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의 ‘수준별 학습’ 오늘에 되살려라
  • 김상익 편집위원 (silverbeatle@hanmail.net)
  • 승인 2006.08.0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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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익의 교육일기]

 
 말이 난 김에 고급반(AP 클래스) 편성에 대해 한 마디 더 하자. 이번에는 친구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아이는 지금 경기도 일산의 평범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3학년이다. 공부? 물론 잘한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왕따. 그렇다고 해서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밝고 명랑하다. 문제가 있다면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이다.

  그처럼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독서광이라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독서광이든 축구광, 하다못해 게임광이든 상관없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이들의 집중력이다. 우리가 흔히 ‘이러저러한 재능을 타고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상대적으로 어떤 대상에 강한 흥미를 보이느냐를 구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절대적으로 집중력이 강한, 이른바 천재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론하지 말자).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교육이란 그러한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이끄는 것이다. 

  유난히 역사와 과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 아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줄줄 외웠다. 책의 내용을 꿰는 정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무려 열 권이나 되는 책을 머릿속에 통째로 저장하고 있다. 얼마 전 그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 검인정 사회 교과서에서 연도가 틀린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해가 서기 392년인데 교과서에는 329년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교육 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며칠 전 그 친구를 만나니 최근에 학교에 불려갔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업 시간에 튀는 행동을 자제할 수 있게끔 부모가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는 선생의 하소연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선생이 지적하는 그 아이의 튀는 행동은 다름이 아니라 끈질긴 질문이다. 어떤 날은 한 시간 내내 선생을 물고 늘어지며 질문과 대답의 랠리를 펼치는 탓에 수업이 방해된다는 것인데,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친구 아들의 ‘사회성’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스치면서도 그토록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장려되기는커녕 왕따의 원인이 되고 마는 우리 교육의 경직성에 화가 났다.  

똑똑한 아이가 왕따당하는 까닭

  친구 아들이 유별나게 뛰어난 천재성을 타고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정도의 학생이 그가 다니는 학교에만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무 명 정도는 있으리라고 추측한다(근거는 없다). 우리나라 전체로 확장하면 그 수는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왜 하루 종일 다른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 끼어 앉아서 재미없는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하루에 단 한 시간(과목)이라도 그런 아이들이 선생과 질문을 주고받고 열심히 토론하는 교육은 왜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불가능한가. 차별과 불평등을 낳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령 제2의 박지성·박주영이 될 꿈나무들을 엘리트 팀(이를테면 학교 대표)에 발탁하지 않고 일반 학생팀(반 대표)에 묶어놓는 것은 공평한 일인가? 

  그런저런 이야기 중에 내 친구가 불쑥 서당 교육의 장점을 들먹였다. 코흘리개부터 떠꺼머리총각까지 한 방에 모아놓고 공부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가만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다. 학생의 능력에 맞도록 ‘맞춤형 수준별 학습’이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이 바로 서당이다. 한쪽에서는 간신히 <동몽선습>에 들어갔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서삼경>을 공부한다. 나이에 따른 구분도 없으니, 다 큰 총각이 초급반에서 쩔쩔매는데 일곱 살짜리 코흘리개가 고급반으로 월반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서당이다. 왜 나에게(우리 아이에게) <천자문>만 가르치느냐고 항의하는 학생도(학부모도) 없다.

  지금의 민주적(그러니까 대중적) 교육에 비해서 우리 전통의 서당 교육은 유연성(flexibility) 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굳이 미국 교육 시스템을 흉내 내는 것이 탐탁지 않다면, 서당 교육의 장점을 벤치마킹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 괜한 말은 아닐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것을 한국이 아니라, 담임 제도가 없는 미국 고등학교 교실에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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