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일년지대계’인가
  • 내일신문 · 장세풍 기자 ()
  • 승인 2006.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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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 부총리, 혁신학교·외고 지원 자격 제한 발표…“무원칙·무책임·무소신 정책”
 
전국이 때 아닌 외국어고등학교(외고)를 둘러싼 논쟁에 휩싸여 있다. 특히 돌연한 외고 분란으로 외고 진학을 준비 중이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교육계 일각에서는 교육정책이 또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6월20일 공영형 혁신학교 시범사업을 내년 3월부터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공영형 혁신학교는 학교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되, 운영은 인가권자인 교육감과 학교 운영 계획 등에 대한 협약을 맺은 종교단체·시민단체·비영리법인·공공기관 등이 자율적으로 하는 대안형 학교다. 기존 자율학교나 자립형 사립고보다 자율권이 더욱 확대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예고됐던 내용이라 발표 현장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평온하던 기자회견장은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추가 발표 내용에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부총리는 사는 지역에 따라 광역 단위로 외고 지원 자격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서울 지역 학생은 서울 시내에 설치된 여섯 개 외고에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경기도를 비롯해 지방 거주자들은 서울 지역 외고에 지원할 수 없다. 게다가 지역 제한은 외고 외에 국제 계열의 국제고에도 적용된다.

교육부는 더 나아가 입시 위주로 교과를 편성해 ‘외국어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설립 취지에 어긋나면 아예 모집 지역을 현행 학군 내로 축소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특히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 외고는 일반고나 공영형 혁신학교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교육부 발표 내용이 알려지자 외고 정책을 몇 년간 접해본 사람들은 정말로 김부총리가 ‘그런 정책을 선택했느냐’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부총리는 곳곳에 외고를 비롯한 특수목적고(특목고)를 설치해야 강남 문제 등이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해온 대표적인 경제관료 출신이다. 2003년 정부가 강남 집값을 잡겠다고 나섰을 당시 김부총리는 이를 진두지휘하는 재경부장관이었다. 당시 김부총리는 어느 자리에 가서든 자립형 사립고(자사고)와 특목고를 많이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그가 이끌었던 경제부처들은 판교 신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목고·자사고를 유치하고 ‘학원 단지’를 조성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교육계와 전면전을 치르기도 했다.

정권 차원의 보이지 않는 손 작용?

이 때문에 교육계 특히 진보 성향의 교육계 인사들은 김부총리를 교육부 수장으로 기용하는 데 반대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또한 5월17일 공영형 혁신학교 관련 워크숍에서도 김부총리를 비롯해 교육부 간부와 담당자 누구도 외고 정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졸속 결정과 함께 교육부 차원이 아닌 정권 차원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교육부 발표 내용이 알려지자 이해 당사자들이 강력 반발하고 나선 것은 예상되고 있다. 외고와 외고 진학을 준비 중인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원단체, 학부모 단체들까지 졸속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다양한 교육 주체들의 반대에도 교육부는 외고 모집 지역을 제한하는 당초 계획을 추진을 재차 밝혔다.

교육부는 지난 6월21일 정부정책 홍보 사이트인 <국정브리핑>에 ‘실패한 외고, 이젠 바로잡자’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기고에서 교육부는 “외국어 고교의 입학 정원은 주요 대학 어문계열 정원을 훨씬 웃돌아 이미 포화 상태이고, 당초 취지와 달리 입시기관으로 전락했다”라며, “5·31 지방선거에서 100여 명의 후보가 자사고·특목고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실정에서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정부로서의 자세가 아니며 외고 지역제한을 계획대로 실시하겠다”라고 밝혔다. 자사고와 특목고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운 당선자 대부분은 한나라당 소속이다.

김부총리는 6월23일 국회 교육위원회 업무 보고에서도 “외고를 현재대로 두었을 경우 2008년 대입 때 학생부 반영 비율을 50%로 높이는 정책을 반영하기 어렵게 된다”라며 “(외고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기대 이익과 이런 예상을 비교하면 외고 수요를 혁신학교로 흡수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번 외고 정책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진영 모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입시 정책은 혼란을 줄이기 위해 공청회 등을 통해 여론을 충분히 수렴한 뒤 시행하기 3년 전에 발표하는 것이 기본이다. 교육부가 새로운 외고 정책의 근거로 제시한 ‘2008학년 대입 방안’도 2004년에 발표한 정부안이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외고 정책은 현재 중학교 2학년이 고교 입시를 치르는 내년부터 곧바로 시행된다. 교육 주체 간의 충돌이 예상되고, 학생 및 학부모들의 혼란과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정책을 관례까지 무시하면서 갑작스럽게 발표한 것이다.

요식 행위 수준의 공청회도 한번 안 열어

더 큰 문제는 여론 수렴 과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를 강조해온 참여정부가 마련한 정책에 학생·학부모들의 참여가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부는 당사자인 외고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다. 외고  입시 등에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시·도 교육청과도 의견 조율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요식행위 수준의 공청회도 한 번 열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교육부는 곳곳에서 반발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서라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현행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는 해당 지역의 교육감이 외국어고와 과학고 등 특목고를 지정·고시할 수 있으며 고시에는 학생 모집 지역 권한이 포함돼 있다. 교육부는, 시행령은 대통령령인 만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교육감의 외고 설립 인가권을 환수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외고를 둘러싼 이번 논란으로 교육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고 입학 제한’ 조처를 전격적으로 발표한 이유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면 정책으로 절대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교육부의 설명은 국민 참여를 강조해온 참여정부의 정책기조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교육부가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교육부는 ‘영어교육 활성화 5개년 계획’의 하나로 영어체험마을 확충을 적극 추진했다. 당시 교육부는 “영어체험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기 위한 기반이 부족하고 외부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것도 미흡하다”라며 “영어체험학습 센터 및 영어캠프 운영을 확대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3월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초등학교 교장 회의에서 김부총리는 “영어마을은 그만 만들어야 하며 그보다는 원어민 교사를 배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라고 견해를 바꿨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자사고)문제도 기조가 바뀌었다. 김부총리는 지난해 천주교 수원교구청 이용훈 주교를 만나 “자사고를 20곳 정도로 확대 운영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입시 기관화 됐다는 비판을 받는 자사고를 확대하는 것은 정부로서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라며 견해를 번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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