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쌀 업고 야당‘거리 정치’로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3.1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 · 여당이 자초한 상황” … 주도권 잡을 호기

민주당이 장외로 나갔다. 그동안 1천만명 서명운동 등으로 쌀시장 개방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해온 민주당의 기본적인 입장은‘국내의 총의를 결집해 정부의 대홰협상을 도와준다’는 것이였지만, 쌀시장 개방이 거의 기정사실화한 뒤에는 대정부 투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민주당은“쌀시장 개방은 불가피하다”는 이경식 부총리의 발표가 있는 5일 긴급 최고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최고위원들은‘(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을 지키겠다’는 대선공약을 내걸었던 김영삼 대통령이 공개 사과와 함께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책임과 관련해서는 내각 총사퇴를 요하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으며,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지역 기반 호남에 농민 많아
 이어 6일 열린 최고회의에서는 한발짝 더 나아갔다. 민주당이 공동 참여하는 ‘쌀시장 개방저지 범국민대책위훤회’에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더라도‘입장 조율’을 하지 않기ㅣ로 했으며, 국민투표를 요구하기로 했다. 정부 여당에서 이같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는 재야 농민세력과 함께 거리 정치를 JWODUSGKRPt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민자당의 올해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힘으로 저지한 민주당은 여세를 몰아 쌀시장 개방으로 곤경에 처한 정부 · 여당을 더욱 거칠게 밀어붙이려는 듯한 모습이다. 민주당이 쌀 개방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당으로서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농민이 많은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쌀시장을 지켜내지 못할 경우에는 의원직을 내놓겠다는 의원도 30명 가량 된다. 거기에다가 민주다의 당내 사정도 한몫 거든다.

7일 서울역 집회에서 민주당 인사들은 당리당략 때문에 거리로 나갔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차도에는 한발짝도 들여놓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지만 내심 당으로서는 다시 없는 호기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9개월 동안 야당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체이로였다. 과거 야당이 주장해 왔던 개혁을 청와대가 앞장서 실천해 나가자 야당은 갑자기 할일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김대중 대표가 은퇴한 뒤에는 당 내분도 갈수록 심화됐다. 이기택대표를 정점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는 보선 등 고비마다 우황좌왕하며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민자당의 예산안 날치기 통과와 쌀 개방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 당내결속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야당이 하기에 따라서는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전선 자체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 야당이 공당으로서의 의분 때문이든 당리당략 때문이든제도권 내의 협상 대상인 여당을 외면하고 재야단체나 농민에게 달려가는 것은 결코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지루하게 되풀이해 왔던 구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문민 정권을 표방해온 정부 여당에게 장외ㅣ로 나가는 민주당을 비난할 만한 논리가 궁하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가장 강조한 것은 예측이 가능한 정치였다. 그리고“야당과 국정을 터놓고 논의하겠다”는 얘기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쌀 개방 문제에 관한 한 야당은 철저히 소외됐고 어떤 예측도 할수 없었으며, 그같은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2월1일 정부 협상 대표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가기 전 국회 예결위에 나온 허신행 농림수산부장관은 민주당 의원들이 쌀 개방 문제를 따져 묻자 “6백만 농민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문제인 만큼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라고 호언장담했었다. 민주당 의원들의 눈에 비친 쌀 개방 협상과정은 그야말로‘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당의 조세형 초고위원은“하늘 아래 어떤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사흘만 지나면 밝혀질 일을 정부 고위 관료들이 번갈아 나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대도 되는 것인가.

이런 사람들과 어덯게 정상적인 정신으로 얘기할 수 있는가”하고 반문하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번 쌀 협상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심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번 쌀 협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통령을 위한 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출마했을 때는 쌀을 지킬 의사도 없고 자신도 없었으면서 공약에‘개방불가’를 포함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초기 입지 강화를 위해 숨겨왔고, 숨길 수 없게 된 뒤에는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오물이 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통령 눈치만 본 당정 고위층“
 쌀 개방 분제가 불거진 뒤 김종필 민자당대표나 황인성 총리, 이경식 부총리 등의 잇단 발언은 현재 고위 관료들이 어디에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는지 분명하다고 민주당에서는 보고 있다. 당정 고위층 가운데 최초로 개방을 시사한 김대표, 개방불가 방침을 얘기하다 사흘 만에 뒤집는 악역을 담당한 황총리,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처음으로 책임론을 들먹인 이무총리 등은 모두 김대통령의 희생양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개혁정치모임의 한 의원은“이번 협상 과정에서 김영삼 정부의 신권위주의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라고 얘기한다. 그는“현재 당저의 고위층들은 대통령에게 바른말을 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대통령이 심기를 편하게 할까, 그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민주당의 추측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같은 불신이 민주당 의원들을 장외로 내몰고 있는 한 원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사흘 만에 뒤집어야 되는 얘기를 그렇게 고집했으며, 개방 발표가 불가피해진 시점에서는 어째서 그렇게 여러 고위 관료가 돌아가며‘이상한’소리를 해야만 했는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차근차근 준비만 해왔다면 쌀시장 개방은 작은 문제로 끝날 수도 있었다. 또 지금도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미국측이 요구하는 대로 다들어준다 해도 유예기간 6년에 관세를 국내가 맞춰 매기는 기간을 합치면 아직은 10년 정도 여유가 있다. 부족하긴 하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우리 농촌을 살릴 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정부가 무슨 말을 해도 농민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벌써 농토 투매현상이 벌어지고, 농기계를 반납하며 내년부터는 아예 농사를 짓지 않겠다는 농민이 속출하고 있다.

