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농사 잠시 쉬세나”
  • 김영환 (KBS 프로듀서 · 민속사진가) ()
  • 승인 1997.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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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민속 명절 ‘백중’ / 전국에서 전통 잔치 열려



 우리 민족의 5대 명절인 정월 대보름 · 단오 · 백중 · 추석 · 시월 상달 중 농민들이 추축이 되어 즐기는 날은 음력 7월 백중이다. 이른 봄 씨앗을 뿌린 뒤 모심기·논매기 같은 힘든 노동 끝에 얼추 한숨 돌리는 시점이다.

<농가월령가>에 보면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새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뉴월 농사일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무더운 여름, 벼가 자란 논에 들어가서 일을 하자면 볏잎이 눈과 얼굴을 찔러 견디기 어렵다.

쌀 농사는 사람 손길을 여든여덟 번 가쳐야만 비로소 한 톨의 쌀이 된다고 할 정도로 픔이 많이 든다. 경북 예천군 통명동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무심기 노래인 <아부레이수나>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한 톨종자싹이 나서 만곡쟁이 열매 맺는 신기로운 이 농사는 하늘 땅의 조화로세 … 모야 모야 노랑모야 니 언제 커서 열매가 맺힐래. 이 달 크고 새달 커서 칠팔월에 열매가 맺힐래.’

이토록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음력 7월 백중이 되면 농민들은 논밭의 김을 다 매고 호미를 씻어 걸어 두고 쉬었다. 냇가나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술·음식과 더불어 풍물을 잡히면서 그 동안의 힘든 노동을 잠시 잊고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것을 호미걸이라 한다. 지방에 따라 백중놀이 · 세서연(洗鋤宴) · 풋굿 · 초연(草宴) · 농부의 날 · 머슴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풋굿은 굿을 하듯 놀기 때문에, 초연은 풀밭에서 잔치를 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옛날 호미걸이 때에는 마을에서 가장 농사가 잘된 집의 모슴에게 삿갖을 씌우고 황소에 태워 다른 머슴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을 돌아다니도록 했다. 이처럼 호미걸이는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고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이며 다음 일을 대비하는 휴식이었던 것이다.

현재 백중놀이 풍습이 남아 있는 곳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지방은 경남 밀양이다. 올해 아흔인 우리나라 최고의 춤꾼 하보경옹의 양반춤으로 유명한 밀양 백중놀이는 농경 의식인 동신제를 비롯해 오복춤 · 범부춤 · 병신춤 등 가무극적 요소가 담긴 개성적인 춤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머슴들이 힘차고 절도 있게 야성적인 춤을 추면, 법부들은 왼쪽 다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먼저 원을 드리듯 힘차게 뛰어다니며 헛개춤을 추는데, 그 모습에서 우리나라 전래의 호쾌한 춤사위를 엿볼수 있다.

밀양 복중놀이는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68호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만, 일부 농촌에서는 열약한 조건 속에서도 마을에 전해져 내려온 고유의 백정놀이를 이어 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북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의 백중 잔치인 삼동굿놀이이다. 괴양리의 자연 마을인 양촌·음촌·개신 마을 사람들이 펼치는 씨름판·기세배놀이·우물굿과 인간의 출생과 입신양명을 연극적으로 표현하는 삼동굿에서는 농민들의 애환이 절로 묻어난다.

요즘 지방 자치 시대를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잔치들이 새롭게 개발되어 시행되고 있다. 국정 불명의 잔치를 우리 전통 잔치라 우기는 일도 벌어진다. 우리 민족의 잔치는 흙에서 태어나 흙 속에서 묵묵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잔치였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글 · 사진 / 김영환 (KBS 프로듀서 · 민속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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