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10년 내 못살리면 끝장”
  • 글 김 당 기자 사진《지구를 살리자》 ()
  • 승인 1992.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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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경작지 33% 생산력 잃어간다”…매일 수십~수백 種 사라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유엔환경개발회의(6월3~14일)와 스무번째 세계환경의 날(6월5일)에 즈음하여 '지구를 구하는 처방'을 담은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영국 왕실의 지원을 받은 '국제 지구의 친구'가 주축이 되어 발행한 ≪지구를 구하자≫(원제 Save the Earth)는 악화된 지구 건강상태를 컬러사진과 지구인의 목소리를 통해 감각적으로 깨우쳐준다. 한편 미국 월드워치연구소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지구환경보고서≫(92년판?원제 State of the World)는 일종의 지구환경연감으로, 특히 91년의 지구 건강상태를 연구논문과 풍부한 자료를 통해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진단해준다. 그렇다면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공통의 메시지를 담은 두 책의 처방전을 중심으로 그 치유방법을 소개한다.<편집자>

 

 지구라는 이 혹성의 나이는 46억세이다. 상상하기조차 버거운 이 방대한 시간을 좀더 접근하기 쉽게 46년으로 줄이면 인류가 차지해온 시간은 6시간쯤 된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바로 1분 전에 시작된 셈이다. 즉 불과 60초 사이에 인간은 마치 전염병처럼 빠른 속도로 인구수를 늘려놓았고 연료와 원료를 구하느라 혹성을 황폐화시키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동식물을 멸종시켰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지구를 구하자≫는 이를 ‘각성’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지구환경보고서≫는 이같은 자각의 주요한 결과물인 유엔환경개발회의에 거는 기대를 ‘환경혁명의 출범’이라고 표현한다. 문제는 지구를 구하는 데 별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구를 구하자≫의 책임편집자이자 집필자인 조나단 포리트는 “진보의 모델에 의해 황폐화된 지구상황을 바로잡는 데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불과 10년 정도”라고 주장하면서 이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특히 포리트는 지난 40년 동안 진보라는 이름으로 지구에 해를 끼쳐온 파괴적 경향과 다음 세기까지 지속될 멸망의 지표를 10가지 ‘시한폭탄’으로 규정짓고 있다.

 ‘인구폭발’이라는 낯익은 표현이 암시하듯 인구증가와 식량난은 어쩌면 유사 이래 지속돼온 재래의 시한폭탄일 것이다. 가족계획에 관한 지금까지의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세계인구는 2010년까지 현재의 거의 3배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온갖 비료와 살충제 살포에도 불구하고 1인당 곡물생산량은 85년 이래 계속 불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포리트에 따르면 이는 자기 기만에서 비롯된다. 또 ≪지구환경보고서≫의 대표 집필자인 레이터 브라운에 따르면 거기에는 진보에의 환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새로운 기술이 혜택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익추구를 위해서만 이를 사용해왔을 뿐 그것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과 파급효과에는 눈을 감아왔다. 그래서 인간이 달나라까지 가는 세상이지만 한쪽에서는 수백만명이 변함없이 빈곤에 허덕이는 사태까지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조나단 포리트).

 인류는 최근에야 비로소 아프리카에서의 일상적인 이농의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같은 관심의 경과로 나온 것이 한발과 삼림파괴, 그밖의 환경위기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고 있는 ‘환경난민’이라는 신조어이다. 곧 환경난민은 비료생산?새로운 살충제 개발?다수확품종 개발?불도저를 사용한 광대한 정지작업?한발을 일으킬 정도의 관개사업 등은 성행했지만, 해마다 유실되는 수십억t의 토양에 대해서는 외면해온 결과일 뿐이다. 물론 거의 모든 유형의 지구환경의 질적 저하가 식량생산에 영향을 미치지만 특히 토양유실로 인해 세계 경작지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 생산력을 잃어가고 있다(존 영/≪지구환경보고서≫).

 

열대우림 파괴로 생물 다양성 급속히 붕괴

 농지와 자원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는 삼림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은 열대우림이다. 특히 열대우림은 요즈음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 보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열대림에 사는 생명의 종류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반도의 열대림 50ha 속에는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종의 나무가 존재한다. 페루에서는 한 그루의 나무 부근에 영국에 있는 개미의 모든 종류 만큼이나 많은 개미의 종이 산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톱과 성냥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노만 마이어스/≪지구를 구하자≫). 삼림이 없어지면 그곳에 사는 생물학적 종도 없어진다. 지금도 하루에 수십~수백 가지에 이르는 생물학적 종이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사실 생물 다양성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평가하기엔 너무 귀중한 것으로 지구상 생물이 지닌 총체적 다양성이다(존 리안/≪지구환경보고서≫). 인류가 얼마나 많은 생물체와 더불어 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물 다양성이 상당한 속도로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존 리안). 그렇다면 사라져가는 벌과 새, 그리고 식물이 도대체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말레이시아의 기름야자 나무 농장에서 일어난 실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곳에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수백만 그루나 되는 기름야자의 꽃가루를 옮기는 작업을 하나하나 사람 손으로 해 효율성도 떨어지고 경비도 많이 들었다. 농장주들은 궁리 끝에 원산지인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에서는 작은 바구미들이 꽃가루를 옮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쾌재를 올린 농장주들은 바구미를 말레이시아로 가져다 풀어놓았다. 지금은 모든 농장이 바구미로 꽃가루받이를 하는데, 바구미는 해마다 1억4천만달러의 경비를 절감해준다.

