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종 의원 주장 파문 확대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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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주)세모 유병언 사장 관련 ‘폭로 내용’ 논란

민주당 박찬종 의원이 오대양 미스터리극 재방송 (《시사저널》 제91호 참조)의 결정적 반전을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었다. 박의원은 지난 19일 의원회관에서 “오대양 사건 배후세력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실제 대표이자 (주)세모 사장인 유병언 목사와 관련돼 있다”고 폭로, 파문을 던졌다.

박의원의 폭로 내용 중 일부는 (주)세모 직원과 기독교 복음침례회 신도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있으며, 박의원은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

박의원은 ‘오대양사건 배후세력 관련 보도자료’ 제1항에서 “유병언이 목사로 있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대표자는 권신찬 목사이나 실제 대표는 유병언 목사이고” 등의 표현을 쓰고 있는데, 유병언 사장은 기독교복음침례회에 나간 적은 있으나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80년 이후 이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기독교복음침례회는 60년대 평신도운동에서 싹튼 교파로 개신교도 사이에 ‘삼각지교회’라고 하면 다 아는 제법 이름난 교회이다. 구원파 ·K파 등 사이비종교의 뉘앙스를 주는 이름은 종교계의 일부 반대세력이 붙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병언 사장은 어느 시기에 어떻게 기독교복음침례회와 관계를 가졌으며, 왜 그 교회를 나가게 됐고, 오대양사건의 ‘열쇠’로 지목되고 있는 송재화씨(41 ·여) 등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는가.

올해 50세인 유사장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종이비누 ·안전보트 등 수백 가지의 제품을 고안한 발명왕, 모범 새마을사업체 경영 중소기업인, 자연보호운동가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또 어려운 사정에 처한 사람들이 언론에 소개될 때마다 성금을 전달하여 ‘불우돕기 단골손님, 삼우트레이딩 유병언 사장’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몇 차례 실리기도 했다. 이 신문들 가운데 ㅎ일보에 나온 80년 6월8일자 기사는 “유사장이 한사코 자리를 피해 인터뷰를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사장은 현재 발명특허협회와 자연보호협회 이사이며 지난해부터 민자당 후원의 운영위원으로 위촉돼 있다.

유사장은 35세 때인 76년 삼우트레이딩을 인수, 김포공장에서 사업을 일으켜 자수직물 봉제완구 종이비누 컴퓨터모니터 페인트 유람선 스쿠알렌까지 업종을 확대해 현재는 4개의 공장을 갖고 있다. 유사장은 《시사저널》과 7시간 동안 가진 인터뷰에서 “국민학교 3학년 때 결핵늑막염을 앓으면서 많은 독서를 하게 됐으며 벽시계 등 주변의 모든 물건을 분해해보는 버릇이 생겼다”면서 “이때부터 종교에 깊이 빠지고 기계의 원리를 연구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사장은 사업에 손대기 이전 대구 YMCA에서 평신도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권신찬 목사를 만나 그의 사위가 됐다. 권목사가 장로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쫓견난 뒤 73년 둘이 함께 극동방송국의 간부일을 맡아 서울로 올라왔다. 3년 뒤 종업원 7명의 삼우를 인수한 유사장은 공장새마을운동가로 나서는 한편, 권목사가 뒤에 관계한 기독교복음침례회에 나가 ‘나의 경영철학’ 등 강연(설교)을 가끔 하게 됐다. 이것이 이 교회 신도들과 만나게 된 인연이다.

