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랑 요란한 소형차…경쟁력을 벗긴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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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부문 전문가 진단 / 색깔과 겉모습 엇비슷…엔진 성능은 제각기 장단점…첨단 장치 제 구실 못해

기아자동차는 새로 출시한 아벨라의 가격을 정하는 데 마지막까지 애를 먹었다. 현대자동차의 엑센트보다 3일 앞서 신차 발표회를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차의 가격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행사 당일 이 회사는 기자들에게 아벨라의 가격대를 공란으로 표시한 보도자료를 건네주었다. 회사 관계자들은 이 눈치 보기를 두고 ‘마치 입찰 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대표적인 과점 시장인 탓에 자동차산업에서 지금까지의 경쟁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만 최근의 양상은 과거와 크게 다르다. 회사의 사활을 건 경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격심한 경쟁의 계기는 우연히 찾아들었다. 자동차산업이 싹튼 이래 최초로 승용차 3사가 동시에 새 소형차를 내놓은 것이다. 기아가 지난 3월29일 아벨라 신차 발표회를 했고, 현대가 4월1일 엑센트를 선보였다. 대우는 5월 중순 무렵 시에로라는 모델을 내놓는다. 이는 각사가 신차를 내놓으면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3사가 모두 올해 상반기를 승부의 중요한 고비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우연만은 아니다. 작은 차들의 큰 전쟁은 자동차 시장에 일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우선 국내 승용차 시장의 수요 증가세는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 과거 연간 20%를 넘어섰던 증가세는 92년부터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95년 이후면 또 그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승용차 보유 대수는 천명 당 약 백명. 전문가들은 천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2백50명 정도가 됐을 때 시장이 성숙한 것으로 본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0년께에는 거의 성숙 단계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또 승용차는 이미 어느 정도 보급된 상태다. 이에 따라 올해 들어 구형 차를 새 모델로 바꾸려는 수요가 신규 수요를 앞질렀다. 올해는 승용차가 본격 보급된 80년대 중반에 생산된 차량의 수명이 거의 다된 시기이다.

승용차를 바꾸려는 고객은 처음 차를 사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소비자들이다. 결국 앞으로 5년 남짓 동안 승용차 시장에서 70년대 초반 이래 지속돼온 현대 · 기아 · 대우(초기에는 새한자동차)의 ‘빅3’ 경쟁이 결판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새 모델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는 지금까지의 관행은 곧 깨질지도 모른다. “새 차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경쟁사 모델이 차지하던 시장을 얼마나 잠식할까 하는 것이 관심사였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시장 자체가 계속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기아경제연구소 이대창 계량분석실장의 말이다.

성능 평가 결과 극비…소비자 정보 부족
신규 수요가 급증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한 차종이 성공하면, 이와 경쟁하는 모델의 대실패로 귀결될 수도 있게 되었다. 승용차 대중화를 선도했던 엑셀 · 프라이드 · 르망이 물러가고, 거의 같은 시기에 엑센트 · 아벨라 · 시에로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세 회사가 내놓은 신차가 소비자의 기호를 얼마나 만족시켜 줄지를 판단할 수 있다면 이 싸움의 결과를 대강 짐작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자가 어떤 차의 성능이나 다른 조건이 가장 좋은지를 미리 알 방법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새 차가 출시되면 매스컴과 각종 단체에서 차이 성능에 순위를 매겨 지표를 제공해준다. 반면 한국은 자동차 출고 전에 성능을 평가해 일정 기준치를 통과하면 그만인 사전인증제를 채택하고 있다. 교통부 위탁으로 완성차의 성능을 시험하는 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의 평가 결과는 극비에 속한다. 이 연구소의 신재승 연구원은 “현재 32개 항목에 대해 시험하고 있지만 각 기준을 넘어섰는지 여부만 판단한다”라고 말한다.

국내 승용차 제조업체들이 거치는 그 다음 시험 과정은 언론의 검증이다. 이들 회사는 자동차 전문기자에게 시승하게 하고 이들의 의견을 구한다. 기자들은 구조 · 성능 등에 관해 시승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자료 역시 회사가 홍보자료를 만드는 데 참고가 될 뿐 소비자에게 유용한 정보는 못된다. 결국 소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의 단편적인 소문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은 각 분야 전문가들을 통해 국내 소형차와 소형차 회사의 경쟁력을 따져봤다. 이들은 각 승용차 제조업체들과는 무관한 이른바 ‘재야 전문가’들이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해당 업체 전문가들의 반응도 살펴봤다. 

