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려 한 아름다운 열정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6.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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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조영래 인물 평전>/‘투사’였던 지성인의 삶 추적, 다른 사람이 주목 못한 인권 변호사의 면모 밝혀

 
대입 제도가 지금과 달랐던 시절, 인문계 전국 수석은 예외 없이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언론 인터뷰에서 수석 합격자는 이런 포부를 밝히곤 했다. ‘법조계로 진출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약자를 돕겠다.’ 그런 포부를 실천한 수석 입학생은 얼마나 될까? 1965년 1월31일 서울의 모든 일간지가 서울대 신입생 2천3백5명의 명단을 실은 호외를 발간했다. 전체 수석 합격자 조영래의 이름은 특호 활자로 적혀 있었다. 더구나 사상 최고 점수라는 비공식 주장이 나올 정도로 고득점을 한 수석 합격생 조영래는 전국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수석 입학생의 대학 시절은 전형적인 고시생의 삶이 아니었다. 법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투쟁, 삼선개헌 반대 투쟁 등을 주도했고, 졸업 후에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고 전태일 정신의 계승을 위해 노력했다. 1971년 사법연수원 연수 중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1년 반 동안 투옥되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1980년 복권 후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해 1983년부터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망원동 수재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등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아름다운 열정’을 실천한 그는 1990년 12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쓴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1983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저자 이름으로 삼아 출간되었고, 개정판에서야 조영래라는 저자와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다. 이제 그의 법대 1년 후배 안경환 교수(서울대)는 ‘그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았던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삶과 떠남은 그냥 흘려버릴 일이 아니기에’ <조영래 평전>을 집필했다. 한 인물의 삶의 궤적과 시대 배경을 씨줄 삼아 자세히 담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평전과 마찬가지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조영래의 면모를 밝혀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조영래는 1980년대를 마감하면서 과학기술 시대의 도래를 강조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 세계를 점점 더 좁은 곳으로 만들고 인류를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몰아 넣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생활의 모든 방면에 모여 각 나라 사이의 단절과 이질성을 유지하여 온 장벽으로서의 국경의 의미가 과거에 비하여 현격하게 엷어져 가고 있다.’

평전으로서 ‘매우 우수’하지는 않지만…

조영래는 미국을 어떻게 사고했을까? ‘시카고 지하철에서의 음울한, 숨막히는, 폭발할 듯한 살벌한 분위기의 미국. 뉴욕의 고층 빌딩들은 인간 문명의 가장 어리석은, 그러면서도 누구도 막기 어려운 거대한 무게를 지닌 힘.’ (1983년 1월 30일)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이 인류 문명사에서 하나의 기형이자 큰 어리석음이라는 통찰이라고 할까. 

조영래가 ‘전기’(前期) 조갑제(현 <월간 조선> 편집위원)와 1985년부터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았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영래는 1986년에 조갑제의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에 대한 서평을 쓰기도 했다. 조갑제는 조영래를 ‘재사·전략가·전술가·투사·운동가’로 보는 시각이 적절치 않다고 말하면서 ‘겸손·신중·균형 감각의 덕목을 갖춘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 폭넓은 교양, 진지한 설득의 자세 때문에 공격당하는 사람도 사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조영래가 1969년 대학원에 진학해 준비한 석사 논문 주제이자 제목이 ‘노동 계약의 효력에 관한 연구’라는 점도 범상치 않다. 그는 1980년 복권이 되어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함과 동시에 대학원에도 복학해 12년 만에 ‘공해 소송에 있어서의 인과 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를 논문으로 졸업했다. 이 두 편의 석사 논문은 그 시기로 볼 때 단연 시대를 앞서나간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거의 마무리지었던 첫 논문의 초고가 산일되어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평전으로서의 완성도 측면에서 이 책에 ‘매우 우수함’이라는 점수를 주기는 곤란하다. 조영래라는 한 인간과 시대의 삼투를 밀도 있게 그려냈는지는 의문이다. 저자 자신도 ‘시대적 사건과 주인공의 역정을 직접 결합시키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조영래)와 필자의 시대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를 주된 독자로 삼았다’는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수한’ 평전임에 틀림없다. 머리말 마지막 부분의 말이 긴 여운으로 다가온다. ‘격동의 역사에 분별있는 열정의 삶을 살다 간 지성인.’ 분별있는 열정이란 그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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