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착한 간판’들
  • 윤준호(카피라이터,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교수) ()
  • 승인 200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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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는 간판이 유난히 큰 상점이 하나 있다. 아니, 크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하다. 거대하다. 가게 전체가 대문짝만한 글씨로 덮여 있다. 덕분에, 그 옆의 슈퍼마켓과 은행 간판은 아주 왜소해 보인다. 그 위압적인 간판을 볼 때면 나는 저 통일전망대에서 건너다보이는 북한의 선전 간판--‘미군철거’ 또는 ‘오라 평양’…이 떠오른다. 

물론 그것은 우리 동네 욕심 많은 상점 주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침 산책길에 두리번거리며 걸어보니, 그런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전철 정거장 이름표가 한없이 작아 보인다. 출근길에 보니, 순환도로 톨게이트 지붕 높이 걸린 지명(地名) 표지판보다 커다란 간판도 하나둘이 아니다. 소리를 지르다 못해, 악을 쓰는 간판들.

나는 궁금하다. ‘간판이 크면 손님도 많은 걸까?’ ‘저렇게 경쟁적으로 글씨를 키워야만 장사가 되는 걸까?’ ‘‘부동산’이나 ‘헬스’, ‘안마’ ‘여관’은 꼭 저렇게 커야 하는 걸까? 하나같이 고딕체 일색으로!’ 

며칠 전, 새로운 시대를 만난 청계천을 거닐다가 우리네 간판 문화에 대한 낙관적 희망의 단서를 보았다. ‘함양서점’ ‘대성스포츠’ ‘삼흥금속’ ‘수구모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상호들이 활짝 열린 물길을 향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퍽 세련된 글꼴로 보기 좋게 짜인 간판들이 예전의 청계천 상가가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관청이 주도한 일이라도 좋고, 상인들의 자발적 의기투합의 결과라고 해도 좋다. 어쨌거나 놀라운 변혁이다. 없는 것이 없을 만큼 잡다한 종류의 물건들과 다양한 부류의 상점들로 1년 3백65일이 뜨거운 곳이 저렇게 슬기로운 합의를 이루어냈다니! 빨간 바탕의 간판을 달고 싶은 상점, 취급 품목을 대문짝만하게 써 붙이고 싶은 점포가 왜 없었으랴. 대낮에도 번쩍번쩍 빙글빙글 돌아가는 네온사인을 고집하는 상인들은 어찌 없었으랴.

청계천은 참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의 순리(順理)만이 아니라 이 땅 곳곳으로 퍼져나가도 좋을 바람직한 시각 언어의 순리까지를 일러주고 있다. 혼자서만 외치고 떠드는 간판이 아니라 전체가 한 줄기로 모여서 빛나는 것일 때, 상점의 품격과 가치 또한 더불어 높아지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경계해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그 아름다운 통일이 자칫 천편일률의 몰개성으로 고착되거나 게으른 관리들의 전시 행정을 돕는 편의의 수단이 된다면 딱한 일일 것이다. 답답한 통제의 잣대가 가게 주인들의 상상력을 막아서도 안 될 것이요, 규제의 칼이나 가위가 엉뚱한 부작용을 낳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자발적인 통일이 주는 아름다움

아무려나, 자신의 가게를 한 지역의 자랑스러운 주인공으로 만들려면 조연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소문난 상점이라 하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리는 길목에 위치한다면 누가 그곳을 찾아오겠는가. 아무리 매력적인 찻집이라도, 그 집이 불유쾌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면 누가 가고 싶어지겠는가.  

비유컨대, 도시 풍경은 독사진이 아니라 단체 사진이다. 주인공과 조연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저 혼자 멋지게 나와 보았자, 친구들의 표정과 배경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사진은 오래 간직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사진들이, 오로지 배경이나 함께 찍은 사람을 이유로 버려지기도 하고 남겨지기도 하는지. 

큰 글씨라고 눈에 잘 띄는 것은 아니다. 작은 글씨라도 여백이 많으면 크게 보인다. 진정으로 잘 읽히는 간판을 만들고 싶다면 많은 부분을 과감히 비울 일이다. 간판의 크기를 줄이면 문이 넓어진다. 건물이 커진다. 거리에 여백이 많아진다. 

여백이 많아지면, 길모퉁이 구멍가게 ‘담배’표지도 ‘서울역’만하게 보일 것이다. 여백이 많은 도시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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