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철학자’ 크루이프
  • 정윤수(축구 평론가) ()
  • 승인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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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세상]

 
어느 분야에서나 성실한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그러나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그 흐름과 관습과 약속을 완전히 깨뜨리고 새로운 문법과 언어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축구 100년사에서도 이러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집단적 전투 체육 수준이었던 축구를 포지션의 세계로 구분해준 펠레, 축구를 분해하면 그 최소 상태는 ‘개인기’이며 바로 그 탁월한 개인기에 의하여 그 어떤 거한들도 가볍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마라도나, 상대와의 심리적·물리적 긴장관계 속에서 예기치 않은 방향을 선택하고 짐짓 뭐 그렇게 급할 것이 있느냐는 듯 한순간 긴장의 끈을 늦춤으로써 나머지 21명의 심박수에 제동을 걸어버리는 지단.

이뿐이라고? 크루이프를 왜 뺐느냐고? 그렇다. 누구라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바로 위의 명단에서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가 빠져 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패러다임을 바꾼 스타일리스트를 꼽는다면 당연히 그의 이름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그가 그라운드에서 실천했던 ‘토털 사커’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모든 나라의 숙명 같은 화두가 되고 있다.

크루이프는 1947월 4월25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그러니까 그는 얼마 전에 59세 생일을 맞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12세 때부터 네덜란드 최고 명문 AFC 아약스(Ajax)의 유소년팀에 들어가 공을 찼다. 1964년 프로 축구 선수가 되었고 1966년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1970년대는 그의 시대였다. 그는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아약스 선수로 뛰면서 유럽컵대회 3연속 우승을 거두었고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그라운드와 벤치에서 자신의 축구 철학과 스타일을 실천한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1996년 이후 네덜란드 축구협회는 그의 업적(아직 환갑도 되지 않는 사람이지만)을 기려 리그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이 자웅을 겨루는 슈퍼컵의 이름을 ‘요한 크루이프컵’이라고 부른다.

세계 축구사에 고딕체로 이름을 남긴 축구 스타 중에서 사실상 단 한 차례 참가하였고 그것도 준우승에 머무른 팀의 주장이 이토록 ‘추앙’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1978년 대회 때 크루이프는 군 장성들이 돌려가며 대통령을 해먹던 주최국 아르헨티나의 독재 상황을 비판하며 그들의 들러리가 되기를 거부해 출전하지 않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대표팀은 남미로 건너가 또다시 준우승을 거두었는데 자국 팀의 간판 주장 선수가 정치적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면서 행보를 달리한 것은 역시 네덜란드 사람답다는 인상을 준다.

현재 크루이프는 세계 축구계의 정신적 오피니언 리더이다. 실질의 권력은 국제축구연맹과 유럽축구연맹의 최고위 권력자들에게 옹립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수많은 미디어는 단 두 사람에게 축구의 앞날에 대해 질문한다.

바로 펠레와 크루이프이다. 조금 다른 것은 펠레에게는 ‘우승 후보를 지목해달라’고 부탁하지만 크루이프에게는 ‘내일의 축구에 대한 진단’을 요청한다. 그도 그럴 것이 크루이프는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매혹적인 스타일만큼이나 유려한 문장과 직관적인 성찰로 현대 축구의 향방에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물론 우리는 그들에게 질 수 있다” “내가 실수하기 전까지,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모든 불편은 편리를 갖고 있다” 는 따위 아포리즘은 그 발언자가 요한 크루이프라는 점 때문에 더욱 아리송하며 심오하게 들린다. 그와 경쟁했던 프란츠 베켄바워가 “크루이프는 나보다 뛰어난 선수다. 그러나 나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물론 이처럼 엄연한 사실에 대한 환기도 소중하다지만 그럼에도 현대 축구가 익숙한 관습으로부터 탈피하여 매혹적 스타일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길 기대하는 축구팬들은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한 골을 더 넣어야 한다”는 크루이프의 정언명법에 심장이  울컥!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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