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과잉 보호는 폭력"
  • 베를린.김인겸(자유기고가) ()
  • 승인 199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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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투사 페트라 켈리 '동반자살' 1주년…여성운동가 '피살설' 제기로 화제



 페트라 켈리의 죽음은 과연 동반자살이 아닌 일방적 타살인가. 한때 독일 총리 헬무트 콜보다 더욱 저명한 정치인으로 언론의 각광을 받던 '국제평화운동의 천사'이며 독일 녹색당 대표였던 켈리의 사후 1주기를 맞아, 한 여류 저널리스트가 제기한 의문이 요즈음 독일 지성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빌리 브란트의 장례식이 국제적인 관심 속에서 치러진 약 4주일 후인 92년 10월19일 자정께 민간 텔레비전 방송인 라디오 텔레비전 룩셈부르그(RTL)는 특별 뉴스로 두 정치인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보도했다.

 한때 범세계적 평화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페트라 켈리와 그의 반려자이자 독일 반핵?반전 운동의 중심 인물인 퇴역장군 게르트 바스티안의 충격적인 죽음.

호네커에 인권 문제 따진 '강심장'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 의해, 20세기를 움직이는 1천명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바 있고, 82년 '알터나티브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페트라 켈리와, 헬무트 슈미트 정권의 나토 군비확충 인준에불만을 품고 군복을 벗어 던진 바스티안은 80년 이후 최상의 정치적 동지이자 삶의 동반자였다.

 켈리는 79년 31세로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녹색당(Die Grune)의 유럽의회 진출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82년에는 녹색당의 수석 후보로서 보수 정당들의 공식화된 정치 형태로 봉쇄되어 있다시피 한 독일 연방의회에녹색당을 끌어들인 핵심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82년 동독을 방문하여 당시 동독 당서기장인 호네커에게 동독의 인권 문제를 따지고 들어 화제를 모으는 한편, 독일 통일의 발판이 될 무폭력 시민운동을 이끌던 동독 지식인들을 통독 때까지 적극 지원 보조하여 왔다.

 2차대전 때 히틀러의 작은 병정이었고 24년간 직업군인으로 경력을 쌓아온 바스티안은 79년 발표된 중거리 미사일 5백72기와 퍼싱 1백8기 등의 핵무기 유럽배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던 나토 군비재확충에 반발하여 퇴역한 후 투사로 변신했다. 80년 "핵에 의한 죽음은 우리 모두를 노린다. 핵무기 없는 유럽을!"이라는 구호 아래 2백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바스티안의 크레펠트 소집(Krefeld Appel)은 '평화 장군'이라는 별칭을 그에게 부여하였다. 그는 80년 녹색당에 가입(84년 탈당), 반핵?반전 운동을 이끌었다.

《죽음에 이르는 사랑》 발간으로…
 이들 두 사람의 시신이 페트라 켈리의 자택에서 발견된 이틀 뒤 경찰은 다음과 같이 수사 경위를 발표했다. '10월1일께 바스티안은 자기 소유인 38구경 피스톨 데어링 스페셜로 잠든 켈리를 죽인 후, 연달아 자기 생명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 제3자에 의한 살인 가능성은 없으며, 이 사건은 바스티안에 의한 동반자살로 보인다.'

 이 사건은 그들의 사후 5개월 뒤인 93년 3월4일 독일 대검찰청의 최종수사발표에 따라 결국 '동반자살'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지난 7월, 두 사람의 가까운 친구였고 독일 유일의 페미니즘 잡지인《에마(Emma)》의 발행인이자 대표적 여성운동가인 앨리스 슈바르처는 검찰의 공식발표인 동반자살설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켈리와 바스티안의 생과 죽음을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재구성한 《죽음에 이르는 사랑(Eine Todliche Liebe》이라는 책을 전격 발표함으로써 보수적 성향의 독일 독서계에 언론 문학(Die Journalistische Literatur)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파격적인 책자는 출간되기 직전 두 차례에 걸쳐 《슈피겔》에 전재되어 독일 지식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화제가 되었다. 이후 독자 투고가 물밀듯이밀려들어, 새삼 두 사람의 부재로 인한 독일 국내 정계 및 평화?환경보호 운동의 메워질 수 없는 공백을 아쉬워하는 세인의 관심을 실감케 했다.

