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 하얼빈ㆍ박상기 사회부차장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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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 罪證진열관’현재취재-“소름 끼치는 일제의 만행 잊지 말아야”

중국 대륙 곳곳에는 아직도 잔혹한 일제식민통치의 상처들이 남아 있다. 특히‘동북3성’이라 부르는 길림성ㆍ흑룡강성ㆍ요령성의 만주지방은 악명높은 일제 관동군의 무단통치 아래 있었으니 어느 지방보다 그 상흔이 깊다.

 흑룡강성 성도 하얼빈의 핑팡(平房)구에 있는‘731부대 罪證 진열관’은 일제의 만행이 참혹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지옥도’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부대는 일본 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치(?村誠一)의 《악마의 포식》이나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鄭賢雄의 《마루타》의 소재가 된 생체실험 및 세균전 특수부대이다. 8·15이후 공개된 비밀문서에 의하면 이곳에서 1938년에서 1945년까지 중국인 한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 등의 포로ㆍ항일운동가 3천여명에게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생체실험이란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약물실험·병기성능실험 등을 해서 궁극적으로 세균무기를 생산하자는 것이었다. 그 실험대상자를 관동군은‘마루타(丸太)’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통나무’였다.


전황 불리해지자 세균무기 개발에 혈안

 731부대는 본래 6㎢의 넓은 면적에 철옹성같이 세워졌지만 지금은 일부 본관건물과 가스발생실ㆍ동력실 굴뚝만이 남아 있다.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진 본관2층건물은 현재‘하얼빈 17중학교’교사로 쓰이고 있고, 그 건물의 오른쪽에 당시의 죄악상을 보여주는 사진ㆍ문서ㆍ세균무기 등을 전시해놓은‘죄증진열관’이 있다. 이곳의 안내원 ?雪?(21)양은“하루 평균 1백여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데 대부분이 중국인이고 어쩌다가 일본인도 들른다. 한국에서 온 손님은 당신이 처음인 것 같다”며 관람객들의 방명록을 펼쳐보였다.

 731부대는 ‘이시이(石井)부대’라고도 불렸는데, 부대장인 일본 육군중장 이시이 시로(石 井四郞)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진열관의 한쪽 벽면에 콧수염을 기르고 훈장을 늘어뜨린 이시이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밑에 생체실험과 세균개발의 책임자 기다노 세이지(北野正?)가 연구실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사진이 있다. 만주의과대학 세균학교수이자 관동군 군위였던 그는 1942년 8월 731부대로 부임하여 잔인한 생체실험을 총지휘한 일급 戰犯이다.

 특히 1940년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세균무기 개발에 혈안이 되었으며, 731부대에 세균생산 능력을 극대화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731부대는 연간 페스트균 5백~7백kg, 장티푸스균 8백~9백kg, 탄저균 5백~7백kg 등을 생산해내는 가공할 세균공장으로 변모한다. 만약 5백kg의 콜레라나 장티푸스균을 비행기에 싣고 소련이나 동북 만주지방의 주요도시ㆍ기지ㆍ중공업지역ㆍ항만ㆍ강 등에 뿌렸다면 무려 17만㎢를 세균으로 오염시킬 수 있었다고 하니, 일제가 얼마나 엄청난 대살육을 흉계하고 있었는지 소름이 끼친다.

 이들이 더 강력하고 살상력이 빠른 세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한 종류는 31가지나 된다. 고속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사람의 생피를 짜내는 착혈실험, 인간의 피와 말의 피를 서로 교환해보는 人馬血교환실험, 진공ㆍ기아ㆍ화학가스ㆍ화력ㆍ냉동 등 극한 상황에 따른 인체의 반응과 생존력을 알아보는 실험, 각종 세균을 주사로 주입하거나 만두에 섞어 먹이고 그 독성을 실험하는 세균감염실험 등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갖가지 수법을 동원해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희생되어 하얼빈 하늘에 원혼으로 떠돌고 있는 넋들은 말이 없다. 다만 희생자 중 극히 일부의 명단이 밝혀져 전시실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다.“성명 미상의 조선인 1명, 731부대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헌병대에 체포되어 실종.”“본명 미상이나 첩보명은 金士貴(남ㆍ35세), 1941년 8월 논강현 여관에서 헌병분대에 체포, 이시이부대에 실려오다.” “공산당원 崔德銀, 나이 미상, 산동성에서 체포됨.”