유사장은 신도들 중 일부를 회사 김포공장에 취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담기사로 자주 메스컴을 타던 그의 명성이 끝내 문제가 됐다. 80년말경 사원들과 일부 신도들이 권목사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유사장을 지도자로 섬기게 된 것이다. 유사장은 이 과정에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나오게 됐으며 장인인 권목사와 불편한 관계가 된 것으로 주변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들은 별도의 그룹을 형성하여 청담동, 즉 요즘 언론에 ‘세모타운’으로 불리는 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고 돈거래가 문란해지는 등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83년 1월23일 기독교복음침례회로부터 제명됐다. 이때까지 이들은 ‘통용파’란 이름으로 불리며 그룹을 이뤄 지냈다. “네것 내것 구별없이 물건을 같이 쓰자”는 등의 ‘공산주의식’ 교리를 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송재화씨는 바로 이 그룹의 한사람으로 ‘송언니’로 통한 신도이며, 나중에 수입품 판매업을 하면서 오대양 박순자씨와도 몇차례 거래한 적이 있는 것으로 수사 결과 밝혀졌다. 88년 사체를 얻어쓰고 도망갔다가 경찰에 붙잡힌 송씨는 통용파 시절 “삼우트레이딩이 어렵다”며 유사장의 이름을 팔아 신도 주변의 돈을 끌어들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송씨는 사채행방에 대해 “유사장에게 직접 주지는 않았으나 역삼동 개발실로 돈보따리를 그냥 갖다놓았다”고 진술, 경찰을 긴장케 했으나 돈보따리를 그냥 갖다놓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유사장과 대질결과 거짓말로 드러나기도 했다. 역삼동 개발실은 유사장의 삼우트레이딩과 (주)세모의 발명특허 업무를 전담한 사무실이었는데 지금은 기숙사로 쓰고 있다.

유사장은 송씨가 이 개발실에 83년 찾아와 “식모로 취직시켜달라”고 한 적은 있으나 회사에 근무한 적은 없으며, 더구나 자금담당 비서를 맡았다고 박의원이 주장한 내용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송씨 등의 통용파가 제명되기 직전인 83년 1월15일 밤 11시경 유사장은 이들의 간증장소인 청담동의 ‘태양열주택’에 가 좌담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 박의원이 폭로한 녹음테이프는 이때의 대화내용이다.

유사장은 이날 태양열주택에 들른 이유를 “통용파 여인들이 나를 예수라고 칭하는가 하면 나와 삼우트레이딩을 팔아 돈을 빌려 써 문제가 많다는 말을 듣고 ‘경고’를 하러간 것”이라고 밝혔다. 박의원이 공개한 녹취내용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도 자살할 수 있다면 …요럴 때 내가 죽어버리면 믿는 사람도 희망이 다 떨어질 텐데”라고 유사장이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유사장은 이 말을 “내가 예수가 아니라는 것을 순진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심정의 표현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박의원은 그러나 이를 4년 반 뒤에 일어난 오대양 사건과 연결, “유병언 ·권신찬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살할 수 없다’고 교화시켰기 때문에 오대양의 32명이 죽은 것은 절대로 자살이 아닐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가 없는 논리적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대화의 내용을 빠짐없이 녹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의원이 공개한 자료는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다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회사에서 이자 계산하고 약속증서 쓰고, 신협통해서도 빌려주고”라는 등의 내용으로 보아 개인들끼리 돈거래를 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요지가 아니었나 짐작될 따름이다.

박의원이 이 대화 내용 가운데 주목하는 것은 4년 후 오대양 집단변사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에 보이는 ‘개발비’란 단어를 유사장이 이 자리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또한 “개발비 같은 것 아는 것 그런 식도 언 정도 생각을 했었어요” 등으로 뜻을 알 수 없는 내용 속에 있는 단어이다. 유사장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테이프를 전체적으로 들어봐야 알겠지만 여기서 한마디 저기서 한마디를 짜맞추는 기묘한 방법으로 오대양과 연결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밖에 증거가 불충분한 박의원의 폭로내용 중 대표적인 것은 87년 8월5일과 6일, 그러니까 오대양사건이 나기 20여일 전 “오대양 본사와 K파의 유병언 목사와 신도들이 사용했던 역삼동 태양열주택간에 시외통화한 기록이 있다”고 한 내용이다. 박의원은 여기에서 청담동 태양열 주택과 역삼동 개발실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통화가 대전이 고향인 세모의 한 여사원이 오대양에 근무하는 고교동창에게 안부전화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는 박의원이 사실확인 없이 오대양사건을 연상시킬 만한 몇가지 요소, 즉 대부분 지난 수사과정에서 제기됐던 문제와 이번에 새로 입수한 녹음테이프를 묶어 성급히 언론에 폭로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결과 2천6백여명의 (주)세모 가족과 10여만명의 기독교복음침례회 교인들은 어마어마한 ‘타살 배후세력’이 되고만 것이다.

물론 검찰의 재수사 결과 유사장이 오대양사건과 특정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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