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 뒤에 그늘진 실리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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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방미 성과 두고 민주당등 “시장개방 짐만 떠안았다” 비판



 경주에서 열렸던 한 . 일 정상회담에는 언론과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한가지 일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金泳三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天휴熙) 총리가 마주 앉았을 때 호소카와 총리는 “국제적인 저기압이 죄어들고 있으므로 한 . 일 양국은 이에 공동대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배석한 관계자들은 호소카와 총리가 말한 ‘국제적 저기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청와대는 나중에 호소카와 총리의 국제적 저기압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는 몇몇 학자에게 수소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호소카와 총리가 말한 국제적 저기압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의 정세, 구체적으로 미 . 일 . 중 3 강대국과 그 사이에 있는 한국 간의 역학 관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漢昇洲 외무부장관은 최근 들어 동북아 안보 환경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 “구한말을 연상시킨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 . 경제 . 외교 역할 증대, 중국의 도약, 러시아의 혼미 등에다 미국의 역내 조정력 감소 등으로 대변되는 안보 환경의 변화가 구한말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오늘날 한국의 위치를 굳이 헤아려보지 않더라도 저기압은 벌써 국민에게 매우 절박하게 느껴지고 있다. 김영삼 정부에게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위기 국면을 가져온 쌀 개방 논의를 필두로 해서 다음과 같은 최근 일련의 개방화조처 일지를 살펴보면 저기압의 정체가 더욱 뚜렷해진다.

 △11월 22일 경제기획원 : 이번 아 .태 경제협력업체(APEC . 에이펙) 각료회의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UR) 협상의 성공적 타결을 위해 공산품 분양서 전자 . 종이 . 과학장비 . 완구 4개 공산품에 대해 관세를 폐지하거나 인하하는 개방 조처에 합의했다고 발표. 또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 가트)’에 이미 제출한 개방계획서 2백 52개 품목 가운데 농업장비 . 철강 등 6개 품목의 관세를 폐지하기로 결정.
 △11월 22일 재무부 : 지난 6월 발표한 금융개방 5개년 계획 (블루 프린트)을 우루과이 라운드 금융서비스 협상에 그대로 약속하는 등 미국과 유럽공동체(EC)측의 요구 사항을 대폭 받아들이기로 결정.
 △11월23일 농림수산부 : 그동안 개방을 반대해온 15개 기초 농산물 가운데 쌀 등 4개 품목을 제외하고 11개 품목을 관세화를 통해 개방한다는 방침을 가트에 공식 통보하기로 결정.

 정부는 이번 블레이크 회담과 한 . 미 정상 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상당히 환대를 받음과 동시에 무역투자위원회 (CTI) 초대 의장국가가 되는 성취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말 그대로 성취로 보아야 하는지에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외무부 “장기적으로 큰 이익 준다”
 김대통령의 방미외교 성과를 바라보는 민주당의 시각은 냉혹하다. 통상 문제만 보더라도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등에 우리가 앞장서 미국의 총대를 멘 결과, 개방 압력을 저지할 명분을 잃는 자승자박의 우를 범했다” (문희상의원) “화려한 외양과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번 방미외교는 시장개방 압력만을 잔뜩 받아온 자기과시 외교다, 한국이 에이펙의 무역투자위원회 의장국이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시장개방을 떠안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趙世衛최고의원) “우리가 에이펙에서 미국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동남아국가연합 (ASEAN . 아세안)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 한걸음 나아가 베트남등 인도차이나 국가들도 끌어들일 수 있는 역할을 자임했어야 했다,” (孫世一 의원) 같은 혹평을 했다.

 물론 이에 대한 외무부의 반박 논리는 당당하다., 무역투자위원회 위원장 勸丙玄 대사 (36쪽 ‘시사저널 인터뷰’ 참조)는 방미외교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중장기적 관점에서 보자. 지금은 냉전이후 새로운 경제질서가 재편돼가는 전환점인데, 세계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아세안 . 유럽공동체 3개 블록으로 갈라지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온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해져서 설 마당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번 방미외교 결과 북미권과 동남아시아권을 한데 묶을 수 있었다. 적어도 미국이 유럽 쪽으로 가지 않고 태평양과 아시아를 향해 과감하게 다가와서 꽉 들어앉았다. 그 정책을 달성했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이익을 준다고 확신한다.”

