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유럽 텔레비전 ‘미제침략’ 저지
  • 이재원 (미 클리블랜드주립대 교수ㆍ언론학) ()
  • 승인 1990.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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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50% 이상 ‘유럽화’하기로 … 미국선 ‘손해배상 청구’으름장

최근 미국의 무역대표 칼라 힐스는 “유럽공동체(EC)라는 것은 결국 ‘유럽성곽’을 만들겠다는 움직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럽이 보호무역 책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를 불공정거래행위로 간주, 미국의 88년도 무역법에 의거하여 제소하겠다. 무역관세일반협정(GATT)에 따라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 이렇게 협박조의 경고를 하고 나섰다.

 우리도 심심찮게 들어왔던, 귀에 익은 목소리이다. 단지 대상이 유럽공동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또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까. 유럽공동체가 미국의 농산물을 거부한 것도 아니고, 지적소유권 보호를 태만히 한 것도 아니다. 유럽공동체가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수입을 규제하겠다고 나오고 있어서 일고 있는 분쟁이다.

 

미국의 ‘저질문화’ 범람에 위기의식 느껴

 그런데 유럽공동체 국가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텔레비전 영화의 수입을 무역이라는 상행위 차원에서 보지 않겠다고 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쉽사리 해결될 전망이 아니다. 이들 나라는 근년 들어 미국 텔레비전의 저질문화가 유럽의 텔레비전망을 무질서하게 침식하고 있어 유럽의 ‘문화적 동질성’ 유지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규제하지 않으면 미국에 의한 ‘문화적 제국주의’가 모처럼 조성하려는 ‘유럽문화권’을 석권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문화적 동질성’이니 ‘문화적 제국주의’니 하는 용어는 70년대에 제3세계권에서 서구와 미국을 대상으로 쓰던 것이었다. 정치적 식민주의가 2차대전과 함께 퇴색하자마자 선진 강대국이 저개발 약소국을 언론과 문화로써 다시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생겨난 용어이다. 선진국을 대상으로 제3세계권이 쓰던 그 개념을 지금에 와서는 유럽국가들이 미국을 대상으로 쓰고 있으니 흥미롭다.

 문제의 발단은 89년 10월 유럽공동체가 ‘유럽공동체 텔레비전치짐’을 채택한 데 있다. 이 치짐은 “회원국들이 자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50% 이상’을 유럽지역 생산물로 충당하는 방안을 세우고 관련 국내법을 정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기한은 91년 10월로 정했다. 뉴스 스포츠 퀴즈쇼 광고 텔레텍스트 시간은 위의 50% 계산에서 제외되었다. 이 지침은 또 회원국이 방송예산의 10%를 유럽지역 작품의 개발에 할애하도록 규정했다.

 이 치짐은 실은 80년대 초부터 유럽의회에서 계속 토의되었던 것으로, 프랑스에 의해 주도돼왔다. 프랑스에서는 83년에 이미 텔레비전의 유럽 프로그램 방영률을 60%로 정했다. 프랑스는 유럽공동체 토의에서 60%선을 고집했으나 현실성이 적다는 이의가 제기돼 결국‘50% 이상’으로 귀착되었다.

 92년부터 12개 회원국간의 국경없는 자유무역으로 하나의 거대한 경제권을 이루고 더 나아가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려고 하는 유럽공동체는 일본제 텔레비전 수상기와 미국산 프로그램의 범람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회원국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수입의존도는 평균 30%이고 이중 44%가 미국산이다. 그러므로 미국산의 전체 점유율은 현재 13%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럽공동체는 90년대에 들어서 방송망과 채널의 수가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회원국내의 방송채널은 현재 70여개인데 90년말까지 2백개 이상으로 증가할 경우 이에 필요한 방송량은 연간 약 50만시간 분량으로 늘어난다. 50만시간 분량에서 회원국의 자체 제작능력은 20%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같은 규제가 없으면 미국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범람할 수밖에 없다.

 

영국은 대미수출 보복당할까봐 걱정

 미국의 텔레비전계에서는 보통 30분짜리 연예물 제작비를 50만달러로 잡고 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을 유럽에 수출할 때는 1회 사용료로 생산가의 10%를 받는 것이 통례이다. 방송망의 제작물은 수출에서 얻어진 수입을 과외수입으로 취급하고, 독립프로덕션은 수출수입을 생산원가에 미리 계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이다. 경제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미국은 수출을 하여 수입을 늘려 좋고, 유럽은 수입함으로써 생산비의 90%를 절약하니까 제작물의 수입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유럽문화권’이라는 원대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지침의 성공 여부는 미지수이다. 텔레비전 문화에서 앞선 영국은 자국 프로그램을 미국에 수출하는 데 보복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으며 스페인은 남미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영국은 여전히 독일을 ‘의심’하고 있으며, 민족 감정이 좋지 않은 독일과 프랑스 두나라 국민은 서로의 프로그램을 즐겁게 볼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의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수입규제 조치 자체는 이론적 차원에서 타당성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88년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때 캐나다측의 고유문화 보존에 관한 우려를 수용해 ‘문화산업’을 예외조항으로 인정한 전례를 남겼다. 또한 유럽에서의 사용료 가격 책정이 제작비의 10%에 머무는 한 유럽공동체 국가들은 자체 생산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한다는 주장을 펼 수 있다. 무역적인 차원에서 오히려 유럽공동체가 미국을 역습할 수 있는 근거가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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