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뿐인 ‘제2都市’ 釜山이 앓고 있다
  • 부산 박중환 편집위원대리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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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땅'을 찾아 떠나가고 향락 소비도시로 '퇴색'


열린 도시, 부산. 밖으로는 1876년 일제에 의해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열렸고, 안으로는 6.25전란 때 팔도에서 밀려든 피난민들을 가림없이 받아들이면서 열렸다.

  이렇게 모인 부산사람들은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어울려 사는 슬기를 일찍이 익혀 국제도시민다운 기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부산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시끌시끌하다. 거칠면서도 정이 많다. 웬만한 일은 모르는체 참아 넘긴다. 그러다가 한번 '부아가 치밀면' 독재정권도 단숨에 무너뜨리고 만다. 

  부산은 한국현대사가 굽이치는 곳에는 빠짐없이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제2의 도시'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는 '껍데기 항구도시'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金海공항에서 만난 택시운전사 김길훈(32)씨는 취재팀 일행을 태우고 도심으로 가는 도중,  묻지도 않았는데 대뜸 부산의 실상을 늘어놓는다. 그는 낙동대교를 건너, 사상로와 가야로의 교통체증을 보고서는 "서면로터리까지 갈라모 1시간은 걸릴깁니더. 둘러 가입시더"라며 차머리를 구덕터널쪽으로 돌려버린다. 목적지인 부산상공회의소에 도착하자 그는 "부산은 죽은 도시라요"라고 결론을 내버린다. 부산은 서울을 뺨치는 교통체증에다가 특유의 활기마저 잃은 듯 가라앉아 보였다. 

  부산商議의 자료를 보고서야 택시운전사의 넋두리가 푸념만이 아님을 알았다. 

  많은 기업들이 부산을 떠나 인근 경남의 창원이나 양산공단 등으로 가고 없었다. 

  지난 77년부터 89년까지 부산을 떠난 기업은 모두 2백47개로, 이들 기업의 고용자수는 3만4천1백27병. 이전기업을 연도별로 보면, 77년에서 86년까지 10년간 연평균 11개 남짓 했으나, 87년에는 16개, 88년에는 21개로 점차 늘어나다가 지난해인 89년에는 무려 99개로 급증했다. 요즘에는, 부산의 간판기업이었던 국제상사도 인도네시아 현지 합작공장 설립과 함께 부산공장의 규모를 줄이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脫부산 러시'는 올해에도 계속될것이 분명하다. 이대로 가면, 몇년안에 부산경제는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좌초하고 말 것이란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감은 부산시의 경제지표를 보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지난 85년도의 제조업 생산액을 100으로 볼 때, 전년에 비해 전국 평균치는 4.1% 증가했는데 부산은 6.4%줄었다.  서울올림픽 특수와 3저효과가 가장 높게 나타났던 지난 88년에는 전국 평균치가 전년도에 비해 13.4%나 늘어났는데도 부산의 경우는 오히려 1.1%가 줄어들었다. 전국이 호황을 누릴 때 부산은 불황에 허덕이는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하다.

  부산상의 사무국장 김정웅씨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부산의 산업비중이 전국의 29%를 차지했다"고 회고한 뒤 "지난 76년부터 정부가 국토 균형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산을 서울과 같은 대도시로 보고 공업을 규제했던 것이 부산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요"라고 설명한다. 그 때문에 부산은 근원적인 땅 부족에다가 유망첨단산업의 유치는 생각할 수 없었고, 한때 '輸出立國'의 선봉대 구실을 했던 신발 ·봉제 ·합판과 같은 저임금 노동집약형의 산업들만 정부의 사양산업 이란 낙인아래서도 살아남아 지역경제를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들 기업이 '脫부산 러시'의 대열에 나서게 된 것도 기존시설의 낙후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져 새로운 시설을 해야 하는데도, 부산에는 공장 지을 땅이 없기 때문이다. 사상 · 장림 · 신평 · 명지 등의 공업지역은 꽉 찼고, 땅값이 너무 비싸 영세한 기업으로서는 '그림의 떡'이라 한다.