 열대림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는 사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다양하다. 그동안 유엔환경개발회의 준비과정에서 별로 부각되지 않았던 생물종의 다양성에 관한 의제가 최근 부각된 것도 열대림을 보유한 나라들이 그 보배로움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약국에 약을 사러 갈 때면 열대림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약의 25% 이상이 열대림 식물로부터 얻은 것이다. 이러한 열대림의 보건 혜택을 돈으로 따지면 매출액으로 연간 3백억달러쯤된다고 한다. 그밖에도 열대림은 식량과 공업용 원료로도 많은 혜택을 준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조차도 삼림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의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간은 아직 어떤 종이 얼마만큼 사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열대림이 인간에게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혜택은 기후를 제어하여 안정성을 유지해주는 역할이다. 그러나 인류는 지난 수백년 동안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지켜주는 취약한 대기층을 이상하리만큼 경시해왔다. 사람들이 ‘진보를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는 대가로 여겨온 대기오염에 대해 놀라기 시작한 것은 지난 40~50년대 이른바 런던 스모그로 수백명이 죽고 나서부터이다. 지난 70년대 초 이미 미국의 두 과학자가 염화불화탄소의 방출로 인한 오존층의 파괴를 경고했지만 두 사람의 학설은 ‘과학적 오류’로 무시되었다. 또 핵실험이 지구건강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가는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미국이 대기권 내에서 핵실험을 개시한 40~50년대 이후 부분적으로 핵실험중지조약이 조인되어 실험이 사실상 금지된 63년까지도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미국은 대기권 내에 수십 번이나 핵무기를 폭발시켰고, 올해도 지하핵실험을 시행한 미국 중국 두 나라가 그 규모와 횟수를 두고 서로 비난하는 형편이다.

 핵폭탄은 아니지만 대기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사태를 초래하는 대기의 시한폭탄이 있다. 삼림?호수?하천을 산성화시키는 화학물질 방출과 산성비 현상?프레온 가스 방출?오존층 파괴?화석연료 사용?열대림 소각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방출과 지구온난화 등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히 이산화탄소 방출과 지구온난화의 경우, 핵실험과 방사능오염처럼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시한폭탄의 불발 가능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구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핵실험과 같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사능오염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핵폭발이라는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 문제는 지구온난화와 같이 과학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어정쩡하게 양극화하는 것은 여론을 혼란시키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결정을 지연시킨다는 점이다(스티븐 슈나이더/≪지구를 구하자≫).

 요컨대 슈나이더는 “현재의 과학으로는 온실효과 가스가 축적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온난화가 그것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 99% 확신을 갖고 말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지구 전체의 기온동향을 조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0~20년은 걸리므로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도박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대비해 보험을 들고 지금부터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만약 우리의 예상이 뒷날 데이터로 증명되면 지구와 그 주인들은 훨씬 더 급격한 기후변화를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병이 나거나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99%의 확신을 갖고 보험을 드는 사람은 없지만 그때가 오면 보험을 들려고 해도 이미 늦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어느 누구도 보험을 받아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로 한발?홍수의 교차현상과 태풍 자주 발생