농민이 농사를 포기하게 되면 유예기간이고 관세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쌀시장은 당장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에서는 정부 · 여당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정부 · 여당은 정치력의 빈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실 이번 국회는 욕설과 몸싸움 속에서 끝나 겉으로 보기에는 과거와 달라진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예전의 국회와 교핳 수 없을 정도로 알찼다. 특히 민주당 개혁정치모임 18명 가운데 7명이 포진한 예산 결산위에서는 미일처럼 국무위원들이 진땀을 뺐다. 예전에는 야당 의원들이 밑천이 없어서 정회를 신청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정회가 단 한차례밖에 없었다. 그만큼 준비가 알찼다는 얘기이다. 민주당은 애초에 안기부법과 예산안을 연계한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야 했지만, 예산심의를 충실하게 하다 보니 일부러 의사진행 방해를 할 이유가 없었다. 언론에서 충실히 다뤄주지 않았지만, 예 · 결산위가 열리는 국회 제2회의실은 20일 동안 매일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야당 간사가 여당 간사와 우물쭈물 의사 일정을 잡아 항상 잡음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안기부장이 결산심의 때 물려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산심의 때마다 안기부자의 출석 여부는 향상 논란이 됐었지만 그 때마다 여야 간사가 합의해 안기부장은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안기부 예산의 경우 처음으로 거의 발가벗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올해 안기부 예산은 5천7백억원이었다. 안기부는 언제나 총액만 달랑 내놓고, 여야 의원들은 그냥 넘어가 주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예산 항목을 조목조목 따져들어 갔다. 안기부 직원이 5천명(넉넉하게 잡았을 때) 이라며 1인당 평균 연봉 2천만원으로 계산해 인건비가 1천억원, 5천명 가운데 외근이 절반이고 월급만큼 활동비를 쓴다고 가정하면 5백억원, 시설유지비 5백억원, 건물신축비 7백억원 등 상상할 수 잇는 모든 운영비가 2천7백억원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들이댔다.

결국 3천억원이란 막대한 예산을 어디에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민주당이 안기부법 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였다. 이밖에 내무부장관은관변 단체를 차츰 정리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유총연맹에 배정된 예산이 늘어났는지, 교통부장관은 왜 10조원 이상의 돈을 들여 경부고속전철을 꼭 건설해야만 하는지 설명하지 못해 쩔쩔맸다. 야당 의원들의 질의가 충실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번에 심의를 받은 김영삼내각은 실무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당 예결위 부간사를 맡은 이해찬 의원은“권위주의 시절의 장관들은 그래도 나름의 방어 논리는 갖고 나왔는데, 이번 장관들은 철학도 없고 기초적인 실무지식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라고 혹평했다.

상당수 장관들이 예결위심의 과정에서 예산 편성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시인했지만 민자당은 예결위를 끝내 날치기 통과시키고 말았다. 정치적 부담이 커서 안기부법을 개정할 수 없다면, 나머지 부별심의에서 명백하게 문민 정신에 어긋난 것으로 지적되고 여당도 인정한 부분을 모두 고쳤어야했다. 민자당은 그 부분을 모두 무시하고 정부 원안대로 날치기해 야당 의원들의 분노를 샀다. 더구나 민자당의 날치기는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단순히“법을 지키라”는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어서 민주당 의원들의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초에는 농촌 문제 큰 관심 없다가…
 민자당은 날치기를 하는 데도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민주계는 민정계와 공화계가 팔짱을 꼈기 때문이라고 하고, 민정계와 공화계는 민주계가 자기들끼리만 일을 처리하려다가 일을 망쳤다고 서로 불만늘 터뜨리는 양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이유를 보탠다면 국회 원내 활도에서 야당 의눤들의 기세에 눌렸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쌀시장 개방을 문제 삼아 장외로 나간 민주당 쪽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 민주당은 안기부법 개정에 훨씬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민자당이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려고 한 뒤에도 추곡수매량 등 농촌 문제보다는 안기부법 개정만 합의하면 국회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였었다. 그러다가 쌀 개방 문제가 심각한 국면으로 발전하자 발 빠르게 추곡수매량과 일괄타결하자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처음에는 농촌 문제가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또 그동안 쌀 개방 문제에 대해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쌀시장 개방만은 절대로 안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만 되풀이해 왔을 뿐 정부의 파행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등한히해 왔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들에게“이같이 냉업한 국제현실 속에서 민주당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 때문에 재야난 농민 단체에게 달려가도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다행히 민자당과 민주당은 아직까지는 쌀개방 문제와 국회 정상화를 연계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여야는 쌀 문제를 국회 안에서 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身土不與野 )가 아닌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