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죽 울리는 地自制 국민은 지쳤다
  • 이흥환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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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약속 ‘물거품’ 연속… 선거시기 두번이나 미뤄

시기 · 방법’ 합의 불구 여야 ‘첨예부분’ 여전히 미결상태

‘달려오는 지자제’ ‘지방정치시대 발진’ ‘우리 지역 홀로서기 도상연습 한창’ ‘지자제 시동걸리다’-지난해 1월 여러 언론에서 지방자치제의 부활을 주제로 한 특집기사의 제목들이다. 88년 5월1일자로 지방자치 관계법이 발효됨으로써 1961년 이래 중단됐던 지방자치제가 27년만에 부활, 우리나라도 지방화시대를 맞게 됐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곁들여졌다. 여야 4당이 제안한 개정법률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불가피하긴 하지만 어쨋든 89년 하반기에는 지자제가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설기사도 실렸다.

그러나 2년이 지난 90년 12월초 현재까지 지방자치제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지방자치 관계법과 이에 근거한 특집기사들이 모두 ‘휴지’가 돼버린 셈이다. 물론 현재 민자당과 평민당간에 지자제 선거법 협상이 진행중이긴 하다. 하지만 정작 지자제의 당사자인 국민은 아직도 반신반의다. 여야간에 이루어진 정치적 합의사항이나 이미 입법단계를 거쳐 명문화된 법률까지도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꼴을 한두번도 아니고 수차례나 겪어온 국민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지자제 실시시기와 방법에 대한 여야간의 최종 합의내용은 지난달 17일 민자당 金潤煥 원내총무와 평민당의 金令培 총무가 서명해 문서화한 합의문서에 명시돼 있다.

△광역과 기초의회 선거는 1991년 상반기중에 실시하고 △광역과 기초단체장 선거는 1992년 상반기중에 실시 (의원선거로부터 1년 이내)하며 △정당공천제는 광역의회와 단체장선거에만 허용하고 기초의회와 단체장선거에는 이를 배제한다(다만 다음번 선거부터 정당공천제 여부를 여야가 협의)는 내용이다. 선거법은 이 합의에 따라 이번 정기국회 회기내에 최우선적으로 입법한다는 내용도 합의문에 들어가 있다.

11 · 17 합의문은 언제 어떻게 지자제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을 여야간에 다시한번 정치적으로 약속한 문서다. 그러나 이 합의문은 선거실시의 대략적인 원칙만 거론했을 뿐, 선거구 의원정수 선거운동방법 등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미결상태다. 세부사항을 놓고 여야간에 협상이 한창 진행중이지만 결과는 예측불허다. 선거구나 선거운동방법 등은 결정적으로 당의 위상을 좌우한다. 여야간 협상에서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한 부분들이다.

게다가 민자당은 ‘지자제 실시=평민당의 선거기반 다지기’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민자당이 ‘발행’한 11 · 17 합의문이라는 ‘약속어음’이 과연 제 날짜에 결제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평민당이 내세우는 것은 ‘지자제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당위론이다.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지자제선거법의 입법화를 예산심의와 연계해서 다루겠다면서 미리 쐐기를 박아놓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평민당이 지자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의 순수성은 의심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 행정관서 지자제 만반의 채비

89년은 지자제 실시의 원년이 아니라 지자제 ‘바람’의 원년이었다. 89년초부터 행정관서는 지자제에 대비했다. 지자제 실시와 더불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 토지 건물과 공공시설 등을 시와 구의 재산으로 구분해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쳤고, 시청에 지방의회과를 신설하고 각 자치구마다 지방의회 추진반을 설치해 분야별 업무에 대비하기도 했다. 충청남도에서는 의회청사를 마련하고 의회의원 선거에 필요한 선거 관련 비용으로 시 · 군당 3억~6억원까지 계상해놓기도 했다. 부산직할시도 시청건물 3 · 4층을 보수, 의회 집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보수비까지 책정해놓았다. 목포시에서는 주변의 영암면과 삼호면 대불공단을 시 관내로 흡수하려고 ‘땅따먹기’에 온 행정력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89년 11월말부터 ‘입으로만 떠드는 지자제’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특별시와 5개 직할시, 9개 도 등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 의회선거를 90년 상반기에 실시한다는 89년 5월 여야 중진회담의 합의일정 자체가 90년 하반기로 미뤄지거나 자칫하면 당분간 유보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팽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12월15일, 盧泰愚 대통령과 3김씨가 청와대에 모여앉았다. 90년 상반기에 지자제 선거를 실시한다는 기본 일정을 네사람이 합의해 발표했다. 4일 후인 19일에는 여야합의에 의해 지자제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회기내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지자제법이 갑작스럽게 여야합의를 거쳐 국회를 통과하자 그 이면에는 정치적 흥정이 깔려 있다고 정가에 뒷얘기들이 나돌았다.