 

"취직할 기업이 없다"

  동아대 회계학과 4학년생이라 밝힌 서남수(26)군은 "우리 과의 이번 졸업생 1백50명중 절반이 취업을 했는데 시험을 치르고 취직한 선배는 10여 명에 불과합니다. 부산에 우리를 수용할 기업이 몇개나 됩니까. 서울의 대기업은 필기시험에 합격해도 면접에서 떨어뜨려버리고…"라며 또다른 어두운 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부산이 당장 꺼야 할 '발등의 불'은 부족한 땅을 어디서 마련하느냐 하는 것이다. 

  부산은 4백만 인구가 짜임새를 갖추고 살만큼 넓고 반듯한 땅을 근원적으로 갖고 있지 못하다. 지형적으로 도시의 서 · 남 · 북 등 3면을 바다와 낙동강이 가로막고 있다. 또 동쪽에는 태백준령의 꼬리뼈격인 금정산이 넓게 버티고 있다. 거기에다가 또 도시 한가운데에는 몇몇 높은 산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이 때문에 부산의 市域은 서울의 86%인 5백25㎢에 이르나 이것저것 빼고 나면 개발 가능한 땅은 30%에 지나지 않는다. 절반 이상이 산자락을 타고 개발된 고지대이고, 그나마 반듯한 땅뙈기에는 도심까지 뚫고 들어온 경부선 철도용지와 군용지로 징발되어 있는 탓에 애당초 땅 부족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리한 입지를 갖게 된 것은 부산이 오랜 역사속에서 발전해온 항구도시가 아니라,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급작스럽게 조성한 짓궂은 숙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6 · 25 피난시절 판자집의 난립으로 도시계획은 '실종'되었고, 이를 대도시다운 모양새로 뜯어고치기 어렵게 돼 부산의 3대 고민거리인 교통난·주택난·공업용지난을 낳은 것이다. 

  취재일정 2박3일 동안 만난 부산의 도시계획 입안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속앓이를 하면서, 그동안 접근금지 구역으로 무관심했던 바다와 산의 개발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낙동강 하구의 개펄지역인 명지·녹산 앞바다 3백48만평을 메워 땅으로 바꾸는 사업은 이미 착수돼, 시공업체를 선정하는 단계에 와있다. 오는 95년 이 공사가 끝나면 이곳에 대규모 주택단지와 자동차 ·전자 ·신소재산업단지를 유치할 계획이라 한다.

 

'禁域의 바다를 시민 땅으로’

  부산시는 이 사업이 끝나면 매립지 앞바다 3백80만평을 더 메우면서, 이곳에서 마주 보이는 가덕도 주변 바다 7백76만평도 매립해 새 공항과 항공우주산업단지를 유치하고 환태평양시대에 대비한 자유무역항 설치도 구상하고 있다. 이보다 더 관심을 모으는 것은 영도와 송도 사이의 바다 1백88만평을 메워 인공섬을 건설, 다리를 양쪽으로 2개씩 놓아 해상신도시를 만든다는 것이다.

  부산시와 부산상의는 이곳의 매립이 끝나면 부산의 새 도심을 조성해 금융·무역·해운 등 고도서비스산업의 중심지로 육성시키고, 98년도 세계산업박람회를 유치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 28일에는 이 개발계획에 대한 환경평가결과 설명회를 겸해 한국·일본·호주·독일의 해양전문가를 초빙한 공청회를 텔fp비전 생중계로 가져 시민들의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安相英 부산시장은 "해양신도시를 민간자본으로 공영개발한다면 공사비를 빼고도 땅값에서 9천억원의 재정수입을 얻을 수 있으며, 이 돈을 서민생활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면 어려운 시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이런 부산시의 계획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거나, 해수면 매립공사 대부분이 그러했듯 환경변화에 따른 부작용을 더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다. 

  '낙동강 파수꾼' 김정한옹(82·소설가)은 “하구둑 때문에 낙동강 바닥에는 중금속이 쌓여 그나마 남아 있던 재첩도 먹지 못하게 됐다"며 송도 앞바다의 매립에도 개발의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부산시민들이 당국의 말에 무신경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선거 때면 당국의 사탕발림식 공약이 남발되어 야성이 강한 부산시민들을 그렇게 만들어 왔다.

