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극비 추진중”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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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중재자…“오학겸 부주석 ‘밀사’로 방한”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최고위층 차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키기 위한 막후 접촉이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정부는 남북한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을 중재자로 내세워 이를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해 왔으며, 지난번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황병태 주중대사의 발언 파문으로 한동안 주춤하기도 했는데, 최근 중국측 ‘밀사’의 한국 방문을 통해 새롭게 재개되고 있다고 관측된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정부 최고위층 막후 접촉의 실체는, 정권 핵심부 동향에 정통한 전직 고위 관계자에 의해 최근《시사저널》에 알려졌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한 이 관계자는 “3월 하순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최대 목적은 중국을 중재자로 내세워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하는 것 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중국측은 이 문제와 관련해 이미 북한측의 승낙을 받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대통령의 방중 목적은 실현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라고 밝혔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북 정상회담 문제는 대통령을 수행한 비서들 사이에서도 극비 사항에 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황병태 주중대사가 ‘중국 역할론’을 크게 부각해 발언함으로써 정상회담 문제가 찬물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중국, 미국의 반발 우려해 ‘운신 폭’ 좁혀
 물론 당시 황대사의 발언 내용 중에 정상회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발언 중 ‘우리 외교가 이제 미국·일본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국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수정돼야 한다’는 내용은 중국의 향후 역할을 지나치게 암시함으로써 중국측을 오히려 당황하게 했다는 지적이다. 중극측이 우려했던 것은 미국의 반발이었다. 즉 미국이 중국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인식하여 저지하고 나설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뻔한 정부 최고위층의 막후 노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조짐이 새롭게 포착된 것은, 오학겸 중국 인민정치협상회 부주석의 한국 방문에서였다. 한승주 외무부장관 초청으로 4월10일부터 8일간 한국을 방문한 오학겸 부주석의 표면적인 방문 목적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간의 협력방안 모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전직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오학겸 부주석이야말로 그동안 극비리에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온 중국측 막후 실력자”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오부주석이 중국 정부 현직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현직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중재역을 수행할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한국 방문은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추진하기 위한 정부 최고위층의 의지의 산물임과 동시에, 이와 관련한 중국 정부의 메시지 전달이 주목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중국을 중재자로 한 남북 정상회담 실현을 위한 노력을 언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추진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관계 전문가들은 적어도 이러한 노력을 상당히 오랜 기간 비밀리에 추진해 왔을 것으로 본다. 한 전문가는 “지난해 한승주 장관이 네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 핵 문제가 국제 사회의 논쟁점으로 떠오른 이래 중국측이 한국과 북한 사이에서 막후 중재 노력을 해왔다는 점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중국의 막후 노력과 관련해 전문가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북한 핵의 실체와 관련해 지난해 연말과 올해 2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중국측의 메시지 전달이었다. 《시사저널》제230호 'YS 순방외교 동북아 주도권 노린다‘ 참조).

 비슷한 시기에 중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막후 접촉을 시도했음이 밝혀졌다. 주요 내용은 김일성 주석을 중국으로 초청하는 형식이었는데, 지난 1월 중국을 방문한 황장엽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외교 위원장과 2월 24일 평양을 방문한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이숙정 부장을 통해 방중 초청이 이루어졌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북경 외교가에는 김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김주석도 중국을 방문해 북경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정부의 최고위 차원에서 극비로 추진해온 남북 정상회담 관련 내용의 일부가 언론에 흘러나간 것으로 관측한다.

 “3월말 이루어진 김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핵 문제나 경협 문제보다도 남북 정상회담 실현이 최대 목적이었다”라고 전직 고위관계자는 말했다. 실제로 강택민 주석과 가진 정상회담 내용을 살펴보면 김대통령이 강주석과 합의한 내용의 핵심이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중국측의 중재 역할에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 쉽게 확인된다.

 즉 3월28일 오전 이루어진 단독 정상회담에서 강택민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북 관계 개선의 최대 장애 요인은 한국이 미국 일변도로 기울어져 북한을 고립시키고, 북한의 체제 붕괴를 통한 흡수 통일을 노린다고 북한이 오해하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최대 장애요인을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북한이 우리에 대해 가진 불신을 해소하는 데 필요하다면 본인이 직접 북한과 미국간의 관계 개선을 적극 도울 수 있다”라고 화답하고, 북한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측이 중재에 적극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강주석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즉 우리가 중국에 남북관계의 중재자로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하자, 중국은 우리에게 북한과 미국·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중국측 입장의 핵심에 대해 3월30일 기자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많은 사람이 중국의 입장을 설명할 때 대화라는 문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데, 오히려 안정이라는 문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우선적으로 당사자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최고위층이 언급한 ’당사자 간의 대화‘는 결국 남북 정상회담을 암시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측이 남북 정상회담 실현에 대해 가진 의지 못지 않게 중국측의 중재 의지도 어느 때보다 높은 것으로 본다.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둘러싸고 미국과 내면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중국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인권 및 무역 문제로 미국과 불편한 관계이기 때문에 중국의 이러한 역할이 필요 이상으로 부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황대사가 강조한 중국 역할론이 정상회담의 내용적 핵심을 정확히 드러냈는데도 역으로 중국의 운신 폭을 제약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 말~7월초에 수면 위로 솟구칠 것”
 그러나 그가 제기한 중국 역할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상황은 중국 역할론이 더욱 절실해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4월15일 정부가 미·북한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고집해온 특사 교환을 철회한 이후, 이러한 상황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특사 교환 주장이 미국식 해법에 의존한 정상회담 구도였다면, 이것이 좌절된 지금은 중국식 해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바로 황대사가 말한 외교 축의 변화이다.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에 집착하는 이유 중 쉽게 상정할 수 있는 것은 국내 정치의 국면 돌파용이라는 관점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남북 정상회담은 앞으로 이루어질 한반도 주변 질서 재편성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할 경우 이는 곧 북한과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교차승인으로 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상회담 실현에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는 전문가들은 대개 그 시점을 6월4일의 최혜국 대우 갱신에 합의해 미·중 관계가 지금보다 우호적으로 회복된 이후가 되리라 본다. 6월말~7월초면 남북 정상회담이 수면 위로 솟구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비관적인 전망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미·북한 관계 개선이 한국의 중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급진전할 경우로,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이 한국과 정상회담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은 오히려 한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현재의 전략을 계속 고수할 수도 있다. 6공화국 당시 한국의 북방정책에 당했던 쓰라림을 갚으려 시도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한편 중국을 중재자로 한 정부 최고위층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외무부 고위 당국자는 이를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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