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 대구·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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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 수수께끼 5개월… 가출· 납치· 조난 등 설종 경위 오리무중

지방의회 시군의원 선거일인 지난 3월 26일 “도룡뇽알을 찾으러 간다”며 분유깡통과 막대기를 들고 마을 뒤편 와룡산 계곡으로 간 대구 성서국민학교의 다섯 어린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을 달랑 넣고 논둑길을 거쳐 마을 저수지를 지나 재잘거리며 산으로 올라간 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린 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사람은 많지만 그 뒤 그들의 모습을 확실히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찰은 어린이들이 사라진 뒤 5개월여 동안 전담반을 편성해 대구 시내는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아이들의 생사 여부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생사는 고사하고 아이들이 가출을 했는지 납치를 당했는지조차 가려내지 못했다.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있지만 실낱같은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 채 애만 태우고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갖고 대대적으로 아이들 찾기 캠페인을 벌여 초기에는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랐으나 이제는 수사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제보나마 뜸한 실정이다.

수사가 원점에서 맴돌자 당연히 경찰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실종된 아이들의 부모는 경찰이 처음부터 가출로 단정해 범죄수사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찰의 고충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실종된 경위가 지극히 불투명하다. 경찰은 수사방향을 △단순 가출 △와룡산에서의 조난 △인근 저수지에서의 익사 △범죄꾼에 의한 납치 등으로 잡았으나 그동안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그 어떤 경우도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실종된 날의 행적과 목격자들의 증언, 그동안의 수사과정을 추적해보자.

사건 당일 8시께 실종된 우철원(13· 6학년) 조호연(12· 5학년) 김영규(11· 4학년) 박찬인(1O· 3학년) 김종식(9· 3학년) 군과, 나중에 와룡산에 따라가지 않아 화를 면한 김태룡군(1O· 3학년) 등 어린이 6명은 호연이네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연이네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청년에게 두차례 “시끄러우니 나가서 놀라”는 핀잔을 듣고 태룡이는 아침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5명은 분유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와룡산으로 향했다.

뒤처졌던 태룡이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급히 아이들을 뒤쫓아가 와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만났는데 와룡산에 쫓아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 혼자 떨어졌다. 또 호연이 형인 무연군(중학교 1학년)도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룡뇽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다급한 비명소리 두 번 들었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일을 하는 아주머니도 9시께 아이들을 목격했다.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다섯 아이들과 마주쳤다. 그 때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하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지나쳐갔다.

이때까지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아이들은 전혀 가출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출할 아이들이 2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목격자들의 증언은 아이들을 봤다는 시각이 다소 엇갈린다. 철원이와 같은 반인 김경열군과 이태석군은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 했다. 김군 등은 점심 먹기 직전 철원이가 아이들과 산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또 외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2시께 다섯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이 학교 4학년에 다니는 함승훈군도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아파트에 사는 함군도 이날 동네 형들과 함께 도룡뇽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함군은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위 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차례 들었다. 함군은 아래에 있는 형들에게 비명 소리를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못 들었다고 대답했다. 함군은 그 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30분쯤 됐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부터였다. 김종식군의 어머니 허도선씨와 김영규군의 어머니 최경희씨는 공교롭게도 함승훈군이 산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11시30분께 똑같이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아이들을 찾아나서 5명의 아이들이 함께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노는데 정신이 팔려 좀 늦어지려니 하며 집에 오면 주의나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이 경찰에 신고한 것은 그날 저녁 7시50분께로 6시께부터 와룡산 쪽으로가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난 뒤였다. 경찰은 일단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은 것으로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다. 이어 4월22일까지 39회에 걸쳐 연인원 2천5백여 명을 동원해 산악수색을 했으며 세 차례 헬리콥터 정찰을 했다. 와룡산은 해발 2백99m 밖에 안되고 겨울이 채 끝나지 않아 산이 황량했기 때문에 헬기로 정찰할 때는 산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까지 훤히 보일 지경이었으나 아이들의 신발 한짝 발견하지 못했다. 또 잠수부를 투입하고 인근 주민의 협조를 구해 근처 저수지 4곳을 낱낱이 조사했으나 역시 허사였다.

경찰은 가출. 부모들은 납치에 비중 둬
수색작업에 진전이 없자 경찰의 수사방향은 단순가출로 기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종 사흘째인 28일부터 아이들이 대구 시내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목격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은 아이들이 집을 나갈 당시는 가출의사가 없었으나 그 뒤에 상황이 변한 것으로 보았다.