어쨌든 12월20일부터 나라 전체가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앞당겨온 선거열풍 전국이 들썩’ ‘시도마다 의회 청사신축 부산’ ‘법령 등 준비 끝, 시행만 남았다’ ‘새로운 정치 예비군 형성’ ‘내무부, 선거준비까지 최소한 80일 예상’ ‘정치지망생들 출마 꿈틀, 10대 1 넘는 곳도’-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다시 지자제를 기사화했다. 정치지망생들은 연말연시를 맞아 동창회나 종친회 등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얼굴알리기에 분주했다. 연하장의 홍수가 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불과 한달 남짓 후 지자제는 다시 물거품이 돼버렸다. 당시 민정당 朴泰俊 대표위원이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여나 야 일각에서 지자제 실시를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90년 1월16일)는 것이었다. 朴俊炳 사무총장도 거들었다. “금년 상반기중 지자제 실시의 여야 합의사항을 준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2월 임시국회에서 지자제 선거법이 통과되느냐에 달렸다”고 연기 가능성을 흘린 것이다. 그리고 6일 후인 1월22일 3당합당 사건이 벌어졌다. 지자제는 또한번 유물이 돼버린 것이다.

90년 9월28일 마침내 “지자제 연기는 헌법위반”이라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지방자치학회(회장 盧隆熙 서울대교수)의 교수 8명이 국회를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소원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국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법률을 제정개폐하는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스스로 정한 법률상의 지방의회 선거시기를 두번이나 지나쳐버리도록 한 것은 명백한 헌법위반이며 국민기본권 침해”라는 주장이었다.

趙昌鉉 교수 (한양대 지자제연구소장)는 “정치권이 처음 합의한 84년에 지자제를 실시했더라면 우리는 벌써 몇년간의 지자제 경험을 축적했을 것”이라며 “정치의식은 경험과 실천 속에서 성숙하고 변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학계에서는 지자제 실시야말로 지방의 정치현실을 엄청나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중앙정치에까지도 그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金光殖 교수 (한신대 · 정치학)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직선은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임명권자 눈치나 보던 도지사나 시장이 지역주민들의 눈치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과정상 다소 부작용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지역주민들에 의한, 지역주민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시대를 낳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건설부의 서울 행정우선순위에 밀려 둑 수리를 미루다 홍수를 만난 일산지역,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무리하게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계획을 추진하다가 시위로까지 번진 안면도 사태 등도 결국은 ‘위’의 눈치에 급급한 관료행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구조적 문제인 서울의 지나친 비대화와 지방의 공동화현상도 지자제를 통해서만이 극복 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해방 직후에는 전체 인구 3천만의 30분의 1인 1백만이 거주하던 서울이 현재는 4분의 1이 거주하는 ‘공룡’이 되고만 것은 근본적으로 중앙집중제가 낳은 기형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조창현 교수는 “모든 정치권력과 기회가 중앙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서울로만 몰려들었던 것”이라고 분석하며 “지방자치제의 실현은 지역의 엘리트들에게 할 일을 줌으로써 그 지역에 남아 있을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재정자립도는 문제 안된다”

한편 혼탁한 선거의 부작용과 함께 지자제 실시의 걸림돌로 자주 거론되는 ‘재정자립도’는 오도된 문제인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吳然天 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원)는 “어느 나라건 중앙정부가 아닌 하위단체는 재정자립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재정자립도를 지자제 실시 여건과 연관해 해석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또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의 평균 재정자립도가 52%에 불과한 이유는 실제 지방에서 걷히는 세금이 적어서가 아니라 세원배분에 있어 국세와 지방세간의 불균형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 노른자위 세원은 거의 중앙정부의 국세로 편입하고 지방세에는 부스러기만 편입시킨 세목배정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자제가 실시되면 국세 중 일부 항목을 지방세로 넘기거나, 관광세 자원세 등의 新세원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본말이 전도된’ 언론의 보도가 지자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는 데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도 지적된다. 즉 지자제를 여야의 협상물로 인식하고 당리당략의 제물로 삼는 여야 정치권도 문제지만, 언론이 협상 자체에만 매몰돼 마치 지자제를 ‘여야 협상물’ ‘대권의 장기적 포석’쯤으로 국민의식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치란 정치의 기본이면 필연적 추세다. 지방자치는 중앙정부가 부당하게 독점했던 지방민들의 당연한 권리를 돌려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정치권의 지루한 줄다리기를 지켜보는 한 학자의 항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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