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두 朴’ 날자, 날자꾸나
  • 김재일 정치부 차장 ()
  • 승인 1992.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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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박철언 재기 안간힘… 최종선택 관심


 한때 뉴스의 초점이 됐던 박철언 의원과 박태준 최고위원은 현재 실종 상태나 다름없다. 경선 정국 이후 대부분의 언론은 그들의 동태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김영삼 대표가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마당에 그들은 더 이상 정치의 변수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후보 경쟁 대열에서 탈락한 이후 이종찬 후보를 적극적으로 밀면서까지 ‘김영삼 대통령후보’행을 가로막던 두 사람이다. 이제 여권의 모든 힘이 김후보에게 쏠리는 추세 속에서 반김영삼 진영의 선두에 섰던 두 사람은 지금 하종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두 사람은 재기할 것이가.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이가.

 박천언 의원은 최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초구청 맞은편 경목빌딩 3층에 사무실을 냈다. 여의도 63빌딩에 있던 ‘북방정책연구소’와 마포의 ‘통일복지연구소’를 합친 것이다. 사무실 이름은 아직 미정이다. 80여평의 사무실에는 컴퓨터 등 최신 사무기기들이 비치돼 있어 각종 통계 정보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이재원 처장·김철수 처장·정재수 보좌역 등 15명이 근무한다.

 한 측근은 “경비 절약과 업무 효율성 제고를 위해 두 개의 사무실을 합쳤다. 이곳에서는 박의원의 국회 활동을 뒷받침함과 아울러 사회복지와 통일에 관한 연구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무실 통폐합이 박의원의 세력 약화와 관련돼 있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새 정치이념의 실현을 위한 활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측근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의 통폐합은 박의원의 위상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의원을 돕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사기가 많이 꺾였다. 박의원 진영의 실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다른 데서도 엿보인다. 박의원이 실질적 소유주인 월간《민족지성》이 7월호를 끝으로 당분간 휴간한다. 잡지사의 한 관계자는 “한달 평균 5백만원의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휴간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의 개인 사무실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사이의 거리가 그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상징한다고 할 때, 박의원이 여의도에서 양재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것은 박의원의 위상과 관련해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고 말한다.

 

월계수회원, 1백70만에서 3만으로 줄어  

 그가 이끌던 월계수회는 전성기 때 전국적으로 1백70만 회원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3만명으로 줄었다. 한때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면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의 세력은 급격히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의원 측근은 “월계수회는 회원 각자가 긍지를 가진 자생집단이다. 절대 세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외형적인 규모는 줄었는지 모르지만 회원들이 동지적 유대로 결속돼 있다는 것이다.

 전성기 때와 비교해 약화됐다 할지라고 회원 3만의 단체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래서일까, 김영상 대표의 사조직을 총괄하는 최형우 의원은 지난 6월 중순 박의원과 만나 “같이 일하자”고 협조를 구했다. 박의원과 회동한 후 최의원은 “박의원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러나 박의원의 반응은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최근 ‘의회발전연구회’가 주최한 모임에 초정 연사로 참석해 “그 동안 김후보측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내가 주역이 돼서 또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해 사실상 김대표측의 제의를 거절했음을 시사했다.

 최근 비공식 석상에서 한 그의 발언에는 어떠한 여건 아래에서도 지금까지의 주장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삭풍과 눈보라를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처럼 진정한 국민정치 시대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지내고 있다” “국민정치·이념정치·개혁정치를 지지하는 이가 한 사람만 남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가겠다.” “나의 이미지를 격하하기 위해 오만가지 유언비어로 나를 피곤하고 지치게 해도 결코 나의 신념을 패배시키지 못할 것이다.” 얼핏 반김영삼 노선을 계속 걷겠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의 이런 태도는 “아직 감정적인 처리를 제대로 못한 데 따른 치기” 혹은 “힘의 향배에 따라 우왕좌왕 하지 않는 일관된 소신”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박철언·김대중 손잡을 가능성 배제 못해

 박의원의 계산은 무엇일까. 그는 왜 김대표측의 협조 요청을 거절한 것일까. 그는 우선 대선 정국의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며 불확실하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측근에 따르면 “대선  때까지 5개월은 긴 기간이다. 2~3개월 동안 지켜보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앞으로 대선에 영향을 줄 변수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다른 여권인사들의 일반적인 판단과 달리 그가 김영삼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강한 회의를 품었음을 뜻한다. 그는 김대표측이 내민 손을 덥석 잡을 입장이 아니다.

