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사가 없어진다고 치자
  • 박중희 (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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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양의 아버지들은 아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선 자기 배부터 갈라놓고 보느냐.” 언젠가 ‘가족’을 주제로 열린 이곳 BBC 텔레비전 좌담회에서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만으로도 과연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이구나 한 적이 있었다.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아들이 잘못했다고 자기 배를 가르는 아버지는 서양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앞의 질문이다.

 최근 서울에서 온 신문에 보안사의 정치사찰 문제가 대문짝만하게 난 것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동양과 서양은 무척이나 다르다.

 이제 한 4, 5년은 됐나 보다. 런던에서도 그 이름난 첩보기관 Ml5가 각계 ‘要사찰 인물’의 명단을 만들어놓고 그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일 등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직 첩보원의 폭로로 드러나 세상이 좀 떠들썩했었다.

 그러나 그 북새통에서도 누구 하나 배를 가르지도 않고, 목을 날리는 일도 없어 좀 이상하다 했다. 그러나 더한 게 있었다. 인권하면 극성맞게 시끄러운 게 이곳 정당이나 언론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목 자르라” (Off with his head)는 말도 곧잘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런 소리하는 걸 어디서도 듣질 못했다 이런 경우, 자의건 타의건 “이게 다 내 탓이로소이다”하고 물러나게 마련인 우리의 경우와 다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왜 그러냐’에 대한 대답인즉 복잡할 게 없다. 이런 경우 문제가 특정한 사람에 있기보다는 그러한 사태를 낳는 ‘시스템’에 있다는 것이다(비행기가 자주 떨어지는 항공회사가 있다고 하자. 사고가 났을 때 그 회사 사장, 아니 사장 할아버지가 배를 갈랐다. 그것만으로는 비행기가 추락할 위험성이나 그에 대한 일반의 불안이 티끌만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정보기관에 의한 추문에서도 그렇다. 거기서 문제되어야 하는게 뭐냐도 뻔하다. 그것은 그러한 사찰활동의 주체가 되는 기관이 과연 주권자에 대해 책임을 지게 돼 있는가, 있다면 어떠한 형태로 어느 정도로 되어 있는가, 그러한 활동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합리적인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것의 바탕을 이루는 법 그 자체가 민주적 합당성을 지닌 것인가라는 따위다. 그것을 두고 떠드는 게 ‘시스템이 문제’라는 얘기다.

 이번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던 체코 대통령 바츨라브 하벨이 불과 1년 남짓 전 그를 형무소에 처넣었던 비밀경찰관 · 판검사 등을 지금도 그대로 두고 있는 기특하고 기막힌 사연의 이유도 역시 그런 데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아버지나 長이 ‘배를 가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독특한 문화나 도의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건 그것대로 미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구미 사람들의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또 고의건 말건, 결과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는 반도덕적이고 부당한 일일 수도 있다. 하나의 가까운 예로 우리의 소위 ‘5공청산’이라는 것이 특정인사의 감투를 벗기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루어졌는가를 이쯤에서 되물어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保安司’해체되면 ‘治安司’생긴다

 런던에서의 정치사찰 문제에, 있을 법한 일이 없어서 이상하게 여긴게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Ml5를 없애라”는 소리가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 역시 알아내기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그러한 요구를 한다는 게 좀 순진한 일이고 또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동서고금 어떤 집단치고 경쟁상대편의 사정을 살피는 ‘스파이짓’을 안하는 경우란 없다. 십계명의 모세가 심심치 않게 스파이를 여기저기로 보내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성서 속에서 읽는다. 같은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삼손과 딜라일러’ 얘기 속의 딜라일러는 삼손의 힘의 원천이 그의 털과 수염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다음 그것을 깎아 없앰으로써 그와 이스라엘을 패퇴시킨, 말하자면 ‘여간첩’이었다. 하다못해 탁구팀도 상대방 실력이나 전술을 ‘사찰’한다.

 “Ml5를 없애라”는 아우성 때문에 정부가 정말 그걸 없앴다고 치자. 그 이튿날부터 Ml6가 Ml5가 하던 일을 계속할 건 보나마나다. ‘保安司’가 하던 일을 ‘治安司’가 할 거라고 해도 된다. 요구해봐야 소용이나 별 뜻이 없는 건 안하는 게 상수다. 그보단 해야 할 게 무엇이냐를 찾아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게 잇속으로도 낫고 우습지 않아 좋다. 그래서도 굳이 “Ml5를 없애라”는 소리에 기운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와 다르다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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