 ‘기후변동에 관한 정부간협의회’ 보고서를 토대로 한 ‘지구온난화 시한폭탄’에 따르면 세계의 평균기온이 2030년까지 적어도 섭씨 1도 상승한다는 것이 가장 가능성 높은 예측이다. 높은 측의 시나리오는 2100년까지 5도 이상 상승하리라고 내다본다. 지난 1천6백년 동안 세계의 평균기온이 겨우 0.5도밖에 오르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이같은 상승은 매우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기온상승으로 간간이 나타나는 한발과 홍수의 교차현상이 더 자주 나타나고 열대성 태풍의 발생빈도 또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사하라사막과 그 주변지역에서는 한발과 기근이 지금보다 더 빈번하게 발생해 기아에 찌든 아이들이 더 많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또 환경개발회의가 열리고 있는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해양도시는 더 심한 홍수를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온상승의 가장 극적인 결과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안침범이다. 특히 표고가 낮은 섬들은 치명적인 영향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시한폭탄’에 따르면 기후대가 극방향으로 이동하고 극지를 덮은 빙산이 녹기 시작해 그 결과 해수면은 최소 10cm에서 최대 2m까지 올라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같은 저지대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예컨대 해수면이 1m만 올라가도 이미 빈곤과 인구과잉에 허덕이는 방글라데시의 2천㎢에 달하는 토지가 물에 잠기고 3m 올라가면 몰디브제도 같은 산호초섬이 해면 아래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같은 현대판 노아의 홍수는 한반도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노재식 박사(한국환경과학연구협의회 회장)에 따르면 북동아시아 각국이 배출하는 아황산가스와 탄산가스는 각각 연간 2천만t과 10억t을 초과하고 있고 2020년대 후반 한반도 인구는 1억을 넘을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의 조속한 개편과 효율향상 등의 획기적인 시도가 없는 한 한반도 또한 노아의 홍수를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비껴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리우의 회담장에서 모든 나라가 온실효과 가스의 배출을 적으나마 일정량으로 줄이는 데 동의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해결책은 선진국이 에너지 효율이 낮은 개도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추는 데 자금을 공여하여 선진국이 줄이려고 하는 양을 스스로 사들이는 것이다(슈나이더/≪지구를 구하자≫).

 오염 중에는 눈으로 언뜻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강물을 뒤덮은 하얀 거품?호수의 수면에 덮인 기름막?계곡을 뒤덮은 생활폐기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염상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호수에 산성비가 내려 흘러들어가고 수면 밑이 죽음의 세계로 변해가지만 눈에 비치는 호수는 언뜻 보기에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캐나다 세인트로렌스강에 사는 백경의 예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얼마나 빨리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하얗고 독성을 가진 세계에서 유일한 이 담수고래는 지난 40년 동안 서서히 강에 흘러들어간 유해 화학물질을 먹이사슬을 통해 체내에 축적했다. 그 결과 백경의 체내조직에는 고농도의 화학물질이 쌓여 있어 이 고래의 사체를 버릴 때는 캐나다 법규에 따라 유독폐기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비로운 이 생명체를 ‘헤엄치는 유독물질’로 바꾼 몇 개의 기업은 아직도 “환경오염에 직접 책임이 있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우리 회사의 제품은 무해하다”는 반복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해양?생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바다와 하천에 흘러들어가는 모든 새로운 화학물질은 무해가 증명되기까지는 잠재적인 독극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녹색 처방전’의 핵심은 개인의 책임

 분명한 것은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미 수백만명의 목숨을 위협하는 시한폭탄은 쉬지 않고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한폭탄은 마실 만한 식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물 그 자체가 크게 부족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유엔은 지난 80년 “1990년까지는 모든 사람에게 청결한 물과 위생적인 환경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제 식수공급과 위생의 10년’ 계획을 시작했지만 그 10년의 마지막해인 지난 90년에도 제3세계 사람들은 불결한 물로 인해 하루 평균 2만5천명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유엔의 통계이다.

 ≪지구를 구하자≫에 따르면 전세계 물 사용량은 50년 당시보다 5배 증가했지만 이론적으로는 9천㎦의 물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세계 각지에서 물이 부족한 것은 지역적인 가뭄 때문이라든가, 지하수?강?호수가 산업 및 생활폐수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든가, 아니면 풍부한 물을 쓸데없이 낭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포리트는 “문제는 제3세계의 부족한 물 그 자체가 아니고 풍요로운 북반구의 연대감과 정의감, 그리고 기금확보에 있다”고 주장한다. 두 책의 일관된 주제는 어쩌면 단순한 것이다. 우리는 진보라고 불러온 것에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값비싼 대가라는 계정에 포함되지 않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들―한 예로 사회적 일체감?남을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느낌?자연의 리듬에 대한 사랑과 정신적인 풍요로움 등―은 흔히 무시되거나 부정돼왔다. 그래서 문제는 물질적인 富보다도 고차원적인 것과 교감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 또한 망가졌다는 것인데, 지구를 치유하는 것과 인간의 정신을 치유하는 것은 동일한 과제의 양면이라는 얘기이다(≪지구를 구하자≫).

 그렇다고 해서 ‘지구를 구하자’는 외침을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포리트의 결론은 간단하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방식은 민주주의뿐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위로부터의 녹색질서’에 기대를 걸지만 “세탁기는 20명당 1대, 오후 10시부터는 소등” 따위 강제적인 녹색강령을 말하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리트는 미래를 위한 녹색의 처방전에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책임’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개인의 책임은 지구를 단기간 빌려 함께 사는 우리의 직접적인 의무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자손이나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없는 적자생존의 언덕길에서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 사이의 탯줄과 같은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파괴라고 하는 ‘광란의 춤’에 강력한 제동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의 존재?아이들의 가능성?아이들의 권리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귀착되는 곳이다.”(조나단 포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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