 슈바르처는 이 책자를 통해 의문을 제시한다. "켈리는 잠든 상태에서 그의 의사에 반하는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바스티안이 총을 쏘기 전 그에게 물었다면그는 분명히 '싫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켈리는 94년 있을 독일 총선과 유럽회의 참여에 관해 준비중이었고, 93년 말까지 정치 활동계획을 짜놓았다. 그러나 바스티안은 자기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즉 자기가 먼저 세상을 떠날 경우 혼자 남을 켈리에 대한 책임감이 그로 하여금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과잉 보호'를 선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평화주의자가 왜 스스로 파멸하겠는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남성 중심 사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슈바르처는 두 사람의 죽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하였다. 즉 켈리의 죽음은 무기를 가진 자(무장)가 저항의 여지가 없는 자(비무장)에게 가한 폭력에 의한 것이며, 어떠한 동기도 폭력을 미화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슈바르처는 바스티안의 아내가 사건 직후 자기에게 털어놓은 말 즉 "그의 죽음보다 그가 켈리를 죽였다는 것이 더 무서운 사실이다"라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켈리의 죽음을 바스티안에 의한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두 사람이 죽은 직후 대중지 <빌트>는 '질투에 의한 동반자살'이라는 원색적 제목으로눈길을 모으기도 했고, 다른 신문도 그들의 죽음에 대한 추측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독일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의혹에 찬 죽음'이라는 표지 기사로 그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도하면서 '동반자살'로 결론지은 경찰의 수사발표에 관해 몇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완전한 평화와 무폭력 그리고 인간주의를 추구하던 두 평화주의자가 과연 무기에 의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갔을까. 둘째, 많은 사람을 도우면서 지인들에 둘러싸여 살던 두 사람이 사후 20일이 지난 뒤 시신이 발견될 정도로 갑자기 철저하게 고립될 수 있었을까. 셋째, 정치적 이념을 전달하는 것을 삶의 신념으로 가졌던 두 사람이 정치적 유서나 자살과 유사한 흔적도 없이 생명을 끊을 수 있었을까.

마피아?KGB 등에 의한 살해설도
 또한 그들의 친구이자 옛 소련 반체제 작가인 레트 코렐로프는소련 인권 문제에 관여한 바 있는 켈리의 전력으로 미루어 국가안보위원회(KGB) 잔재 세력에 의한 살해 음모로 추측하기도 했다. 또한 켈리와 함께 체르노빌 핵 사고를 공동으로 조사한바 있는 우크라이나 핵 물리학자 블라디미르 체르노센코는 핵 마피아에 의한 완전범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달라이라마를 도와 티베트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켈리를 위협한 바 있는 중국 공산당 정치 조직을 수사할 필요가 있다는 설이 독일 저명언론인피터 폰 슈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일단의 동독 출신 정치가들은 옛 동독 국가안전부와 신나치 조직이 결탁하여두 사람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들과 개인적 접촉이 비교적 잦았던 녹색당 친구들과 주변 인물들은 오히려 동반자살설을 수긍한다. 90년 녹색당이 독일 총선에서 참패한 후 국내 정계에서 빛을 잃은 두 사람은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자기들의 정치 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정치 활동을 보장해 줄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황과, 과로로 인해 육체?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켈리의 건강 문제까지 겹쳐, 두 사람은 극도의 심리적 침체상태였기 때문이다. 24년 연상의 연인인 바스티안과 소녀 같은 켈리의 관계는 리어왕과 그가 가장 사랑한 셋째딸 코넬리어의 관계처럼 편집광적 사랑과 일방적 보호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평소 켈리는 주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했다. "만인 바스티안이 세상을 떠나면,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심지어 그는 바스티안에게 "당신 없는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라고 단언하곤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스티안은 '내가 삶을 마칠 때가 되면, 그 여자고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건강 상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켈리는 추적 망상증과 소외 공포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강인한 진보정치가로 평가되던 켈리였지만, 정작 여행조차 혼자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파괴되어 있었던 것이다. 159cm, 40kg의 가냘픈 그가 과로로 쓰러질 때마다 바스티안만이 그를 지켜 주었다.

 92년 3월 교통사로로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했던 '평화 장군'은 켈리를 혼자 남겨두고 27년이나 결혼 생활을 충실히 지켜온 아내 롯데에게 돌아가기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언제부터인가 수시로 친지들에게 죽음에 관한 얘기를 던지곤 했다고 한다.

 바스티안은 죽음직전 그의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 두 사람의 마지막 방문자였던 작센하우젠(전 유태인 수용소였고, 지금은 유태인 학살 회상 기념관이다. 그 당시 신나치 청소년들에 의한 방화로 일부가 파손되어 화제를 모은 곳)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여 말년의 절망적인 심경을 짐작하게한다. "고통 받다가 죽어간 인간들의 슬픔이 돌 하나 나뭇잎 하나 그리고 풀포기 하나에도 담겨 있는 듯한 이곳에서 나는 미칠 것같이 괴로웠다."

"켈리는 국가 대표하는 직위에 적합"
 그들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전인, 그러나 이미 켈리가 세상을 떠난 후인 92년 10월12일자 베를린 진보좌익지 <타게스 자이퉁>의 독자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지금까지 국가를 대표했던 직위는 항상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능력 있는 한 여성에 의해 그 임무가 더욱 완벽하게 수행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중략)…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음에도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 켈리가 바로 그 적임자이다. 독일 국내의 분열된 사회적 현상들로 인해 유감스럽게 오도된 독일의 국제적 이미지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켈리는 국가를 대표하는 직위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현재 독일은 94년으로 임기가 끝나는 현 대통령 폰 바이츠제커의후계자를 물색하고 있다. 많은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켈리 사후 1주년을 맞은 10월, 예리한 판단력과 신랄한 비판력, 그리고 용기 있는 참여 의식으로 요약되는 페트라 켈리의 비범했던 정치적 지능은 많은 독일인에게 새삼 깊은 아쉬움을 던져 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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