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外信 “화려한 날은 가고”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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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언론에 밀려 위축 부정확한 기사도 문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인 구로다 가쓰히로씨는 요즘 고민에 빠져 있다고 했다. 지난 80년초 당시 <교도통신> 기자였던 그는 약3년간의 특파원 생활을 내신에 대한 언론통제가 심하던 한국땅에서 보냈다. 82년 박세직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의 저녁해임건으로, 이듬해엔 수도경비사령부의 기구개편에 관한 보도로 특종 따냈던 그가 다시 한국땅을 밟은 것은 87년 6월 한국이 ‘민주화 홍역’을 치르고 난 뒤로부터 훨씬 후인 89년 1월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언론은 그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에 비밀이 없을 정도로 사회 구석 구석을 1백20% 파헤치고 있는”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 과거엔 특종도 하고 신바람 났는데 요즘은 워낙 내신이 잘하고 있어 외신이 재미가 없다”는 게 그의 고민 아닌 고민이다.

 이는 비단 구로다 특파원만의 고민은 아니다. 주한 미국문화원 내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미국의 소리>(VOA) 한국특파원 潢義淳씨도 “과거 바쁠 때는 정신이 없었으나 요즘은 일선에서 뛰는 일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한 유력 매체의 한국특파원은 “앞으로 갈수록 외신이 재미가 없어질 것이다. 사람을 구할 수 없어 큰일이다”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과거 정치적 혼란기에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서울주재 외신기자들이 지금은 취재는 둘째치고 숱하게 많은 매체에서 쏟아내는 보도내용을 확인하는 작업만도 벅찰 지경이 됐다는 얘기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정권시절 유형무형의 통제로 내신이 본래의 기능을 못하던 상황에서 외신은 나름대로 취재상의 반사적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6공화국 들어 내신이 이같은 굴레에서 벗어나 언론자유를 누리면서 외신은 이제 상대적인 위축감을 느끼고 있다.

특정 뉴스원 ‘배타적 접근권’ 상실
 외신기자들은 과거처럼 특정뉴스원(주로 야당정치인)에 대한 일종의 ‘배타적 접근권’을 상실한지 오래다. 과거 야당탄압 시절에는 언제든지, 심지어 가택연금 상태의 金泳三씨나 金大中씨도 만날 수 있었던 외신만의 특권은 이젠 지난날의 일화가 되었다. 요즘은 오히려 이른바 ‘뉴스메이커’에 대한 개별접촉이 힘든 경우가 많아 외신기자클럽의 이름으로 단체취재를 하게 된 형편이다.

 현장을 뛸 때도 외신기자들은 운동권 학생이나 재야인사들에 대한 취재가 예전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미국의 뉴스전문 방송 CNN 서울지국의 여특파원인 게이코 방 기자는 최근 시위 취재차 명동에 나갔다가 “양키 물러가라 !”를 외쳐대는 일단의 성난 데모군중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고 그는 씁쓰름해 했다. 9년째 한국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는 <워싱턴 타임스> 촉탁기자 마이클 브린씨도 “점차 커지고 있는 반외세 감정 때문에 재야인사나 학생 취재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외신기자들이 취급하는 뉴스내용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외신의 단골메뉴였던 인권문제나 학생데모 기사가 눈에 띄게 줄었다. 87년 취임해 만 3년 임기를 끝내고 이임하는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의 오에 시노부 특파원은 “6공 들어 데모 뉴스가 줄어든 반면 남북관계와 북방외교에 대한 뉴스가 주종을 이뤘다”고 지적한다. ABC 방송의 李要燮 서울지국장도 “과거 정치적 혼란기엔 데모 등 정치적 뉴스거리가 많이 나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CNN도 마찬가지여서 올 들어 데모뉴스가 나간 것은 단 한번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처럼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기사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과거 당국은 외신기자의 경우 본사에서 파견된 특파원은 물론이고 현지 고용기자도 내신기자처럼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유신 이후 법이 개정되면서 출판물조항에 “국익에 반하는…” 항목이 생겨 외신기자의 경우도 ‘문제성’기사가 있으면 법적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AP통신> 서울지국장을 역임한 황경춘씨(68·현 《타임》 기자)에 따르면 이 조항이 실제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5공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황씨는 “5공 때는 정치기사를 쓰고 집에 오면 전화통에 촉각이 곤두서곤 했다”고 술회한다. 정보부나 경찰 등 유관기관으로부터 언제 호출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80년 7월 황씨는 광주민주화운동 보도와 관련해 여러명의 외신기자와 함께 보안사에 연행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또 지난 79년 당시 <뉴욕 타임스> 서울특파원 이었던 沈 在?씨(50·<파이스턴 이코노믹리뷰> 서울지국장)는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의 회견기사가 문제가 돼 정보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 한국현대사 속의 숱한 사건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이를 기록한 서울주재 외신기자들은 이처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촉탁기자·현지고용기자 수두룩
 물론 외신기자들이 이승만 정권시절부터 5·16 직전까지 한때 ‘전성시대’를 누린 때도 있었다. 이 시절은 식자층 가운데 영자지를 보는 사람이 많았고,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던 때여서 내신만큼이나 서울발 외신에 신경을 썼다. 일례로 60년 정·부통령선거 유세 때 이승만 대통령은 유세용 특별열차에 외신기자용 자리까지 마련하기도 했다. 또 장면 총리는 송원영 비서실장을 통해 외신기자의 총리관저 출입을 자유롭게 했을 정도이다.

