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골에 울고웃는 정치
  • 보스턴ㆍ신중식 (편집자문위원) ()
  • 승인 1994.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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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승부 따라 국내정치 부침…정권 흔들리기도



 축구의 불모지 미국 땅에서 회오리치는 제15회 월드컵 열풍이 지구촌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축구가 바로 생활이고 축구로 밤을 지새운다는 남미는 물론 전세계 1백80여개 국가가 미국의 아홉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드컵 축구경기 결과에 따라 환희와 실망의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세계 아마추어와 프로 축구를 지배하고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회원국은 1백92개로 유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맹국 수를 앞설 정도로 조직이 방대하며, 특히 여섯번째로 4년 임기를 계속하고 있는 주안 아벨란제 회장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의 오만함은 이번 대회 개막 연설에서도 드러났다.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월드컵 대회를 공식 선언하면서 영어도 스페인도 프랑스어도 아닌 브라질 공용어 포르투갈를 사용한 것이다(포르투갈어는 전세계를 통틀어 네 나라만 사용한다).

 한국이 유치 경쟁에 나선 2002년 17회 월드컵 대회 개최국(16회는 1998년 프랑스) 선정도 그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이번 월드컵 개최를 성사시킨 것도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과의 6년여에 걸친 외교력과 아벨란제 회장에 대한 키신저의 집요한 접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88년 7월4일) 국제 축구연맹 집행위원회 투표 결과는 모로코 7, 브라질 2, 미국 10표였는데, 미식축구에 밀려 괄시받고 있는 ‘세계 최대 최고의 스포츠’ 축구를 미국 땅에 상륙시키려는 아벨란제 회장의 집념과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기본권 보장 없으면 축구도 안된다”
 축구광이기도 한 키신저 박사는 국제 정치의 최고 권위자답게 월드컵 축구가 색다른 견해로 분석한 바 있다. 키신저는 축구가 그 나라 국민성 못지 않게 정치체제와 특별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며, 그 나라의 특유의 문화와 종교로부터 싹튼 기질과 정열이 경기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유별난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체코와 헝가리가 각각 두 번씩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어떤 공산국가도 우승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개성ㆍ개인기ㆍ조직력이 생명인 축구를 꽃피우기는 어렵다고 했다. 국가 스포츠로서 집중 투자와 훈련이 따른다해도 틀에 박힌 구속과 계획은 팀의 조화와 효율성을 저하시키고 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반해 브라질과 프랑스 등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나라의 선수들은 국가로부터 강요된 구속과 압박에서 벗어나 있어 축구에 리듬이 있고 유연성이 가미된다는 것이다.

 키신저는, 브라질팀이 삼바의 황홀한 박자에 맞추어 춤추며 응원하는 스탠드의 환호와 화답하듯 축구의 멋과 맛을 최고조로 높이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자기들의 화려한 개인기에 도취해 간혹 시합의 목적인 득점을 망각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의 독특한 해석이 미국 월드컵에서는 어떻게 나나날지 궁금하다.

 그런데 동유럽과 소련 공산체제가 붕괴한 후 처음으로 월드컵 출전한 러시아ㆍ불가리아의 예선 경기 전적은 별로 신통치 않다. 키신저 식 관전평을 한다면, 이들 나라에서 반세기의 걸친 공산 독재 체제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종족간의 분쟁으로 인한 연방 해체, 정치적 불안 등으로 과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출전 선수단에 대한 집중적이 지원과 훈련이 부족했고, 따라서 결연한 의욕이 상실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월드컵 대회는 어느 국제 스포츠 대회보다 그 국제성과 출전국의 국내 지향적 상징적으로 잘 표현되는 큰 행사이다. 경기마다 시합 전 6만~9만 관중이 기립한 가운데 국가가 연주되고, 출전 국가들의 국기가 물결친다.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 또한 그 나라의 국기 색을 옮겨놓아 애국심을 고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모든 경기가 자기 나라에 생중계됨으로써 운동장의 열광과 환호, 분노와 탄식은 그대로 본국에 전달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나난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는 같은 회교 국가인 모로코와 기독교 국가인 벨기에 경기의 생중계가 일시 중단되자 흥분한 일부 팬들이 발전소를 세 곳이나 습격해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독일과 볼리비아 경기에서 멕시코 심판이 볼리비아 주공격수 에체베리를 퇴장시키자 흥분한 볼리비아 시민들이 멕시코 대사관에 몰라가 돌을 던지고 기물을 손상한 사건도 있었다. 이는 월드컵의 인기과 성격을 웅변해 주는 수백 가지 사계중의 일부일 뿐이다.