 그 사람들은 모두 희생되어 생생한 증언을 듣기 어렵지만, 731부대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했던 1만여명의 인부들 중 상당수가 살아남아 참혹한 당시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731부대는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해‘노무반’을 만들었는데 이 노무반은 주로 일본 퇴역군인들이 장악했다. 노동자들은 출신지별로 묶어‘10인 연루제’를 두고, 그중 한사람이라도 도망가면 나머지 아홉사람이 책임지도록 했다. 일본 위병에게 경례를 잘 안했다는 이유로 때려죽이기도 하고,“바른 자세로 서있지 않았다”“일본말로 된 종이쪽지를 태웠다”는 등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노동자들을 죽이거나 생체실험용으로 희생시켰다.

 하얼빈의 731부대를 본부로 삼아 일제는 만주의 林口, 海林, 孫吳, 海?兒에 4개 지대를 설립하여 본부에서 진행하는 세균연구와 실험, 생산을 돕도록 하였다. 즉 731부대에서 페스트균을 생산하기 위해 쥐벼룩을 모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이들 지대에서는 지방민들을 동원하여 쥐사냥을 시키는 식이었다. 지대원들은 살아있는 쥐를 벼룩이 들어있는 건초통속에 벼룩이 쥐의 피를 빨아먹고 번식하게 했는데, 쥐 두 마리가 뼈대만 남게 빨아먹혔을때는 평균 10g의 쥐벼룩이 나왔다고 한다.


 731부대가 자체 생산한 세균무기들을 실제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작전지역의 민간인 소탕에도 사용한 사례들이 밝혀지고 있다. 1941년 봄, 星泡子 지역의 한 마을에 급성전염병이 발생하여 50여가구에서 30여명이 사망하고 40두의 소가 죽었는데, 이 전염병은 일본군이 실험삼아 퍼뜨린 세균 때문이었다.


페스트균 등 배양. 세균전도 저질러

 전투에서는 세균포탄을 적지에 공중투하하거나‘세균덩어리’인 가축ㆍ쥐들을 풀었으며, 우물ㆍ수도ㆍ강 등에 다량의 세균액을 쏟아붓는 방법을 썼다. 소련ㆍ몽고와의 하라하전투에 참가했던 한 731부대원은 40년후에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1939년 8월말의 어느 날 밤, 우리는 하라하강에 22.5kg의 세균액을 쏟아부었다. 그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우리 반장이 실수하여감염되었는데, 그는 며칠후에 죽었다. 그날 세균액을 운반하다가 어느 농가에서 잠시 쉬었다. 주인이 정성껏 대접해주었지만, 그가 안보는 사이에 우리는 페스트균을 그집에 몰래 뿌리고 나왔다. 작전을 끝내고 돌아오다 보니 그집 3식구가 모두 죽어 있었다.”(徐文方지음〈중국침략 일본군 731부대〉에서)

 만일 일제가 최후발악으로 731부대 생산세균 전량을 식민지이던 만주와 한반도에 풀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반세기에 걸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중국침략은 중국인민을 큰 재난에 빠뜨렸으며, 일본인민 또한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지난일을 잊지 말아 앞날의 교훈으로 삼도록 뚜렷이 기억하자.”1972년 중ㆍ일수교당시 발표한 周恩來총리의 강연이‘731부대 죄증진열관’입구에도 쓰여 있었다. 그러나 거리를 누비는 자동차도, 호텔의 냉장고ㆍ텔레비전도 일제 일색인 오늘의 중국이 과연 역사의 교훈’을 ‘뚜렷이’기억하고 있는 중인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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