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보부상 ‘불원천리’
  • 송준 기자 ()
  • 승인 1991.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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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품 본국서 대인기” 남대문ㆍ동대문시장 누벼

2월22일 새벽3시. 허름하지만 두툼한 방한복을 단단히 차려 입은 노랑머리 외국인 4명이 불꺼진 호텔의 유리문을 열고 차가운 거리로 나섰다. 이들을 태운 택시가 멈춰선 곳은 새벽 2시면 문을 여는 남대문시장.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이들은 곧장 스웨터 전문매장을 찾았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9시에야 쇼핑을 마친 이들은 허리까지 닿는 비닐백에 앙고라 스웨터를 가득 채워 호텔로 돌아왔다.

적게는 80% 많게는 10배의 이윤 남겨
잠든 서울의 새벽을 누비는 이들은 유럽에서 이름이 높은 폴란드의 보따리장수이다. 의류액세서리 등 신변잡화를 주로 취급하는 이 장사꾼들은 외국에서 싼 값에 물건을 구입한 후 본국에 돌아가 판매를 하는데 적게는 80%, 많게는 10배의 이윤을 남긴다. 수요는 늘어가는데 거래되는 생필품의 물량이 적어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폴란드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은 남대문시장과 청계천 의류상가 그리고 동대문시장 흥인시장 이태원시장 등이다. 낮쇼핑에는 주로 전철을 이용하는데, 이미 몇 번째 서울을 방문한 경력자 중에는 정기승차권을 끊어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초기에는 주로 오스트리아의 빈이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독일의 베를린을 왕래하며 소규모 국경무역을 했다. 통일을 이룬 독일이 동유럽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억제하기 위해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폴란드 상인들은 터키로 구매장소를 바꿨고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등지까지 원정을 시작했다. 그때 중동지역에 수출되었던 한국 제품이 폴란드에 소개됐다고 한다. 걸프전쟁 발발과 함께 폴란드인들은 동남아를 찾았지만 이 지역 제품은 값이 싼 반면 질이 너무 낮아 본국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마침내 폴란드에서 인기가 있는 한국제품을 직접 구매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찾은 이들에게 적당한 가격의 제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안내원인 소피아 오츠코프스카(36)씨는 “한국의 울제품은 부드럽고 디자인이 좋아 폴란드에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15달러에 산 앙고라 스웨터를 폴란드에서 구입하려면 1백50달러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학과정인 체육학술원(Academy of physical training)에 재학중인 스물다섯살의 프샤모어씨와 피터씨는 방학을 이용해 내한한 아르바이트 학생들. 결혼 2년째인 프샤모어씨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져온 8천달러로 주로 앙고라 스웨터를 샀는데, 서울 올림픽 구경을 왔다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밝혔다. 동업자인 피터씨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지만 서울장애자 올림픽 수영부문에서 3관왕을 차지한 철완이다. “사간 물건은 학교 친구와 잡지사에 근무하는 벗들에게 약 25%의 이윤을 남기고 판다.”

보석류 액세서리를 전문 취급하는 비톨트말레스키(48)씨는 그다니스크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전직 교수. 재직 당시도 집세와 생활비를 내기가 벅차 다른 대학에서 시간제 강사로 일하거나 논문과 책을 써서 생활비를 보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목에 병이 생겨 아예 직업을 바꾸게 되었다. 비톨트씨는 “무역업무를 배우는 것은 물론 국가간의 관계에 눈떠가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즐거워 한다.

폴란드 상인에게는 충동구매라는 것이 거의 없다. 한번 결정한 모델을 구할 때까지는 같은 상가를 몇 번이고 맴돈다. 일단 원하는 물건을 찾아도 자기들이 계산해둔 금액에 살 수 있을 때까지 흥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동대문시장의 한진 불라우스 가게 주인은 “지독하게 깎지만 처음에는 몇벌 사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음번에 그 물건을 들고와서는 같은 종류의 물건을 모두 들고 간다”고 이들의 구매 행태를 신기해 한다. 폴라드인들은 5천달러에서 10만달러에 이르는 돈을 갖고온다고 한다.