정몽준 축구협회장의 ‘다목적 월드컵’
 월드컵과 국내 정치와의 함수는 여러 나라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독일의 콜총리가 유럽의회 선거의 여세를 몰아 사민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시카고까지 날아왔고, 볼리비아의 산체스 대통령은 시카고ㆍ보스턴을 오가며 열띤 응원을 했다.

 콜롬비아의 경우 축구황제 펠레가 우승 후보라고까지 극찬했지만, 막상 루마니아와 미국에 연패하자, 월드컵 직전에 당선된 에르베스토 삼페르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는 선거운동 당시 마약 마피아들과 야당으로부터 퇴진 공세를 받은 데다 미국 정보조차 마약 관련 자금의 유입여부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어 월드컵 패배는 콜롬비아에 내연하는 불씨가 되고 있다.

 몇 달째 계속되는 농민들의 반정부운동, 정치 암살 사건과 납치 등으로 어수선한 멕시코에서 지난 65년간 계속 집권해온 제도혁명당의 재집권 여부가 월드컵 성적에 달려 있을 정도라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보도하고 있다. 최근 실시된 여로조사에서 3분의 1에 가까운 유권자가 멕시코의 패배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52%는 월드컵에서 16강 이상 진출하면 집권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도 싣고 있다(대통령 선거는 8월21일).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축구 골키퍼 출신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던 5공이 스포츠 공화국으로 희화된 바 있지만, 국민들의 월드컵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어느 때보다도 높다.
 5공 때는 대부분의 재벌이 강요에 의해 권력자에 대한 접근 수단으로 각 경기단체장을 맡으면서 수십억원씩 쏟아 보였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뒤 김영삼 대통령은 재벌에게 스포츠 못지 않게 이제부터는 문화ㆍ예술 부문에 투자하라고 권유하지만 일부 재벌의 경기 단체장에 연연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축구협회장에 대한 정몽준 의원의 집념과 계산은 더욱 색다르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정주영씨의 국민당 창당과 대통령 출마로 민자당을 탈당한 정의원은, 대선 패배의 충격과 아버지ㆍ현대그룹에 대한 제재에서 벗어나고자 축구협회 회장을 노렸다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는 국민당을 다시 탈당해 무소속으로 있으면서 국민적 관심이 높고 국제 교류가 빈번한 축구협회 회장 직을 비교적 쉽게 차지했다(김우중 전 회장의 사퇴는 그에게 행운이었다). 그는 1차 목표를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로 잡았고, 2차는 16강 진출, 그리고 최종 목표는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두었다. 그의 1차 목표는 카타르 도하의 기적으로 이뤄졌다. 6월24일 보스턴에서 있었던 볼리비아전에 정의원은 아버지 정주영씨와 장인 김동조씨(전 외무부장관)를 초청해 로열박스에서 관전하면서 누구보다도 소에 땀을 쥐고 피를 말리는 2시간을 겪어야 했다. 1심에서 3년, 2심에서 항소심에 7년 구형을 받은 다음날 비행기에 오른 정주영씨도 이 날의 경기 결과에 거는 기대가 컸을 것이라는 것이 정씨 부자를 보는 일부 인사들의 또 다른 관전평이었다.

 ‘제2 노총’의 탄생과 예상되는 파업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정부의 배려로 정의원은 고문으로 있는 현대중공업 등 현대 계열 3사의 증권시장 장외등록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한국의 16강 진출이라는 축포가 터지면 정의원과 정주영씨, 그리고 현대그룹이 국면 전환의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열광 속에 축구선수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독일에 패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당초 청와대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안 비준을 월드컵 기간에 강행하려다가 오히려 국민의 반감을 우려해 후퇴한 점도 월드컵과 국내 정치와의 함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월드컵 대회는 숱한 화제와 기록을 남기고 4년후 프랑스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본선 출전국이 32개국으로 늘어나는 다음 프랑스 월드컵 때는 남북한이 동시 출전하는 경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보스턴ㆍ申仲植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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