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안티 노무현' 선봉에 서나?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5.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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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각 세울듯... 하지만 금도를 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

“큰일났다.”요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지난 11월8일 정세균 의장을 비롯한 비상집행위원들이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여러분이 나의 정치적 계승자다” “전통적 지지세력을 복원하기 위해 애써 달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가뜩이나 호남에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열린우리당에는 사막의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였다. 호남 민심에 여전히 영향력이 막강한 김 전 대통령이 호남 패권을 둘러싼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간 샅바싸움에서 열린우리당 편을 드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민주당은 긴급 의원모임을 열어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한다면 내년 지방 선거 전에라도 정계 개편을 논의해볼 수 있다’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비록 조건을 달긴 했지만, 그동안 워낙 완강하게 합당 반대를 외치던 민주당이 틈새를 보임에 따라 양당간 통합 논의도 잘하면 급물살을 탈 조짐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두 가지 사건이 상황을 180° 바꾸어 놓았다. 하나는 11월14일에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남이다. 이 날 만찬에서 노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지도부에게 ‘창당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발언은 곧 지역주의 회귀 반대, 나아가 민주당과의 통합 반대로 해석되었다. 한마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합 의지에 노대통령이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러나 결정타는 그 다음날 진행된 임동원·신 건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구속 집행이다. 지난 여름 “DJ 정부 시절에도 불법 도·감청이 있었다”라는 김승규 국정원장의 발표 때부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측은 검찰 수사가 설마 두 전직 원장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해 여권에 전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불법 도·감청의 최대 피해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지에서 보면, 자신의 재임 시절에도 불법 도·감청이 자행되었다는 검찰 수사 내용을 믿기 어려웠을 뿐더러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1월14일 두 전직 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동교동측은 “국민의정부는 도청팀을 구조 조정하고 파괴했는데 현정부가 어떻게 이런 무모하고 무도한 일을 할 수가 있느냐”라며 현정부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어떻게든 영장 발부를 막아보자는 절박감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끝내 두 사람이 구속되면서 김 전 대통령측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11월16일 한화갑 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드는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교동측의 반발이 예상 외로 강하게 나오자 정가에서는 이번 일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참여정부 초기 대북송금 특검으로 등을 돌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측이 겨우 마음을 돌리려던 판에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져, 이제는 양측이 더 화해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가에서는 특히 청와대가 김 전 대통령측과 잘해 볼 의지가 별로 없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청와대는 두 전직 원장에 대해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였다. 불법 도청의 원조들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데, 두 사람에게 구속영장까지 청구한 것은 형평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지난 10월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도청 사건을 보면서 공소시효가 지난 사람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막상 구속이 집행된 후로는 청와대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노대통령 참모들 사이에서는 ‘검찰과 법원이 하는 일을 청와대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얘기만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동교동은 물론 열린우리당에서조차 불만이 터져 나온다.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강정구 교수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지휘한 것처럼 얼마든지 ‘성의’를 보일 수 있는데도 청와대가 ‘원칙’을 앞세워 검찰의 전횡을 방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화살을 청와대 참모들에게 돌렸다. 그는 “노대통령이 만찬석상에서 창당 초심을 언급한 것도 당시 문맥으로 보면 민주당과의 통합을 적극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청와대 참모들이 그렇게 해석해서 언론에 설명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 악화하고 있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처럼 청와대가 데면데면한 마당에 김대중 전 대통령측이 ‘작심’할 경우 양측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은 최근 한 여권 인사에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금도를 넘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얘기는 여차하면 남아 있는 모든 정치력을 동원해 현직 대통령과 각을 세울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극단적인 경우 김 전 대통령이 앞장서서 안티 노무현을 선동하고 그것이 열린우리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여권이 분열할 경우 정국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이 얘기는 김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전하라고 여권 고위 인사에게 했다. 하지만 파장을 우려해 이 인사가 청와대에 전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실제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게 되면 김 전 대통령이 절실하게 ‘복원’되기를 바라고 있는 여권의 지지층은 정반대로 두 동강이 나고 그만큼 민주평화개혁세력의 정권 재창출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인권 대통령’,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을 탄 대통령’이라는 명성에 오점이 남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라도 김 전대통령측이 상당 기간 청와대와 각을 세우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내년 2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와 5월의 지방 선거, 나아가 차기 대선에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와 동교동의 틈바구니에서 등이 터질 지경인 열린우리당이 부랴부랴 검찰 쪽에 화살을 돌리고,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는 쪽으로 법안을 내고,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려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변호에 나서기로 한 것 등도 김 전 대통령측의 진노를 하루라도 빨리 가라앉히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다. 

“우리도 물 먹고 있다”는 청와대와 “이중 플레이 하지 말라”는 전직 대통령,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울고 웃는 여야 정치권의 모습은 2005년 대한민국이 ‘검찰 공화국’임을 새삼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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