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수산 마피아’ 부산의 그늘 접수하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6.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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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극동 조직, 1천5백억원대 이권 놓고 ‘전쟁’

 
발 아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 영도구의 ‘ㅂ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3년째 말 못할 불안에 시달려왔다. 2003년 4월17일 이곳 아파트 1층 현관에서 러시아 마피아 두목 나우모프가 권총 저격을 받아 피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마피아 총격 사건은 수사 결과 경쟁 마피아 조직원에 의한 국제 범죄로 드러난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갔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에게 마피아의 악몽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사건 이후에도 나우모프가 사망한 바로 그 동 902호의 전망 좋은 방에는 최근까지 정체 불명의 러시아인들이 무리를 지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왜 하필 우리 아파트에서 끔찍한 마피아 총격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는 충격에서 벗어날 새도 없이 여전히 러시아인들이 2년여 동안 이곳에 드나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아파트 평판이 좋지 않게 날까봐 어디다 내놓고 하소연하기도 어려웠다.

 제보를 받은 기자는 이곳 단지 내에서도 60평형대 초호화 아파트로 통하는 902호를 찾아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등기부를 떼본 결과 현재 이 집 소유자는 카르고폴로프 알렉시(49)였다. 조회 결과 카르고폴로프는 부산에 거점을 둔 러시아 극동 마피아 야쿠트파 한국 거점 두목으로 나타났다. 그는 3년 전 두목 나우모프가 이 아파트에서 권총 피격으로 사망한 뒤 보스 자리를 이어받아 이곳 대형 아파트를 무대로 생활하면서 조직원 합숙소로 이용해왔던 것이다.

이 아파트의 한 주민은 “지난 가을까지 러시아인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녀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발길이 뜸하다”라고 말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러시아인이 주인인 902호의 관리비가 몇 달 밀려 최근 단전 단수 조처를 했다고 밝혔다.

킹크랩 등 수산물 밀반입해 떼돈 챙겨
 
카르고폴로프가 잠적했다고 해서 그의 마피아 조직이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그가 부산과 동해에 ‘ㅂ테크 수산’이라는 합자회사를 운영해왔다는 점을 파악했다. 법인등기부 등본상 1억5천만원의 자본금을 가진 이 회사는 수산물·생필품·잡화 등을 취급하는 종합 수출입 업체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산 수산물 밀수출이 주된 사업 영역이다.

부산역 옆에 자리한 ㄷ 빌딩에 있는 이 회사 주소지를 찾아가자 문이 잠겨 있었다. 인근 수산업계 관계자는 “마피아 소속 회사라는 점이 드러나 관계 당국에서 주시하자 하부 조직원 5명을 영도에 있는 다른 건물로 이사시킨 뒤 두목은 러시아로 피신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카르고폴로프가 지분 60대 40으로 합자해 설립한 이 회사의 이 아무개 사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조직폭력 세력인 칠성파 소속 조직원의 친형이라는 점이다.


 
 러시아 마피아가 부산을 거점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국정원 국제범죄정보센터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현재 부산에는 20여 개의 극동 마피아 조직이 자리를 잡고 각종 이권 암투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겉으로는 러시아인 단독 회사를 설립하거나 국내 수산업자와 합자 법인을 세워 합법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처럼 위장해 활동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카르고폴로프처럼 마피아 조직원이 부산에 직접 아파트를 구입해 밀수업과 조직원 합숙소로 쓰는 사례만도 현재 100여 곳에 이른다.

사할린과 하파로프스크 등 극동 지역을 무대로 삼는 러시아 마피아는 크게 ‘목재 마피아’와 ‘수산 마피아’로 나뉘는데 한국에 진출한 러시아 마피아는 ‘수산 마피아’이다. 이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아하는 킹크랩 등 수산물 밀수에 주로 관여한다. 이들이 한국과 일본에 거점망을 갖추고 밀수업에 뛰어든 데는 러시아 내부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10개 행정구역을 가진 러시아 극동 지방은 인구가 2백여만명에 불과해 막대한 연해 수산물을 소화해내지 못한다. 모스크바 등 유럽 지역 러시아 본토까지는 일본과 한국보다 훨씬 거리가 멀어 운송비 부담이 크다. 그래서 이들 마피아 조직은 손쉬운 돈벌이가 되는 해적 형태의 밀무역에 적극 뛰어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이권 무대로 삼는 마피아 조직은 대규모 어업 선단과 무역 선단을 갖추고 있다. 어선이 잡은 수산물은 공해상에서 무역선에 바로 실린 채 수출입 통관 절차 없이 바로 부산항으로 들여오는 방식을 쓴다. 물론 마피아 무역 선단은 위조한 러시아 당국의 통관증을 제출해 한국 세관을 무사히 통과한다. 이들의 밀수 수법은 교묘해서 한·러 세관 당국이 사전 에 밀수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더라도 허탕치기 일쑤라고. 공해상에서 입항할 배 이름을 바꿔 달고 버젓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재 마피아가 이런 방식으로 한국에 들여오는 수산물 물량은 연간 1천5백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막대한 이권을 쟁탈하기 위해 합법을 가장해 부산에 둥지를 튼 20여 마피아 조직 중 가장 큰 세력은 야쿠트파, 마가파, 페트락파 3개가 꼽힌다. 사할린 거점 야쿠트파는 두목 나우모프가 영도의 아파트에서 피살된 뒤 카르고폴로프가 한국 거점을 승계했다. 그러나 39척의 선단을 거느린 야쿠트파에서는 2002년 부두목 키티노프가 떨어져나와 마가파를 결성하면서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분파 당시 배 한 척도 나눠 받지 못한 키티노프는 부산에 거점을 두고 야쿠트파의 선박을 뺏기 위해 갈등을 거듭했다.

마가·페트락 연합파, 야쿠트파 공격

 이들은 한국 수사당국에 적발되지 않기 위해 주로 바다에 정박한 밀수선에서 격투를 벌이는데 부상자가 발생하면 부산의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병원 통역을 맡은 이 지역 러시아어과 출신 일부 여성들이 부상자들과 눈이 맞아 결혼하면서 부산에 아파트를 마련해 자연스레 마피아 조직원들의 거점을 확보해나갔다고 한다.

 
현재 부산 거점 수산 마피아의 판도는 마가파와 페트락파 연합이 우세한 상황이다. 2003년 발생한 야쿠트파 두목 나우모프 피살 사건도 선박과 밀수 이권을 강탈하기 위해 마가파와 손잡은 페트락파 조직원이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두목의 피살로 한국 수사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된 야쿠트파의 조직 통제 문제가 발생하자 마가파에서는 조직원 흡수와 선박탈취 공세를 강화했다. 부산이 마피아 조직들의 혈투장으로 변할 것을 우려한 국정원에서는 급기야 지난해 초 법무부를 통해 마가파 두목 키티노프의 입국을 영구 불허하는 조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조처에도 불구하고 세력다툼 과정에서 부산이 마피아 세력의 범죄 온상이 될 여지는 항상 열려 있다. 이들이 한·러 양국의 법을 어기면서 부산을 노리는 이유가 이권 쟁탈에 있는 이상 경쟁에서 탈락한 조직이 호락호락 한국을 떠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수산업 이권에서 밀려난 마피아 조직에게 가장 손쉬운 돈벌이는 국내에 마약과 권총을 들여와 밀매하는 일이다. 부산지방경찰청은 2004년 5월4일 이런 유형의 러시아인 마약 밀매 조직 19명을 적발해 구속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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