폴란드인들의 가장 큰 애로는 언어장벽인데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전자계산기가 동원되고 있다. 주인이 물건 값을 계산기로 두들겨 보여주면 이들은 원하는 가격으로 수정하여 다시 주인에게 내민다.

보따리상인의 서울 나들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값싼 항공료이다. 소련에어로플로트 서울-모스크바간 정기노선 요금이 좌석 등급에 따라 왕복 1천6or69달러에서 3천3백37달러인데 비해 구매여행단이 이용하는 에어로플로트 비정기선 전세기의 경우 호텔 경비를 포함한 왕복 항공료가 8백달러에 불과하다.

오르비스 유벤투어 트랜지트 등 폴란드 여행사와 대한통운 서울항공 gs주 등 우리측 여행사에서 관광일정을 분담하는데 폴란드인들은 풍전 프린스 한양관광호텔 세곳에 나뉘어 투숙한다. 법무부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구매여행단의 전세기가 처음 도착한 지난해 10월에 입국한 폴란드인들은 모두 5백명으로서 전달의 2백30명에 비해 2배 이상의 증가폭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6박7일의 여행일정 가운데 일요일엔 관광을 하는데 이날은 문을 닫은 시장이 많아 물건을 충분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관광코스는 대체로 경복궁-박물관-북악스카이웨이-조계사-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짜여져 있고 63빌딩의 아이맥스 영화관람이 포함되기도 한다. 안내원 陰璟(48)씨는 “이들은 대체로 관광에 관심이 없다. 단지 물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폴란드 상인이 한국 여행에서 부닥치는 가장 큰 문제는 사들인 물건을 고국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항공기 탑승시 규정(정세기의 경우 30㎏)을 훨씬 초과하여 물건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에어로플로트 서울 지사의 한 직원은 “각 항공사마다 5㎏내외의 초과화물은 적재를 허용해준다. 전세기의 경우는 배타적 이용권이 있으므로 이륙에 지장이 없는 한도까지 초과중량을 실어주는 것 같다. 가외짐은 따로 돈을 받고 적재해주거나 혹은 다음 비행기로 보내기도 한다”고 밝힌다. 화물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무역진흥공사의 소개를 받은 무역업자와 협의하여 수출계약서 등을 첨부, 직접 수출의 형식으로 짐을 보내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남은 돈은 서울의 은행에 예금
이렇게 가져간 물건은 대부분 시장을 통해서 유통된다. 3만5천달러를 가지고 와서 필기도구 인형 액세서리 앙고라 스웨터 및 여성의류 등을 잔뜩 사들인 트로야(36)씨는 포지움코바에서 보구치라는 가게를 직접 운영하는데 “폴란드에는 수천개에 달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시장이 있으며 여행단의 90%가 개인 상점을 스스로 운영한다. 물건을 팔 때 세금으로 12~2달러를 내야 한다”고 밝힌다. 이 상인의 말에 따르면 물건을 처분하는 데 약 5일에서 15일이 걸리고 한국행 비자를 발급받는 데 3주일 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에 한국에 다시 오기까지 대략 6~7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보따리장수가 무역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해 코트라의 柳種憲 과장(39)은 “한국의 무역 상대가 되기에는 상당기간이 필요하다. 현재로선 동유럽 무역에서 얻어낼 것이 거의 업다”라고 잘라 말한다. 한국관광공사의 盧惠實(30)씨는 “에어로플로트 항공이 민영화될 경우 전세기 항공요금이 일반 항공여객 수준과 같아질 가능성이 높아 폴란드 상인에게는 수지가 맞지 않을 것”이라며 보따리장수의 서울행을 한시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한항공측도 손해를 보면서 폴란드 노선을 개설할 의도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점차 ‘작은 무역업자’의 폴란드 내 시장 점유율이 커지고 있으며 전세기를 원하는 조직이 늘어나고 있다”고 폴란드 대사관측은 적극적 태도를 보인다. 1등 서기관 로무알드데리워(46)씨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상인들은 서울에서 구매하고 남은 돈을 서울의 은행에 예금해놓고 있다. 다시 서울을 찾아오겠다는 생생한 다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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