■색깔 : 우선 새로 등장한 소형차들의 색상은 눈에 띄게 밝고 독특하다(시에로의 색에 대해서 대우측은 아직 함구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새로 등장한 소형차들이 도시의 색깔을 바꿔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크다. 현대자동차는 젊은이들의 색감을 찾아내기 위해 색과 관련된 결정을 젊은 실무자들에게만 맡기기도 했다. 기아도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색상을 찾아야 한다는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그 결과 등장한 공통적인 색이 진분홍 · 남청 · 연두 · 자주색이다.

이 색상들은 한결같이 젊은 계층과 여성을 의식한 색이다. 엑센트와 아벨라 모두 사생활을 즐기는 데 중점을 둬 기획한 차라는 것을 암시한다. 신차가 시판되기 전에 각사가 내놓은 색상 가이드를 검토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색 전문가 김시옥씨(김시옥색채연구소 소장)는 “문제는 색상 코디네이터들이 의도한 대로 실제 색깔이 나와주고, 상당 기간 원래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도료와 도장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기획 의도를 살릴 수 없다는 지적이다. 승용차 업체들은 이 방면의 기술이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시인한다.

■디자인 : 엑센트의 겉모양(스타일링)은 현대가 스스로 디자인한 것이고, 아벨라는 미국 포드사 작품이다. 현대는 74년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를 설계한 후 계속 현대와 관계를 맺어 온 이탈리아의 차 디자이너 주지아로씨의 설계를 참고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92년을 기점으로 승용차 외양의 유행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각진 형태에서 전반적으로 둥그스럼하고 중후한 형태로 돼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 회사의 소형차들은 당분간 서로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구동 장치와 기본 성능 : 3~4년 전부터 독자적으로 엔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자동차 3사는 앞으로 자기네가 만든 엔진을 달 예정이다. 엑센트는 스쿠프의 알파엔진을 개조한 뉴알파 엔진을 장착했다. 기아나 대우도 곧 자체 개발한 엔진을 달 계획을 갖고 있다. 이재일 기아자동차 중앙기술연구소 소장은 “승용차 3사는 엔진 독자 개발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떤 특성을 강조할 것이냐를 고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엑센트와 아벨라는 중 · 저속에서의 성능을 향상시켜 연비를 높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엔진과 변속기 등을 포함한 구동장치의 성능은 차 전체의 성능을 좌우한다. 국산 소형차의 구동장치는 단시간 내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다. 소형차 구동장치의 성능은 세 회사 간에 우열을 따지기가 무척 힘든 편이다. 전문가들은 제품의 성능이 각기 독특하다고 본다. 월간 《자동차 생활》유 명 주간은 3사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현대 차는 가볍고 가속 능력이 좋으나 불안정하고, 기아는 안정감은 좋으나 가속 능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대우는 승차감은 좋으나 차체가 무겁고 잔 고장이 많다.”

■첨단 장치 : 자동차의 전자 제어장치를 뜻하는 첨단 메카트로닉스 분야에서는 아직도 서양의 고급 승용차에 많이 뒤진다는 것이 중평이다. 이번에 출시되는 소형차들은 에어백과 ABS를 선택 사양 항목으로 제시해놓았거나 그럴 계획이어서, 첨단 장비에 막 눈뜨기 시작하는 소비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첨단 장치와는 달리 눈에 띄지 않는 전자 제어 장치들이다. 정비사들 사이에서 ‘빨랫줄’(전기줄)로 통하는 전장품들과 이를 통한 전자 제어기능은 우리나라 소형차 소비자들을 가장 골탕 먹이는 부분이다.

첨단 메카트로닉스 전문가인 이봉춘씨(에임전자 대표)는 그 원인을 “원가를 절감하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에서 승용차 제조업체들이 납품업체로부터 값싼 재료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더욱이 차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고, 일부 첨단 기능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것도 국산 소형차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장인 이대운 상무는 각 기업들이 첨단 메카트로로닉스에 신경을 씀에 따라 이미 큰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케팅 전략 : 세 회사의 경쟁력을 가름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각사의 마케팅 전략이다. 승용차 생산업체들은 과거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던 시기에 비해 판매 활동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각 회사는 대리점 판매에서 판매 전담 회사 체제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앞으로는 선진국에서처럼 전문 딜러 제도가 도입될 가능성도 있다. 마케팅 전문가인 김영한 하이테크 마케팅연구소 소장은 “대우처럼 기술력이 떨어지는 회사가 최근 마케팅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싸움의 귀추가 주목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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