 업체(PP)가 선정되었고,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아 많은 방송 인력이 케이블TV로 엑소더스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엘도라도가 아니었다. 가입자 수는 쉬 늘지 않았고 케이블 거품은 금새 사그라들었다. 수신료와 광고료는 제작비를 대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까지 닥치면서 피의 구조 조정이 단행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케이블TV 업체들은 2000년대 들어서야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방송망 운영 업체(SO)들이 서비스 요금을 낮추면서 가입자가 빠르게 증가했다. 2004년 12월 기준으로 가입 가구 수가 1천2백90만 가구에 이르렀는데, 이는 지상파 가시청 가구의 74.2%를 차지하는 규모다.

가입자가 증가하면서 케이블TV는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지난해 케이블TV의 총매출액 규모는 3조4천억원(홈쇼핑 판매액 제외)으로 지상파와 견줄 만큼 성장했다. 전체 자산 규모에서는 이미 지상파를 뛰어넘었다. 28개였던 프로그램 공급업체는 설립 요건이 승인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2백4개로 증가했다. 

시청률 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초기에 ‘케이블TV 전체 시청률을 합쳐도 EBS 시청률에도 못미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이제 시청 점유율이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신문 방송 잡지 라디오와 함께 5대 매체로 떠오른 케이블TV를 이제 아무도 ‘마이너 리그’라고 무시하지 못한다.

내용 면에서는 이미 지상파 방송을 뛰어넘는 분야도 나타나고 있다. 지상파 방송의 주력군인 드라마, 쇼 오락 프로그램, 메인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아직 턱없이 못미치지만 방계 장르에서는 케이블TV 프로그램 공급 업체들이 지상파 방송사를 각개격파하고 있다.

지상파에서 케이블TV로 헤게모니 이동이 가장 선명한 장르는 바로 어린이 프로그램이다. 투니버스·재능방송·애니원을 비롯한 어린이 채널들은 TV애니메이션을 무기로 어린이들의 시선을 붙들어 매고 있다. 케이블TV 시청률 1위인 투니버스는 어린이 시간대(오후 4~7시) 시청률이 지상파 채널을 능가하고 있다.

영화 채널 역시 케이블TV 업체들이 아성을 쌓아가고 있는 장르다. OCN과 홈CGV는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콘텐츠 공급력을 바탕으로 지상파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인 주말의 명화를 무력화했다. 케이블TV 영화 채널들은 동네 비디오 대여점까지 흔들며 영화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YTN은 ‘라이브 뉴스’에서 방송 3사를 능가하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MBN과 한경와우TV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끝내 정착시키지 못한 경제 뉴스를 정착시키며 전문 경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스포츠 중계에서도 케이블TV의 약진은 눈부시다. 특히 Xports는 메이저 리그 중계권을 독점함으로써 지상파 3사를 ‘왕따’시켰다.

“홈쇼핑은 해가 지지 않는 채널”

지상파 방송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 꾸준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운데 케이블 TV 대중 음악 방송은 이제 대중 음악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업계 1위인 Mnet은 연예 뉴스로까지 확장하고 있고, 국내 최장수 음악 프로그램인 <쇼 뮤직탱크>를 제작하고 있는 KMtv는 Mnet의 모회사인 CJ미디어에 편입되면서 상승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대중 음악 평론가 임진모씨는 “케이블TV 음악 방송으로 인해 본격적인 뮤직 비디오 시대가 열렸다. 대중 음악 콘텐츠의 거대한 저장고가 생긴 것도 큰 공이다”라고 평가했다. 

세계 최초의 게임 전문 방송인 온게임넷은 케이블TV 10년사가 낳은 최고의 쾌거로 꼽힌다. 투니버스의 게임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게임 전문 채널로 독립한 온게임넷은 국내 온라인 게임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e스포츠를 정착시킨 온게임넷은 프로 게임리그를 통해 임요환·홍진호·박정석·이윤열 같은 스타 게이머를 배출했다. 주요 경기에 10만여 관객이 운집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는 온게임넷의 게임리그는 올해 MBC게임의 게임리그와 통합해 'SKY 프로리그 2005'로 거듭났다.   

