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총선 앞두고 발톱 내민 이스라엘
  • 파리·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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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파 利害따라 레바논 재침공 가능성

 이스라엘군은 최근 레바논에 침입하여 과격파 이슬람 집단 헤즈볼라(神의 당) 지도자를 암살한데 이어 30대의 탱크를 앞세워 헤즈볼라 등 게릴라 거점을 강타함으로써 중동에서 전쟁이 다시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감돌게 했다. 헤즈볼라가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유대 국가에게 보복을 당했으며, 또 레바논이 이스라엘에게 짓밟히는 곤경에 처해 있는 배경은 무엇인가.

 헤즈볼라 지도자 아바스 무사위의 피살은 이스라엘의 치밀한 작전의 결과였다. 그는 남부 레바논에서 건배 이슬람 근본주의 지도자를 추모하는 행사에 참석하고 자동차로 집으로 돌아오던 실에 이스라엘 헬기 2대의 로켓포 공격을 받고 폭사했다. 그의 벤츠 승용차에 동승했던 부인과 어린 아들(6)도 함께 피살되었으며 경호원 6명도 숨졌다.

 격노한 헤즈볼라 민병대원들은 소련제 카튜사 로켓을 이스라엘을 향해 쏘아댔다. 이스라엘군은 처음에는 포격으로 이에 대응하다가 마침내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는 레바논 남단의 ‘안전지대’(폭 7~12㎞)에서 부대를 북상시켜 게릴라 거점인 2개의 촌락을 장악케 했던 것이다. 이 이스라엘 병력은 이틀 만에 철수했으나, 북진하는 과정에서 유엔평화 유지군의 경비선을 힘으로 돌파했으며 유엔군 소속 군인 수명에게 부상을 입히기까지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침공작전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수백년간 살아온 시아파 회교도 집단 중의 하나이다. 원래 시아파 회교도들은 숫적으로 기독교 신도들보다 우세하지만, 주로 레바논 남부에서 살아온 이들은 비교적 가난하며 전통적으로 정치적 발언권도 약한 집단이다.

 이란에서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나면서 80년대 초에 생긴 헤즈볼라는 극단적인 바 이스라엘 정책을 제창해왔다. 무사위는 한때 헤즈볼라의 공격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또 최근에야 석방된 서방측 인사들의 이질사건에도 헤즈볼라는 깊이 관여해왔다.

 그러나 레바논의 일반 시아파 회교도들이 이스라엘에 항상 반감을 품어온 것은 아니다. 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만 해도 그간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들에 눌려왔던 시아파 회교도들은 해방된 느낌을 가졌었다. 또 작전이 끝나면 곧 철수한다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게릴라 침공에 대비하는 데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안전지대를 관장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측 약속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주장해온 시아파 강경인사들이 모여서 형성한 것이 헤즈볼라였다. 무사위가 헤즈볼라의 지도자가 된 것은 이란의 호메이니가 죽고난 후인 89년이었다. 그는 이란의 알리 아크바르 라프산자니 현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워 최근에는 그이 현실주의 정책의 영향을 받아 레바논의 의회정치에 참여할 것을 고려하는 등 온건한 입장을 보여왔다. 그뿐 아니라 헤즈볼라 민병대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처럼 이스라엘 내에 잠입하여 테러행동을 감행하는 과감성을 보인 적이 없으며, 이스라엘 쪽으로 로켓을 발사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레이건 대통령 때 미군이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을 제거할 목적으로 감행했던 공습작전을 상기시키는 이스라엘의 헬기 기습에 대해 이스라엘측은 테러리스트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별렀던 일이라고 공업하고 있다. 눈에는 눈이라는 히브리 격언대로 원한과 복수의 악순환이 되풀이돼온 중동이고 보면 이해가 되는 일들이긴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의 강경행동 시기이다.

 소련이 묵인하는 가운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철퇴가 가해지고, 이어 미국의 주선으로 중동 평화협상이 개시되는 기적이 이루어진 시기에 이스라엘의 이같은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부의 ‘걸프전 불만’ 암살 자극
 이스라엘 행동의 동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분석이 있다. 무사위 암살 전날 이스라엘군 막사에 게릴라가 침입하여 신병 3명이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군의 기강이완에 대한 군부의 자기비판, 걸프전 때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당하고도 참고만 있어야 했던 군부의 고민 등이 암살을 감행토록 자극했으리라는 해석도 있다. 영국의 <가디안>지 특파원은 이란과 헤즈볼라를 상대로 한 인질석방 교섭을 위해 이스라엘은 아랍포로들을 돌려보냈고, 서방측 인질들이(독일인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되었지만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는 송환되지 않았으며 몇사람의 군인 유해만 돌려받은 것도 이스라엘의 불만요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는 강경파 리쿠드당의 지도자로서 6월 선거를 앞두고 강경한 대외 자세를 당 내외에 보여줘야 할 입장에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모처럼 시동이 걸린 평화협상의 장래에 하나도 도움이 될 수 없으며, 특히 레바논과의 협상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있어 자칫하면 이스라엘이 국제 여론에서 고립될 우려도 낳고 있다.