 현재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전시간 고용(full-time) 외신기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보통 외신기자는 본사에서 파견한 특파원과 현지에서 채용한 전시간 기자, 그리고 특정 매체와 일정기간 계약을 맺은 촉탁기자(스트링어)와 무계약의 프리랜서를 통칭한다. 지난 5월 현재 서울외신기자의 수는 1백49명에 이른다. 그러나 구미 각국 매체의 경우 본사에서 파견한 특파원은 AP로이터 AFP UPI등 세계 4대통신, CNN ABC 등 일부 방송과 <월스트리트 저널> <파이스턴이코노믹 리뷰> 등 인쇄 매체를 포함, 고작 14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현지 고용기자 내지는 촉탁기자들이다. 이는 <아사히> <요미우리>등 신문과 NHK 후지TV등 방송, 교도지지 등의 통신은 물론 심지어 <통일일보> 등 교포신문까지 특파원을 상주시키고 있는 일본 매체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서울에 부임하는 외신 기자들 사이에 한국은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아니다. <AFP통신>의 마이크 곤잘레스 특파원은 그러나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나라에 와서 취재하느라 경제공부를 많이 했다”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또 <AP통신>의 켈리 터니 지국장은 “피곤한 곳이긴 해도 왠지 모르게 지루한 도쿄보다는 낫다”면서 “한국이야말로 훌륭한 뉴스를 발굴할 수 있는 곳”이라고 평한다.

“정확성과 책임성에 문제있다”
 외신기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에 관한 소식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질 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에서 나쁠 게 없다. 그러나 자격을 갖추지 않은 외신기자가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왜곡 또는 과장보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얼마전 분신사건을 왜곡보도한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의 촉탁기자 치즈맨씨의 기사가 그 한예다. 한 일본특파원은 “서구매체의 일부 촉탁기자들의 경우 눈에 번쩍 띄는 뉴스를 흥미 위주로만 쫓고 있다”고 뼈 있는 지적을 했다. 촉탁기자의 경우 직업적 안정이 보장돼 있지 않아 때로 무책임한 기사를 써댈 소지가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어떤 촉탁기자는 수십개의 해외매체에 줄을 대고 기사를 팔고 있다.

 외신의 과장보도나 왜곡보도는 특히 경쟁이 치열한 통신사 기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5공시절 <AP통신>의 배리 렌푸르 서울 특파원은 시위뉴스를 과장보도했다고 해서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3년째 특파원 생활을 하고 있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서울특파원 데이먼 달린씨는 “일부 서울주재 외신기자의 경우 특히 정확성과 책임성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큰 사건이 있을 때나 몰려드는 이른바 ‘무리취재’(herd journalism)도 문제다. 이를테면 <뉴욕 타임즈> <LA타임스> <르몽드>등 국제뉴스에 대해 정평이 있는 유력 매체조차 도쿄에 상주특파원을 두고 무슨 일이 있을 때나 한국에 와서 취재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보도는 피상적이거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외신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주한 외신기자 감독 관청격인 해외공보관의 역할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해외공보관 외신과의 경구 5공까지만 해도 ‘문제성’기사 때문에 해당기자를 회유 또는 설득하느라 바빴지만 “지금은 가장 한가한 부서가 됐다”는 게 한 관계자의 얘기다. 특히 “반한적 기자들의 술상무 노릇을 도맡아 했다는 외보분석관도 이제는 할 일이 없어지게 됐다”고 이 관계자는 말한다. 외신과의 책임자는 “지금도 이들에게 취재협조를 하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오류를 지적하는 정도”라고 말한다. 외신의 이러한 위상변화는 민주화에 따른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외신기자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럼에도 아직 이같은 외신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게 우리 언론의 뿌리깊은 ‘외신사대주의’이다. 그다지 새롭거나 중요한 내용도 아닌데 단지 외국 유력 매체에 보도됐다고 해서 이를 각 신문 방송이 재인용 보도하는 관행은 아직도 제대로 시정되지 않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李龍鎬 기자(71)는 “어느 정도 참고로 하는 것은 좋아도 아주 특별한 것 외에는 외신 재인용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달린 특파원은 “부임 할 때부터 이상하게 느낀점”이라며 “아마도 3공 때부터의 타성인 것 같다”고 평했다. 외신이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보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나아가 세계를 어떻게 봐야 한는지 깨달아야 할 것임을 알려주는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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