3월28일 김종식군과 3학년 같은 반인 김보경 서윤희양은 아이들이 실종된 다음날인 27일 오후 6시께 옆 마을인 신당동 슈퍼마켓 앞에서 종식군 등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김양 등은 은행에 심부름을 갔다가 은행 문이 닫혀 되돌아오고 있는데 아이들 5~6명이 라면을 사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의 한 명이 종식이 같았다고 얘기했다. 또 아이들과 같은 마을에 사는 노모군(무직· 19)은 김종식군을 28일 시내 전자오락실에서 만나 1천원을 줬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연 3만여 명을 투입해 대구 시내에서 신축공사중인 건물과 폐차장 비닐하우스 움막 등 집을 나간 어린이들이 있음직한 곳을 수색하는 둥 가출 쪽으로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부모들은 처음부터 아이들이 가출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부모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어느 부모 못지않게 사랑을 쏟아왔고 모두가 화목한 집안이기 때문에 애들이 가출할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아이들이 집을 나가기 전에 대부분 운동복 차림에 돈 한푼 가지고 가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아이들이 사전에 모의해 가출을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수사의 초점을 납치쪽으로 맞춰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가 계속 가출 쪽으로 기울자 부모들은 경찰이 자기들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납치 가능성을 말해주는 정황은 애써 외면하고 가출을 입증하는 증언과 정황만을 부풀려 강조하며 수사를 한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찰을 비난하기도 했다.

부모들은 특히 아이들이 실종된 지 4일째인 30일(당시에는 언론에 아이들의 연락처가 보도되기 전이었다)에 종식이와 호연이네집 등에 잇따라 괴전화가 걸려왔으며 4월4일에는 종식이 외가로 돈을 요구 하는 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점을 들어 납치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종식이 외가 전화번호는 종식이 아버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단순한 장난전화로만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또 경찰이 새 학기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종식이 얼굴을 잘 모르는 반 여자애들이 “종식이인 것 같았다”라고 한 얘기는 믿으면서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함군의 얘기를 일축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결국 5월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이 수포로 돌아가고 가출 가능성을 말해주는 유력한 증인이던 노군이 경찰 수사결과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경찰과 부모들 간의 대립은 일단락되고 수사의 방향은 납치 쪽으로 급선회하게 됐다. 수사는 시국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주춤거리다가 지난달 6일 대구시경 형사 기동대 50명과 달서경찰서 형사 4명 등 54명으로 특별수사대가 편성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는 듯했다. 이들은 실종 어린이 가족 한명씩을 대동하고 서울 부산 광주 대전 인천 등 대도시를 7~10일 동안 집중적으로 수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처음부터 수사를 맡아왔던 달서경찰서 형사계 주동철 경위는 “숱한 사건을 맡아왔지만 이런 사건은 처음이다. 수사를 해보니 가출 납치 조난 등 어떤 경우도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모순투성이다”라고 얘기했다. 주 경위는 또 “가족들은 납치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번에 앵벌이 등 거리의 아이들을 수사해봤는데 그들과 범죄조직과의 고리는 의외로 약했다. 그 아이들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낙도의 고깃배 등에 팔려가지 않았나 해서 흑산도 완도 등도 찾아가봤지만 험한 뱃일에 아이들이 어떤 용도로든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 경위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국에서 한다하는 50여명의 점쟁이도 만나봤는데 역시 별 성과가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장난 전화 폭주. 경찰 수사의욕 잃어
이번 사건에서는 장난전화가 의외로 많아 수사에 혼선을 빚고 절망에 빠진 가족들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다. 지난 5월4일 문화 방송사에서 생방송으로 ‘실종 성서국교생 찾아 주기’ 여론광장을 방영했을때 종식이와 영규라는 아이가 각각 전화를 걸어와 가족들이 “살아 있는 것만이라도 확인돼서 다행이다”라고 기뻐했으나 경찰의 수사결과 터무니없는 장난전화로 밝혀졌다.

“깡패에게 잡혀 있다”고 말하며 끊어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종식이의 전화는 사실은 20대 후반의 호스티스가 자기 아들을 시켜 한 전화였다. 이 호스티스는 신고 접수 대에 전화를 걸어 “현상금이 얼마냐” 등 쓸데없는 소리만 묻다가 접수요원이 퉁명하게 끊어버리자 화가 나서 자신의 아들에게 그 같은 일을 시켰다고 한다. 또 접수대에 걸려왔던 영규의 전화는 할 일 없는 20대가 ‘재미삼아 어린아이 목소리를 흉내내 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날 방송이 끝난 뒤에는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 다섯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며 “ 5일 새벽 5시 아이들을 실종지점인 와룡산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 “ 4일 오후 4시30분 성서국민학교 근처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아이 부모들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성서국민학교 앞에 아예 이부자리를 갖다놓고 밤을 꼬박 새우며 기다렸으나 전회를 건 남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은 다섯 아이의 집에 걸려오는 전화는 모조리 추적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걸려온 전화의 태반이 장난전화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를 찾는 데 온 신경을 빼앗기다 보니 부모들과 수사관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정신 이상자에게 휘둘리기도 했다. 지난 6월 웬 남자가 찾아와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부모들은 경찰에 연락해 수사관들과 함께 그 남자를 따라나섰는데 대전까지 가서 사방으로 끌려 다니면서 골탕을 먹었다. 나중에 경찰의 신원 조회 결과 그 남자는 정신이상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기족들은 가족들대로 경찰은 경찰대로 모두 맥이 빠져 있다. 특히 경찰은 거의 수사에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경찰은 지금부터라도 그동안의 수사결과를 백지로 돌리고 아이들의 실종 경위부터 차근하게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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