 그는 “단기적으로도 구체적인 프로그램들이 많이 실현됐다”라고 자평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을 위해 에이펙 선언을 채택한 것 △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을 만들어 무역과 투자에 직접 민간 당사자들이 참여하게 한 것 △‘에이펙 교육 재단’ ‘비즈니스 발룬티어스(business volunteers)' 직업훈련센터 등을 통해 선진국의 은퇴한 기술자나 전문가 인력을 개도국에 보내 선진 기술의 이전 . 교류를 촉진시킨다든지, 개도국에는 우리가 기술을 전수하면서 무역과 투자를 촉진시켜 국제화에 맞춰나가는 적절한 메커니즘을 얻었다는 것 등이 그가 꼽는 성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제도 장치를 잘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외교가 실행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다. 어는 경제 블록과 비교해도 느슨하고 허술한 구석이 많은 에이펙을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 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 민주당 의원들이 “에이펙이 다른 경제 블록처럼 강력한 경제공동체 노릇을 해 낼지는 의문이다. 에이펙 회의 이후 한국이 시장개방의 향도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라고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화폐를 지향하는 유럽총합은 ‘현실’이고 아시아 . 태평양 경제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의 입장은아직도 먼 ‘꿈’이다. 영국의 유력지<파이낸셜 타임스>는 에이펙 경제지도자 회의가 끝난 뒤에 ‘중심은 유럽에, 희망은 아시아에’라는 제목으로 이를 표현했다.

 그것은 다음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은 당초 블레이크회담이 끝난 뒤에 아세안 및 비동맹권내 인도에시아의 위상을 고려해 수하르토 대통형과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회담 장소를 수하르토 대통령의 숙소로 하자고 고집했다. 한국 정부는 제 3의 장소를 회담 장소롤 제의 했으나, 끝내 인도네시아가 입장 변화를 보이지 않자 이를 취소했다. 정상회담 자체를 없던 이로 하고 정부의 자존심을 세운 것이 과연 옳았느냐, 경제 이익과 민족 자긍심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판단은 쉽지 않은 무제이다. 이는 앞으로 아세안 국가들과의 외교가 쉽지만은 않다는 전조로 보인다.

양국간 ‘쌀 개방’ 공감대 형성된 듯
 이처럼 아세안과 기타 태평양 연안 국가들, 혹은 아세안과 북미자유무역협정 나라들 사이에 갈등 요소가 상존하는 실정에서 에이펙 무역투자위원회 의장국가를 맡은 한국 정부의 처지는 미묘해질 수 밖에 없다.
 이번 방미외교의 성과를 민주당은 ‘외화내빈의 전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 쌀 개방과 관련해 김영삼 정부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외무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정부는 정상회담으로 각료회의의 틀을 바꾸도록 미국에게 계속 요청했다. 정상회담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상당한 대가를 약속했다.그래서 정상회담 과정에서 우리가 우루과이 라운드의 연내 타결 등 국제적 현안의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 미국을 도와 준 것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이로 미루어 볼때 양국 사이에서 쌀 개방에 대한 공감대는 충분히  무르익었다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쌀이라는 단어가 나왔느냐, 나오지 않았느냐 하는 논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의 쌀 개방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는 판단과 자신감을 클린턴 행정부가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실리는 다 내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만 집중 홍보했다.”(韓和甲 의원) “외교를 국내 이미지 제고용으로 이용했다.”(조세형 최고위원)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를 단순한 정치 공세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역대 정권에서는 정상회담이 끝나면 국민에 대한 홍보용으로 다시 과대포장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도 그들의 외교는 늘 1백점 만점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보도됐다.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의 문민 외교에서 그런 구악이 재현된다면 그것은 ‘문민화’라는 시대 정신을 스스로 거스르는 행태이다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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