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철새’의 직업정신
  • 안병찬 편집국장 ()
  • 승인 199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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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다드의 라시드 호텔에 남아 새벽공습을 지켜본 문화방송 특파원들의 보도자세는, ‘전진할 때는 선봉부대와 후퇴할 때는 최후미부대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종군기자의 위치를 확인해준 것이었다. 특히 여성특파원의 투철한 직업정신의 발휘는 이색적이었다. 70년대 초반 사이공에 근무하고 있을 때, 프랑스통신사(AFP) 지국에 여성특파원 한 명이 일하고 있었다. 지성적인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는 30대 중반의 베르니크 드쿠뒤. 볼 때마다 그의 다색 셔츠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어느 때부터 그의 모습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지국장 페릭스 보로에게 안부를 물었다.

  “부상했다. 제13번 국도로 취재 나갔다가 총상을 입었지. 엉덩이를 이렇게 스쳤어.” 그는 “뿅”하고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으로 엉덩이에 맞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베르니크는 지금 엘리제궁의 미테랑 대통령 수행담당 기자이다. 

  종군기자는 철새를 닮았다. 특히 구미의 특파원들은 전장을 찾아 철새처럼 이동한다. 세상 사람들이 안방에서 텔레비전으로 전쟁영화보듯 하던 베트남의 모습이 사라지자, 사이공이란 취재구역을 잃은 철새들은 잠시 무료한 듯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끝나던 그 해 1975년에 중동의 레바논에서 내전이 터지자 종군기자들은 즉시 일터를 얻었다.

사이공 최후의 방어선에서 만난 피터 아네트
 이슬람 군과 그리스도군 사이의 얼키고설킨 끝없는 전화. 1982년, 전쟁을 취재하고자 베이루트에 모여든 각국 특파원들은 회교구역에 문을 연 코모도어 호텔을 근거 삼아 이스라엘 군에 포위된 팔레스타인 항전 82일을 보도할 수 있었다. 지금도 코모도어 호텔 로비에는 호텔 경영자 유세프 나잘에게 증정된 표창동판이 걸려 있다. “82일간 뉴스취재가 가능하도록 힘써준 것을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카이로 주재 특파원 일동.”

  걸프대전을 보아도 전쟁에 대한 의문은 똑같다.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가.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인간은 전쟁의 불길을 바라보며 어째서 흥겨워하는가. 연구자들에 따르면, 전쟁·패권다툼·극적 투쟁·공격행위·운수급변 따위 격렬함과 난폭성에 뉴스 요소가 있어 사람들은 감성적 자극을 받는다고 한다. 뉴질랜드 태생의 피터 아네트는 60세가 되었지만 매처럼 생긴 얼굴에 매처럼 두려움 없이 라시드 호텔 현장에 남아 전쟁취재를 계속한다.

  사이공의 패망이 임박하던 때, 1975년 4월15일 필자는 남부 월남군사령부의 안내를 받아 수안록 혈전장에 종군한 일이 있다. 사이공 최후의 방어선이라던 수안록 현장으로 치누크 47형 헬리콥터를 타고 가면서 피터 아네트는 “베트남의 캄보디아나이제이션(캄보디아화)”이라는 말을 써가며 큰 소리로 멸망을 예고했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피터 아네트가 육성으로 생중계 하는 CNN화면에 ‘이라크 검열필’(cleared by Iraqui censors)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나온다는 점이다.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 공격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발신 화면에도 ‘이스라엘군 검열필’이 따라나온다.  베트남전쟁 때 호강한 미국 언론도 이번 걸프전쟁에서는 전에 없는 통제와 제약을 받고 있다. 미 국방성은 일선취재를 할 때는 반드시 군인의 ‘호송’(감시) 아래서만 가능하며 송고하는 기사도 군 당국의 사전 검토를 거쳐야 한다는 방침을 정해놓았다.

 다 아는 얘기지만 베트남전쟁을 끝내도록 반전여론을 이끈 것은 미국 언론의 긍정적인 역할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이번 걸프전쟁에서만은 언론매체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게 상책이라고 작정한 모양이다.

종군기자의 역할은 평화의 마음 일깨우는 것
 필자에게 누구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종군기자는 서울 태평로 언론회관 13층 사무실에 있는 미국방송회사(ABC) 지국장 이요섭이다. 그는 70년 11월 영국 비스뉴스 소속 카메라맨으로 캄보디아에서 7번 국도 전투를 취재하다 캄보디아군 1백13명과 함께 북베트남군 포로가 되었다가 14일만에 탈출한 사나이다. 다음해 3월에는 4번 국도에서 크메르 루지가 수류탄을 던지는 것을 보고 카메라를 겨눈 순간 왼손 등에 총탄을 맞아 관통상. 그는 사이공이 함락되기 3일 전 미리 사이공을 떠나면서 교민철수장면과 주월 한국대사관 주변 장면을 찍은 필름을 날라준 필자의 종군동지이기도 하다.

  사이공이 함락된 후 방콕지사로 옮긴 이요섭은 77년 정월 초이튿날 말레이시아 국경지대 정글에서 태국 정부군의 공산게릴라 소탕전에 종군했다가 사제 대전차지뢰가 터져 왼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의족을 한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다시 자동차를 몰려 취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크림전쟁(1853~1956)에 나가 일선의 참상을 알린 <런던 타임스> 통신원 월리엄 H 러셀은 최초의 종군기자(워 커리스폰던트)로 꼽힌다. 나이팅게일이 전지에 뛰어들어 적십자정신을 발휘한 것은 그의 종군기 영향이다. 종군기자의 진정한 역할은 현장을 알리는 데 머물지 않고 전쟁을 추방하자는 인간의 마음을 일깨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진정한 종군기자의 직업정신은 두려운 마음으로 전쟁의 폭풍을 진지하게 맞이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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