 박의원이 내거는 정치 구호는 “국민정치·이념정치”이다. 이를 실현하자면 정치권의 개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민주발전·국민화합·민족통일이란 시대적 과업을 위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이며, 이같은 이념에 동조하는 누구와도 협조한다는 것이 그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정가 일각에서는 “누구와도 협조한다”는 대목과 관련해 그가 민주당 김대중 대표와 손잡는 시나리오를 섣부르게 상정하기도 한다. 박의원의 한 측근도 “누구도 협조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베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지역 주민의 정서로 볼 때 민주당 김대표와 제휴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 어느정도 호감을 가진 점, 박의원이 과감하게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개성의 소유자라는 점 등이 그의 획기적인 방향 선회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게 한다. 오는 8월 민자당 지도체제 개편은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후보 경선 때 ‘8인 중진협의회’를 구성해 반김영삼 진영 후보단일화를 주도했고, 이종찬 후보로 단일화된 후 예상 외로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정가에서는 “밑지는 장사를 왜 하나”하는 시각이 주류였다. 그는 “이종찬 후보가 김영삼 대표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은 고정관념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과감하게 발상을 전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이의원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전력투구함으로써 그의 계보를 확실하게 결속시켰다는 점이다. 만약 이한동 의원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면 그의 계보는 지리멸렬해 없어졌을지 모른다. 일반의 고정관념을 깨는 무모한 속에서 그는 야무지게 실리를 챙긴 셈이다. 그와 정치적 입자을 달리하는 한 민자당 간부는 “당내 그의 계보에 속하는 10~15명의 의원·지구당 위원장 등은 결속력이 매우 강하다. 그는 계보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박의원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과 행동을 제약하는 요소로 노태우 대통령과 맺어진 인간적 관계와 3당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지은 목수 역할에 대한 애착이라고 밝힌 바있다. 경선 때 극도로 약화됐던 노대통령과의 관계는 그후 양자 회동을 통해 호전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후로 ‘의회발전연구소’ 주최 모임에 참가하고 전남 목포대 주최 세미나에서 ‘북방정책과 통일전략’에 관한 주제발표를 하는 등 크고 작은 모임에 나가 강연하는 데 열심이다. 측근들은 박의원의 이같은 행보가 “국민에 뿌리박은 작업”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업고 정치하는 데만 익숙한 그는 대중성 확보를 위해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김영삼 대표의 한 측근은 박의원이 결국 김후보를 위해 뛸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정치 현실을 그가 잘 안다는 것이다. 최형우 의원이 박의원을 만난것도 실질적인 협조 요청이기보다는 “큰 인물, 포용의 정치”를 내건 김대표의 이미지 관리적 측면이 더 많이 고려됐을 것이라며 박의원을 평가절하했다. 박의원의 최후 선택은 그의 재기와 관련해 주목해볼 만한 대목이다.

 김영삼 대표의 부상과 더불어 위상이 하강국면에 들어선 또 한사람은 박태준 최고위원이다. 한때 김영삼 대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그의 위상은 김대표의 위상과 반비례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박철언 의원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김대표가 권력의 핵으로 굳혀지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위상 하락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종찬 의원은 민자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박최고위원을 당 대표로 천거했다. 박철언 의원 역시 경선 이후 노대통령과 가진 회동에서 박최고위원을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천거했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가 될 뿐 발원권이 약화된 그들의 목소리가 당에 반영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김영삼 대표에 대항하기 위해 한배에 탔던 세 사람이 줄어드는 입지를 조금이라도 만회해보려는 몸짓정도로 정가에서는 받아들이고 있다. 한때 민자당에서 김종필·박태준 공동대표안이 검토됐으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포철 회장직’ 박탈이냐, 사임이냐 

 최근 박최고위원의 거취와 관련해 몇 가지 풍문이 떠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포항제철 회장직 박탈설이다. 그의 후임으로 민주계 ㅎ의원이 거명되기까지 한다. 박최고위원의 포철 회장직 박탈은 지난 5월19일 민자당 전당대회 직후 단행되려다 아직까지 미뤄졌다는 것이다. 이종찬 의원이 경선 거부를 발표한 5월17일 밤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격노한 노대통령은 박최고의원을 심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포철 회장직 박탈설이 그럴 듯하게 유포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박최고위원이 스스로 포철 회장직을 내놓고 본격적인 계보정치에 나설 계획이라는 설이다. 박최고위원은 집권당 최고위원직보다도 포철 회장직에 더 애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포철 회장 자리는 어차피 최고통치자의 의증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보고 박최고위원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정치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풍문의 배경은 박최고위원의 입지 약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7월8일 일본에 갔다가 지난 주말 귀국했다. 그의 일본 방문은 당내 흐름이 자신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형성돼가는 데 대한 일종의 항의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척주 질환인 ‘헤르마’를 치료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지난 6월 말 ‘한일과학기술재단’ 설립이 난관에 부딪히자 일본통인 박최고위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인 다케시타노부루와 새벽녘까지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심한 허리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일본측과 10억엔 규모의 재단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그의 측근은 일본측이 외무부와 협의한 2억엔 수준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이라고 말한다.

 8월 지도체제 개편과 고나련한 그의 거취 또한 관심사다. 한때 최고위원 수를 8인으로 늘리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됐으나 당내 분위기로 보면 지금의 당헌대로(5명) 갈 가능성이 높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박최고위원이 계속 최고위원직을 맡으면서 김윤환·이한동·이춘구 의원 등 증진이 나머지 자리를 채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곧 박최고위원의 강등을 의미한다. 그의 측근들은 박최고위원이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더라도 원칙·형식·체면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 그럴 경우 최고위원직을 거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저런 당내 사정을 감안해볼 때 어느 한쪽 세력이 강하게 반발할 여지가 있는 지도체제 개편은 없을 것 같다. 민자당의 한 간부는 “박최고위원의 포철 회장직이나 최고위원직 박탈은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무리수를 두어 말썽의 소지를 만들겠는가. 그러나 박최고위원도 공동대표를 노리는 따위 욕심을 버려야 한다. 민정계 관리자로서 그의 역할은 후보 경선 때 이미 끝났다”라고 말한다. 그는 박최고위원자리는 당외 영입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많다고 내다봤다.

 박최고위원은 김영삼 대표에 대한 지원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다. “당이 맡기는 일을 할 것”이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지도체제 개편 때 자신에 대한 대우를 봐가며 활동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식의 뉘앙스를 짙게 풍긴다. 이종찬 의원의 당 잔류로 그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졌다. 그는 이종찬·박철언 의원 등과 함께 비주류로 남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어할 것이지만 여당에서 비주류가 존재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은 정치권의 상식이다. 지금으로선 현상 유지가 그의 당면 목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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