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 김미현(문학 평론가) ()
  • 승인 2000.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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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옆에 두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김혜수가 친구라면 스트레스 꽤나 받을 것 같다. 장동건과 함께 있으면 남자들은 긴장하게 될 것이다. 조수미와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자살골을 넣는 것이다. 타이거 우즈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골프칠 마음이 다시 생기지 않을까.

텔레비전 드라마<덕이>의 귀덕이도 옆에 두고 싶지 않은 부류에 속한다. 얼마나 비교되겠는가 웬만큼 착해서는 빛도 안날 것이다. 귀진이가 차라리 낫다. 조금만 착해도 아주 착하게 보일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귀덕이 처럼 착할수 있고 귀진이 처럼 악할 수 있을까 귀덕이 속에 귀진이가 귀진이 속에 귀덕이가 있는 것이 정상 아닌가 마네킹이 아닌 이상 항상 웃거나 항상 화내는 사람은 없으니까

드라마<덕이>주인공 현실에서 가능한가
사실 귀덕이처럼 행복한 아이도 없다. 아무런 갈등 없이 언제나 바른 판단만 한다. 희생을 숙명으로 여기며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물론 역경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귀덕이는 그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고 있다. 가족의 영웅이고 동네의 자랑이다. 당연히 모든 남자들이 동맹을 맺은 듯이 귀덕이만 좋아한다.

선을 행하기 힘든 이유는 그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귀덕이가 행하는 선도 소극적인 선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선은 아버지에게 유명 가수를 불러오는 비용을 대주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폭력을 일삼는 큰 오빠를 번번이 감옥에서 빼내올 것이 아니라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자기 때문에 불구가 된 작은오빠를 평생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반대 축인 귀진이의 악도 너무 거칠다. 사람들이 악마와 거래하는 이유는 악이 충분히 유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진이는 그럴 수 있겠다 싶은 행동보다는 해도 너무 한다는 행동을 한다. 누리는 것은 없고 잃는 것은 많다. 그렇다면 누가 귀진이처럼 살려고 하겠는가

영화<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아버지이자 사탄인 밀턴(알파치노)에게 아들이자 인간인 로맥스(키아누 리브스)가 굴복하는 것은 그가 제공하는 명예와 권력 때문이다. 사탄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해 타락하는 것이다. 그러니 밀턴은 너무도 당당하게 난 무대만 준비해 연기는 가자가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죽어 가는 밀턴의 얼굴이 로맥스의 얼굴로 바뀌는 장면이나 죽은 밀턴이 다시 살아나 로맥스의 허영심을 공략하는 장면은 악마는 바로 나 자신 임을 알려준다.

장애인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장애인도 잘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듯이 악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악이 제대로 극복되는 사회가 경쟁력 있는 사회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 안의 파시즘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악과 필요악이 오히려 정상처럼 느껴지는 지금은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악을 다스리는 것이 더 시급할 수 있다.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이다. 이를 통해 악을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알아야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삐딱하게 재해석하자면 강인하고 급진적인 카인이 자유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억압적이고 인습적인 아벨을 죽여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바타이유의 말처럼 악은 뒤집어진 선 이거나 우회한 선이니까 악과 대화하기 위해 악의 침범을 받는 것이 진짜 선이니까

결국 우리에게 악이 소중한 이유는  악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자신이 유죄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선이야 말로 악의 숙주일 수 있기에 선을 부정하고 의심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악이 있는가 보다는 어째서 악이 있어도 좋은가 라고 물어야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가져오지 않는 악이야말로 가장 악한 것이다. 불어로 악(mal)은 아픈 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덕이>에서 분노가아니고 고통을 유발하는 귀진이를 좀더 부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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