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의 빙판에 기적을 꽃피우다
  • 김석(경향신문 기자) ()
  • 승인 2006.11.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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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세계 피겨 여왕’ 우뚝…열악한 환경·잦은 부상 이겨낸 값진 결실

 
김연아(16·군포 수리고)는 언제 ‘국내용’이 될 수 있을까? ‘피겨 요정’ 김연아가 2006~200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지난 11월21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딸을 기다리던 아버지 김현석씨(50)는 “연아가 국내용이었으면 벌써 그만 두게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내를 24시간 둘째 딸에게 내주고 주방 일까지 도맡아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는 “연아가 세계주니어대회에서 처음 우승한 2년 전에야 피겨를 계속 시키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김연아가 처음 세계주니어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2004년 9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04~2005 주니어 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였다. 아버지 생각대로 김연아는 ‘국제용’이었다.

 김연아는 이후 지난 3월에는 세계주니어선수권 대회에서 마침내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를 제치고 우승했고, 이번에는 성인 무대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그녀는 이제 외국 전문가들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꼽는 세계적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김연아는 아직 ‘국내용’은 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대회에 출전해도 찾아주는 팬이 없고, 연습할 곳도 마땅치 않다.
 지난 1월8일 태릉실내빙상장에서 열린 제60회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 김연아가 1년에 딱 두 번 출전하는 국내 대회 중에서도 규모가 큰 대회였다. 관중석은 1백77석. 불과 한 달여 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김연아가 서기에는 너무 좁은 무대 같았다. 관중이 넘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으로 경기장을 찾았지만 헛된 생각이었다. 관중석에는 경기를 마친 선수들과 선수 가족,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들만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연아는 매일 늦은 밤까지 스케이트를 탄다. ‘훈련 벌레’여서가 아니다. 오전에 태릉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나면 오후에는 훈련할 곳이 없어서다. 경기도 군포 집에서 가까운 과천실내링크에서 일반인 사용 시간이 끝난 밤 10시 이후에야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 1년 전 김연아는 “잠이 모자라요. 스케이트 타는 시간이 앞당겨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지만,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다.

 피겨스케이팅이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지 1백10여 년. 하지만 아직도 ‘등록 선수 100명’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연아가 나온 것은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말이 없다.
 김연아는 유치원생이던 10년 전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어머니 박미희씨(47)와 네 살 위 언니를 따라 과천실내링크에 간 것이 계기였다. 김연아를 본 강사는 박씨에게 “재능이 있다”라며 피겨 선수로 키울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한국에 ‘피겨 신동’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불편한 신발로 고통…두 달 전 은퇴까지 결심

김연아는 이내 국내 피겨 무대를 주름잡기 시작했다. 1999년과 2002~2004년 전국체전 우승, 2000~2002년 종별선수권 우승. 중학교 1학년 때인 2003년에는 국가 대표가 되었다.
 어디나 그렇듯 영광 뒤에는 희생이 있다. 김연아 뒤에는 어머니 박씨가 있다. 김연아의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오전 9시에 일어나서 윗몸일으키기 등 복근 훈련을 하고 태릉선수촌에 가서 낮 12시부터 2시까지 스케이트를 탄 뒤 군포 집으로 돌아가 잠시 쉬고 밤 10시부터 2시간 정도 다시 스케이트를 탄다. 집에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들면 새벽 1시가 넘는다. 사이사이 다른 운동을 하고 학과 공부도 한다.

 
 박씨는 이 일과를 모두 김연아와 함께 한다. 경기 군포시 집에서 태릉선수촌과 과천실내링크로 김연아를 실어 나르는 일도 박씨의 몫. 하루에 차를 운전하는 시간만 3~4시간이다. 김연아가 1년에 쉬는 날은 2~3일 정도. 박씨가 김연아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자연히 아버지 김씨와 언니는 뒷전으로 밀렸다. 주방 일까지 책임져야 하는 김씨가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씨는 또 “연아도 잘 했지만 대학 2학년까지 자기 힘으로 잘 자라준 연아의 언니도 대견스럽다”라고 했다.

김연아는 요즘 ‘성장통’을 앓고 있다. 지난해 초만 해도 키 1m56cm, 38㎏의 가냘픈 소녀이던 김연아는 그해 여름을 지나면서 키 1m61cm에 몸무게도 40㎏ 이상으로 부쩍 자랐다. 연기의 우아함을 더하는 좋은 신체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도 함께 생겼다.
 김연아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정확한 점프를 구사하는 여자 피겨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외국의 심판 세미나에서 그의 점프 장면을 자료로 삼을 정도다.

 이렇게 힘 있는 점프를 구사하는 선수가 몸까지 커지자 신발이 견뎌내지 못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좋은 스케이트 부츠를 구해 신었지만, 한 달이면 바닥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신발을 신고 훈련하다 보니 무릎과 발목에 부상이 왔다. 마땅한 해결책도 찾을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도 쓰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어머니 박씨는 올 시즌 시작을 앞둔 지난 9월 은퇴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펑펑 울면서 대한빙상경기연맹 이치상 행정부회장에게 “그만두겠다”라고 전화를 했다. 이부회장이 어렵사리 집을 찾아갔으나, 집에 있으면서도 기척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부회장이 아파트 단지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 우연히 집 밖으로 나온 박씨를 만나 설득하지 않았으면, 김연아의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김연아를 처음 만나고 1년6개월. 그동안 소녀는 많이 달라졌다.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하고 돌아오던 지난해 봄 소녀는 말이 거의 없었다. 표정도 어두워 보였다. 태릉선수촌에서 단독 인터뷰를 했던 지난해 9월.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던 사람은 주로 어머니와 당시 그를 지도하던 김세열 코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표정도 밝아졌고, 말도 잘 한다. 입을 열기 시작한 그의 마음속에는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의젓함이 있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생각은 몇 년 전에 버렸어요. 제 직업은 학생이기보다는 스케이트 선수라고 생각해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이지만 자신의 책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2차 대회 때 동메달을 땄는데 더 뛰어난 선수들이 나온 4차 대회에서 우승한 배경을 묻자 “잘하는 선수가 많아 나도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얘기했다. 얼굴은 아직 앳되지만, 승리욕은 강했다.

 소녀의 목표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녀는 “성적은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이 똘똘한 소녀를 계속 지켜보고 싶다. 그녀가 한국의 피겨스케이팅 역사를 엄청나게 바꿔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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