  부산의 낮과 밤은 전혀 다르다. 부산의 밤은 유흥가의 휘황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찬란하다. 서울 영동 유흥가에 버금간다는 서면이나,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광안리 바닷가는 흥이 많은 부산사람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는다. 이곳에는 전혀 또다른 세계가 있다.

  조직폭력배의 영역쟁탈전이 난무하고, 마약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3월6일 자정께 부산의 폭력조직인 新칠성파 보스 김영찬(40)씨가 남천동 삼익아파트 앞에서 10여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받아 횟칼에 마구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두차례의 수술로 생명은 건졌으나 이 사건으로 부산 폭력조직의 내전은 다시 불붙었다. 지난해 11월2일 새벽과 밤에 광안리와 서면에서 조직 행동대장들 사이의 보복 칼부림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이후 4개월여의 냉전이 일시에 혈전으로 바뀐 것이다. 이를 전후하여 크고 작은 조직간의 전쟁이 이어져, 유흥가는 밤이면 '똘만이'간의 패싸움으로 잠잠할 날이 없다고 서면에서 카페를 경영하는 이가 귀띔해준다. 

  이 전쟁은 70년대 후반 이래 20세기파와 맞서 부산의 폭력계를 쥐어왔던 칠성파의 보스 이강한(45)씨가, 지난해 6월 재일교포 이정윤(57)씨가 밀반입한 엔화로 부동산 투기를 하다 구속되면서 표면화되었다. 보스인 이씨가 수배를 받고 서울에 도피하고 있던 중 중간보스격이었던 천달남(47)씨가 자신의 직할인 영도파를 이끌고 독립했고, 또다른 중간보스였던 김영찬씨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뒤따라 딴살림을 차려 新칠성파를 만들었다. 이두 중간보스는 그동안 보스로 모셔왔던 이씨가 한국프로씨름협회 간부직을 맡아 일본 오사카에서 천하장사 씨름판을 여는 등 국내외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서 상당한 자금을 받아온 것을 알고 있는데도 자신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었던 것이라고 경찰은 분석하고 있다.

 

조직폭력 · 마약으로 시끌

  이런 와중에 이씨는 지난해 연발 불구속 기소로 풀려났다. 그는 지난 3월14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자신의 항소심 2차공판장에 보디가드 3명과 함께 BMW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여유를 보였다. 공길용 부산시경강력 계장은 "이씨가 최근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으며, 조직내분의 수습에 나서고 있어 앞으로 큰 충돌은 없을 것으로 본다"며 "그동안 있었던 폭력사건의 범인을 검거하면 新칠성파와 영도파는 자연히 와해될 것" 이라 밝힌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어, 사건을 축소해서 덮고 넘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사고 있다. 부산의 조직범죄에 정통하다는 한 인사는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상어지느러미의 국내시장 공급권을 범죄조직에서 간여하고 있고, 최근부산에 성행하는 빠징고 등의 이권이 많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특히 일본 야쿠자 조직들이 부산에 히로뽕 밀매조직을 다시 세우고, 수산물유통사업에 손을 뻗치려 엿보고 있어 이대로 둘 경우 부산은 야쿠자의 대리전장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부산의 마약시장은 이미 넓고 두텁다. 히로뽕의 밀매조직은 유흥가는 물론이고 일부 포장마차에도 뻗쳐 암거래를 할 정도이며, 코카인까지 들여와 경찰을 긴장시키고 있다. 광복동에서 카페를 경영하는 장모(45)씨는 영업을 마치고 룸 청소를 하다 보면 히로뽕을 주사한 뒤 버린 것으로 보이는 1회용 주사기와 증류수병이 자주 나온다고 말한다. 지난 3월14일에는 정일남씨(50·부산 구포2동)가 다방에서 커피에 히로뽕을 타 마시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지난 3월6일 밤 횟칼에 난자당한 김영찬씨가 사고 직전에 술을 마셨다는 남천동 ㅌ카페는 얼마전 태광실업 대표 박연차(46)씨가 접대부 3명과 코카인을 홉입하다 붙잡힌 곳이기도 하다.

  부산은 열린 도시이다. 열려있기에 들어오지 않아야 할 몹쓸 것들이 먼저 들어와 부산 사람들을 멍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오륙도에서부터 해가 뜨면 부산은 새롭게 태어난 듯 또다시 밝은 날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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