 레바논은 아랍국가이지만 종교적으로 기독교신자들과 회교신자들이 여러 세기 동안 공존해 내려온 특수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원래 아랍민족이었으나 일찍이 기독교신자가 된 마로나이트 민족이 종교박해를 피해 레바논에 정착한 것은 10세기였으며, 시아파 신자들의 집단인 드루즈 민족은 12세기부터 레바논에 정착했다.

 최근의 인구구성을 보면(84년 통계) 드루즈 등 회교도는53.8%(시아파 25.8%, 수니파 22.8%, 드루즈 5.2%), 기독교도는 46.2%(마로나이트계 22.8%, 그리스정교 10.9%, 그리스 천주교 5.3%, 아르메니아계 4.5% 등)로 갈라져 있다. 레바논 인구는 약 3백만명이다.

 레바논의 기독교도와 회교도는 평화적인 공존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각자의 거주 지역을 따로 확장함으로써 분쟁을 피하는 데 성공해왔으나, 19세기에 기독교계가 회교계 지역을 일부 잠식하려 하자 한때 내전으로 번졌다.

 오토만 제국 치하에 있던 레바논이 1943년 프랑스 통치에서 독립했을 때도 기독교와 회교는 정치권력을 균등하게 공유한다는 불문율을 바탕으로 의회정치를 펴나가기로 했다. 공존관계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이집트에 나세르가 등장하여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며 시리아와 함께 아랍연합을 구성할 무렵이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때 당시 레바논 대통령이 영국 및 프랑스와의 단교를 거부함으로써 회교도들의 반감을 산 것을 계기로 레바논의 내정은 어지러워졌다. 그후 1975년에 팔레스타인 게릴라 활동에 대한 의견차이를 계기로 국내 각파간에 내전이 시작되어 시리아·이스라엘 등 외세가 군대를 파병하고 유엔이 휴전 조정에 나서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77년에야 일단 수습된다.

 이 내전으로 팔레스타인 사람 2만명이 죽는 등 인명피해도 컸지만 레바논은 심하게 파괴됐다. 한때 중동의 스위스라고 관광객들이 사랑을 받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전 후에도 부분적인 충돌사건이 일어나다가 82년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침공으로 레바논은 다시 한번 전화에 휩싸인다. 결국 시리아군이 패퇴하고 국제 감시하에 팔레스타인 해방전선(PLO) 병력이 레바논에서 타국으로 분산 철수하는 것으로 이 전쟁은 수습된다.

 그러나 84년에서 85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로나이트계 친 이스라엘 세력과 회교측 반대세력간의 전투는 베이루트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계속된다. 89년에는 레바논 각파의 공존체제가 새로 조정되었으나 이에 반발한 미쉘 아운 장군 병력이 90년초 시리아군 철수를 요구하며 레바논 정부군을 공격하여 또 한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레바논 정부는 反이스라엘 세력 견제
 최근의 이스라엘군 침공에 대한 레바논 정부의 태도는 표면적으로는 강경한 규탄 자세이지만, 실제로는 시리아·이란 등과 협의 끝에 우기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헤즈볼라 등 반 이스라엘 과격세력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이스라엘 부대가 철수하자마자 헤즈볼라 민병대는 게릴라 거점으로 되돌아와 이스라엘을 격퇴시켰다며 승리를 주장했고, 이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한 로켓이 북부 이스라엘의 한 마을에 적중하여 어린 소녀(5)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후 국경지대는 소강상태이다. <르 몽드>지 특파원의 베이루트발 보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헤즈볼라 민병대에 가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수용소에 레바논군이 파견되어 포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강경행동이 중동의 반 이스라엘 과격세력들을 자극했으며, 가능하면 평화협상을 지향하는 흐름을 바꾸어 무력대결 쪽으로 대세를 끌어가고 싶어하는 이들을 격려시켜주었을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이번 사태가 어지러운 중동상황의 하나의 에피소드로 그칠 것인지, 평화노력 무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사태로 확대될 것인지는 좀더 기다려보아야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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