온스타일·동아TV·GTV 등 여성 채널도 젊은 여성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들며 트렌드 메이커로 떠오르고 있다. CJ·GS·현대·우리·농수산 등 홈쇼핑도 막대한 수익을 거두며 ‘해가 지지 않는 채널’이 되었다. 홈쇼핑 채널의 매출을 합치면 케이블TV 업계의 전체 매출은 지상파 방송사를 뛰어넘는다.

케이블TV 강점은 채널충성도 높은 시청자

케이블TV 프로그램 공급 업체 중 성공한 곳의 공통점은 지상파 방송사와 다른 케이블TV만의 특성을 살려냈다는 점이다. 이런 채널에는 충성도 높은 시청자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케이블TV의 힘이다. 제일기획 미디어전략연구소 이현정 차장은 “케이블TV는 타깃 미디어다. 타깃에 맞춰서 방송과 광고를 내면 효과가 극대화한다”라고 분석했다.

타깃 시청자를 거느리고 있는 채널들은 충성도 높은 시청자와 함께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해낸다. ‘프라이드’ ‘K-1’ 등으로 인한 이종격투기 신드롬과 <포켓몬> <디지몬> 등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은 모두 케이블TV에서 발원한 것이다. <프렌즈> <섹스 앤드 더 시티>와 같은 외국 시트콤, <서바이버>와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케이블 TV를 통해 들어왔다.

방송 제작 수준도 높아져서 이제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케이블TV 프로그램을 베끼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케이블TV는 스타 사관학교 구실도 하고 있다. 하하·MC몽·서민정 등은 모두 케이블 채널에서 연예인으로서 훈련을 쌓은 후 지상파 방송사로 진출했다.  

케이블TV는 한류 전파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Mnet의 음악 프로그램과 연예 뉴스가 아시아 각국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온라인 게임 강국의 후광을 업은 온게임넷의 게임 프로그램과 바둑 강국의 프리미엄을 바탕으로 한 바둑TV의 바둑 중계 방송 역시 아시아 각국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케이블TV가 성장하자 KBS·MBC·SBS 지상파 3사도 자회사를 설립해 케이블에 진출했다. 주로 드라마 채널과 스포츠 채널을 신설했는데, 막강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빠르게 케이블TV의 강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미 지상파를 통해 방영한 프로그램을 재방송하는 경우가 많아 비난을 듣고 있기도 하다.

지상파 방송사의 진출로 춘추전국시대가 되었지만,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 업체의 강자는 온미디어와 CJ미디어다. 케이블 업계의 대표적인 라이벌 기업인 두 기업은 서로 경쟁하며 지상파 방송사에 필적할 만큼의 거대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다(관련 기사 참조).

온미디어의 이영균 홍보팀장은 “온미디어는 지난해 1천7백5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SBS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인데, 성장 속도가 가파르기 때문에 곧 지상파 방송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체 제작 능력 약한 것이 최대 약점

케이블TV 발전을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도 쌓여 있다. 지상파 방송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광고료도 현실화해야 하고, 방송망 운영업체로부터 받는 수신료도 현실화해야 한다. 프로그램의 질도 문제다. 케이블TV방송협회 정하웅 국장은 “승인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프로그램 공급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 폐품 수준의 외국 프로그램을 덤핑으로 들여와 방영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자체 제작 능력이 지상파 방송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케이블TV 발전에 큰 걸림돌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많은 케이블TV 프로그램 공급 업체들이 제작 인력을 구조 조정해 제작 능력이 아예 없는 곳이 많다.

지상파 방송사 프로그램을 단순히 재방송하는 채널이 시청률 상위를 차지하고 있고, 투니버스·OCN·홈CGV 등 시청률 상위 채널들이 대부분 자체 제작 능력 없이 콘텐츠를 사들여 방영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케이블TV의 발전이 ‘외화내빈’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디지털 케이블TV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설립 10년째를 맞은 케이블TV는 지금 제2의 도약기를 맞이했다. 힘들게 마련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케이블TV 프로그램 공급 업체들이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하웅 국장은 “지금까지는 싼값에 프로그램을 들여와 비싼 값을 받고 방영하는 채널이 재미를 봤지만, 앞으로는 자체 콘텐츠 제작 능력이 있는 채널이 우위에 설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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